158화 퇴사
곽성찬 본부장의 정식 직함은 ‘미디어콘텐츠개발전략기획본부장’이다.
원래라면 서인하 국장에게 돌아갔을, 길기도 참 긴 그 직함의 포인트가 바로 전략기획실.
예능, 드라마 등을 통틀어 NBS 내에서 제작되는 방송들을 총괄하는 것은 물론, 향후 설립될 다양한 플랫폼으로 진출할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곳이다.
신사업부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그렇기에 OTT 서비스를 경험한 외부 인사인 곽성찬 본부장을 영입한 것이리라.
아직은 시작이라 이사 회의에 참여하는 정도지만, 차츰 전략기획실의 영역은 넓어질 예정이다.
예능국, 드라마국을 가리지 않고 현재 전략기획실로 많은 사람이 발령을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방송국 차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부서.
곽성찬 본부장은 그런 제안을 하고 있었다.
“밖에서부터 강대한 PD의 방송은 재밌게 봤습니다. 알겠지만, 난 OTT 업체 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사실 시청률이나 광고나 이런 것보다는, 다운로드나 조회수를 더 따지게 됩니다. 강대한 PD의 방송은 다른 방송국들 포함해서 여타 예능들보다 훨씬 성적이 좋았어요. 그것은 TV뿐만이 아니라 다른 플랫폼에서도 먹히는 방송을 강대한 PD가 만들고 있다는 말이겠죠.”
최근 몇 년 사이, 스마트폰이 발달하고 인터넷이 방송계로까지 파고들면서, 시청자들의 시청 패턴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집에 굳이 TV가 없어도 OTT 서비스 등을 통해 TV 방송은 얼마든 즐길 수 있고, 그렇기에 방송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시청 패턴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청률은 곧 광고. 제작비가 나오냐 마냐의 싸움인데, 이제 그런 계산법이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더커버 싱어>나 <더 라이벌>은 인터넷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있었다.
“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요. 전 그냥 좋은 방송을 만들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그런 성실한 노력이 빛을 본 거겠죠.”
빙긋이 웃는 얼굴은 분명 친절해 보였는데, 어쩐지 그 이면에 다른 계산이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신호현 이사나 신동욱 실장과는 또 다른 타입의 수완가로 보인다.
“그래서, 전략기획실에서 아직 영입을 고민하고 있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강대한 PD가 와 줬으면 합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이어 말했다.
“인터넷 콘텐츠 개발 담당으로, 팀장 위치로 와 주겠습니까.”
“…….”
팀장이라니.
나는 눈을 끔뻑였다.
3년차에 대리를 단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제 5년차를 앞두고 있는 나를 팀장으로 데려가겠다?
“앞으로 방송계는 많이 바뀔 겁니다. 인터넷이 더욱 사람들 생활 속에 파고들 거고, 방송은 더 이상 TV라는 기기만으로 자생하진 못할 거예요. 이미 다른 방송국들은 변화를 시작했고, NBS는 오히려 늦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좀 더 능력 있는 사람을 그 위치에 올려야 한다고 봐요.”
잘 정리한 헤어스타일만큼이나 깔끔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곽성찬 본부장.
“강대한 PD는 앞으로도 꼭 필요한 인재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전략기획실에 합류해서, 나랑 같이 큰 청사진을 그려 보는 건.”
얼마 전 채널T의 허소윤 CP를 만나면서…… 제안을 받기도 전에 거절했었다.
그땐 자세한 조건 같은 것도 들어보지 않았고, 들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건…… 분명한 퇴사 의지를 알린 이후의 일이기에, 그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눈앞의 이 신임 본부장은 정말 진심으로 나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주겠습니다. 사직서 수리는 어차피 왕 이사님 선에서 멈춰 있어요. 그러니 얼마든지 고민해도 됩니다.”
내가 말하면 통과되겠죠, 하는 식으로 덧붙이는데, 왕이범 이사와는 소통이 잘 되는 편인 모양이었다.
하긴, 사직서 수리도 막고 나를 설득하겠다고 나선 것이니, 그만큼 왕이범 이사도 믿고 있다는 것이리라.
게다가 저 태도와 눈빛은 어딘지 묘하게 자신감에 차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행동, 말, 눈빛 등, 모두에 자신감이 차 있다.
저 자신감의 연유는 뭘까.
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인가?
왜?
“그래도…… 뭐, 솔직히 이야기하면 팀 구성이 필요하니 너무 길게는 안 됩니다. 일주일이면 될까요?”
나를 그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포마드로 넘겨진 근사한 헤어스타일 위로 홀연히 숫자가 떠올랐다.
[63%]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그 건은 거절하고 싶습니다.”
나는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왜죠? 자리도 그렇고 권한도 줄 수 있어요. 연봉도 그만큼 더 올라갈 아주 좋은 출세의 기회인데.”
“좋은 기회라는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해서 놀랍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역시 저는 제가 생각하던 것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어려운가요?”
“아마도……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한 길, 그건 나만이 아니라 서인하 국장과도 이야기한 것이었다.
애초에 방송국을 나가, 방송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중심인데, 방송국 안에 있어서는 당연히 힘들다.
“거듭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진심을 전했다.
“흠…….”
고개를 들었을 때, 곽성찬 본부장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사실상 거절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한 표정.
나는 머리 위를 힐끔 확인한 다음에 덧붙였다.
“저를 두고 많이 생각해 주신 것 또한 거듭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도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님을 이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가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나는 나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아쉽게 됐어요. NBS 들어오면서 강대한 PD를 밑에 두고 일하는 상상을 꽤 했는데. 그게 힘들게 됐군요.”
“죄송합니다.”
“뭐, 나가서 잘해 가길 응원할게요.”
그와 악수를 했다.
살짝 힘이 실린 악수였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받아들인 것 같아서, 나는 안심하면서 조용히 문을 닫고 본부장실을 나왔다.
다른 직원들에게 인사하며 복도로 나오면서, 나의 표정은 가라앉았다.
내가 확인한 확률은 다름이 아니었다.
[‘곽성찬 본부장이 말한 대로 이행할 확률’의 확률 보기를 사용합니다.]
그의 제안, 그의 자신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63%’는 너무 낮은 확률이었다.
* * *
“팀장 제안을 받았다고.”
퇴근 후 서인하 국장을 만났다.
“예. 곽 본…… 곽성찬 본부장이 불러서 갔다가, 전략기획실에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거절했어? 연봉도 뭐도 다 올랐을 텐데. 곽 본이면 그럴 힘도 있을 테고.”
서인하 국장이 소주잔을 들고 쳐다봐서, 나도 같이 들어 올리며 대답해 주었다.
“그 제안이 오히려 충동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저한테 다 좋게 풀릴까 하는 의심도 들었고요.”
“하긴…… 네 연차에 그렇게 올라간다면 다른 팀장들이나 PD들의 반발이 심할 거야.”
“제가 대리를 달고 입봉할 때도 반발은 있었지만 그땐 서 국장님이나 정 팀장님이 잘 막아 주셨잖습니까. 곽 본부장님이 그렇게까지 해 줄지…….”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정말 내뱉는 말을 책임지는 행동으로도 이어질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AGD 앱의 확률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으니, 나로서는 좋은 제안을 거절한 후에도 소주가 그다지 쓰지 않았다.
“뭐, 그래. 나야 감사한 일이지.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은 거니까.”
“그럼요. 왜 잊겠습니까. 저 그렇게 뻔뻔한 놈 아닙니다.”
“너 강범람이잖아? 뻔뻔해서 넘치는 거 아니었어?”
“오늘 큰 거절을 하고 나온 사람에게 국장님이 이러시깁니까…….”
그가 낄낄 웃은 다음에 짐짓 어조를 바꾸었다.
“그럼 이제 슬슬 호칭부터 바꾸자. 언제까지 나 보고 국장이라고 할래?”
나는 뚝 굳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어…… 그럼 뭐라고 하면 될까요. 사장님이라고 할까요.”
이제 곧 월급 주실 분이니까 그게 제일 맞지 않을까 했는데, 그가 소름 끼친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그건…… 어휴, 그러지 말자. 그냥 형이라고 해. 선배라고 하든.”
“……형이라뇨.”
속마음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진심이 나왔다.
후딱 정리하자.
“그럼 선배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서인하 국장은 서인하 선배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 괜히 머쓱해서 빈 잔을 채워 잔을 마주쳤다.
“그럼 우리 이야기나 좀 해 볼까. 너 그만두려면 아마 한두 달은 걸릴 거야.”
“그렇게 오래 걸릴까요.”
“왕 선배님이 결재는 해 주겠지만, 회사라는 게 그래. 인수인계 생각도 해야 하고. 너 또 여기저기 지원 나가면서 벌여 놓은 일 많을 거 아냐.”
그건 그렇다. 최근엔 <달리는 도시인>에만 지원을 나가고 있지만, 그전에 나간 지원들의 애프터서비스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언더커버 싱어> 시즌2 같은 기획 진행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퇴사까지 앞날이 까마득하네.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회사라는 게 나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나도 나간 게 언젠데 아직도 연락이 와. 한동안은 계속 그렇겠지.”
“국…… 선배님은 오래 일하셨으니까 더 그러시겠네요. 후우. 그러지 않도록 인수인계 열심히 하고 나오겠습니다.”
“그래. 그사이에 곽 본도 포함해서 별일 없게 잘 정리하고.”
서인하 선배는 곽성찬 본부장에 대해서, 나와는 좀 다른 의미로 신경을 쓰는 듯했다.
아무래도 본인의 자리를 대체한 인물이기도 하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으려나.
하지만 소주잔을 비우고, 그는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좀 짜 보자. 그게 더 중요하지.”
“예. 그렇지 않아도 회사 구성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만…….”
우리는 그동안 각자 생각해 오던 계획들을 늘어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태블릿까지 꺼내서 기록하면서 진행된 회의는 결국 새벽까지 이어졌다.
“사무실은 알아보는 중이야. 내일부터 몇 군데 돌 거야.”
“저는 사무실 정해지는 대로 적당히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스튜디오들 몇 군데 접촉을 해 봤는데…….”
“다른 직원들 구성은…….”
원래는 저녁 반주를 하면서 간단히 계획을 짜자는 취지의 자리였는데, 역시 만나면 그렇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이건 이 정도로 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우리의 대화는 어느 정도 끝을 맺었다.
그나마 그동안 소통을 해서 이 정도지, 아무것도 없는 백지부터 시작했다면 이 정도 시간으로 끝날 리 없는 논의였다.
“오늘 이야기한 건 정리해서 보내줄게.”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넌 회사 일로도 바쁠 거 아냐. 노는 사람인 내가 해야지.”
곧 사장이 되실 분이 이렇게 정성으로 뛰어주시니 감동이 안 될 리가 없다.
“퇴사일 정해지면 제일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처리하고, 밖에서 보자.”
그와 소주잔을 마주치면서 자리가 끝났다.
주말이 되기 전에, 사직서가 수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회사 안팎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강 PD, 나간다며? 진짜야?”
“강 PD님 왜 나가세요? 나가서 뭐 하시려고요!”
“거짓말이죠? 저희 방송 끝까지 도와주신다고 해 놓고!”
<달리는 도시인> 팀원들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끝까지 도와준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난 미안함을 담아서 인사만 해 주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복도에서 마주치는, 로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아쉽다고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격려를 해 주었다.
소문으로 듣기 전에 내가 직접 알린 사람도 있었다.
“사실 서 국장님 그만두신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묘한 감이 왔었는데, 그게 이 일 때문이었군요.”
민준기 기자였다.
“기자로서의 감이신가요.”
“그렇다고 해야 할까요. 이 일도 하다 보니 이런 감만 좋아집니다.”
수화기를 통해 그가 한숨 비슷한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예 방송계를 떠나시는 건 아닐 거고. 저도 들은 소문이 있는데, 혹시 그건가요?”
“어떤 소문이죠?”
“서인하 국장님이 퇴사 후에, 얼마 전부터 여기저기서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하던데요.”
기자라서 그런가 소문이 빠르네.
회사 내에서도 일부만 빼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을 알고 있고.
“뭐……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정확히 정해지면 말씀드릴게요.”
“꼭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나가기 전에 한번 날짜 잡으시죠.”
“그러죠.”
민준기 기자와 그렇게 약속를 잡고서 서인하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님 움직이시는 거 기자들이 눈치챘나 봅니다]
[서인하선배: 조심해야겠네 ㅇㅇ]
어찌 될지 모르는 시장이니,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것은 좋은 판단이리라.
그런 쪽은 서인하 선배가 더 잘할 테니, 나는 내 퇴사에만 최대한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어 달 후.
나는 5년차를 앞두고…… NBS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