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제작사
서인하가 제작사를 설립할 생각을 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
계기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방송계에서 일하다 보면 으레 있는 일.
강대한이 <언더커버 싱어>을 연출하던 때, 신호현 이사가 <언더커버 싱어> 팀에 현준영을 꽂은 일이 있었다.
물론 그런 간섭을 처음 겪어 보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참 어린, 병아리라고 해도 틀릴 게 없을 강대한에게까지 그런 정치적 알력을 쏟아붓다니.
그 순간 서인하는 이골이 났다.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되면서 방송사 안의 노골적인 면모들이 더 잘 들여다보이게 된 여파였다.
그때, 본부장 제안이 왔다.
‘미디어콘텐츠개발전략기획본부…… 본부장이라.’
아직도 공석인 본부장 자리에는, 여전히 이사진 파벌 간의 파워 게임이 진행 중이었다.
누가 그 자리에 오르냐에 따라서 방송사 자체에서 힘을 들이는 장르가 달라질 테니, 어느 이사급이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자리에 왕이범 이사는 서인하를 올리고 싶어 했다.
케이블 예능으로는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NBS인 만큼, 예능 출신을 본부장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라이벌은 당연히 신호현 이사 측이었고, 그 때문에 서인하의 대답을 종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오히려 결심이 섰지.’
본부장 제안을 받는 것이, 예전 같았다면 분명 기뻤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예전 같았다면 말이다.
서인하는 그 순간, 신기하게도 기쁜 마음보단 복잡한 심정이 더 컸다.
그 숱한 파워 게임을 보고 나니 지쳤던 것이리라.
본부장이 되어 봤자 얼마나 움직일 수 있겠냐는 허무함.
뭘 해 보기도 전에 허무함부터 느낀다는 것이 우습지만, 그 허무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서인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당잠사> 시즌5가 끝난 시점에 본부장 자리를 정식으로 거절했다.
왕이범은 그다지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돌려 보려고 시도했으나, 결국은 그 선택을 받아들여 줬다.
“네가 생각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 정해지면 이야기해라.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언제든 도울 테니까.”
그때 그 말을 서인하는 잊지 않았다.
그래서 사이사이 왕이범에게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구했고, 몇 번의 만남과 대화 끝에 방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큰 아군을 얻었지.’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얻어야 했다.
제작사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을 품게 한 장본인이자, 가장 필요한 사람을.
* * *
잔을 든 손을 어쩌지도 못한 채, 나는 문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쉽게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지금 뭐라고…….”
“제작사 말이야. 독립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서 제공할 수 있는 제작사. 나랑 같이 그 제작사를 해 볼 생각 없냐고 물었어.”
언제 긴장했냐는 듯 서인하 국장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오래 생각해 왔던 일이야. 누구의 압박도 받지 않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를 만들겠단 생각.”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내 떨떠름함은 쉬이 지워지질 않았다.
“방송 하나 만드는 데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지…… 그동안 방송 만들어 본 너도 이제 모르진 않겠지.”
“예…….”
메인 PD 자리에서 <언더커버 싱어>를 만들고, <더 라이벌>은 끝낸 지금까지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 경험들이 전부 유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인하 국장의 말대로 방송 하나 만드는 데 숱한 힘이 작용한다는 것은 충분히 겪었다.
“그래, 내가 굳이 일일이 설명 안 해도 알겠지. 그 힘들이, 어느 순간부터 매우 거추장스럽더라. 예능 하나 만들 때마다 윗선 신경 쓰고, 광고 신경 쓰고, 언론 신경 써야 한다는 것들이.”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꿈꾸게 된 거야. 독립적인 회사를 만들면, 무엇을 만들든 우리 맘이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만 책임지면 되니까.”
방송국도 회사라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를 오롯이 그 장본인이 감당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성공해 놓고도 남 좋은 일로 빼앗기기도 하고, 실패해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서인하 국장은 그 모든 것들에 이골이 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방송을 만들…… 외주 제작사를 만들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맞아.”
“그렇지만…… 외주 제작사도 그렇게 쉽진 않던데요.”
힙플스튜디오를 겪어 보기 전이라면 나도 단순하게 그렇구나 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젠 현실을 안다.
우민철 PD가 회사 안에서 어떤 위치인지, 클라이언트들이 어떻게 갑질을 하는지.
만들고 나서도 대금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방송사라면 힘이라도 있어서 그런 일이 덜할지 모르는데, 외주 제작사라면 그 불합리한 일들을 올곧이 견뎌 내야 한다.
“외주 제작사로 일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아닐까요? 제가 요 몇 달 직접 겪은 일들도 많은데.”
“그래, 맞아. 외주사 입장이라면 갑질도, 불합리한 일도 더 많이 당하겠지. 하지만…… 모른 채 당하는 거랑, 알고 당하는 거랑은 다른 문제일 거야.”
“…….”
서인하 국장의 말에서 나는 묘한 것을 느꼈다.
“설마…… 외주사 입장을 직접 겪어 보라고…… 힙플이랑 일하게 하신 겁니까?”
그는 술을 꿀꺽 하고 삼키더니 담담하게 끄덕였다.
“그때 방송국 내부 인력이 모자랐던 건 맞아. 외주사와 조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되레 잘됐다고 생각했어. 강 PD 너한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험을 하게 할 수 있었으니까.”
내 예상보다 더한 경험을 하게 되긴 했지만. 그렇게 덧붙이면서 서인하 국장은 홀로 술잔을 비웠다.
“제작사를 세우기 위해서는 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난 후, 외주사의 현실을 직접 보여 줄 필요는 있겠다 싶었어. 그래야 네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봤고. 지금도 그때의 판단은 적절했다고 생각해.”
그러면서 또 한 잔. 말을 잠시 멈추고 또 한 잔. 거듭 잔을 비우는 그를 보면서도 나는 그 잔을 채울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힙플과 일을 한 데 어느 정도 서인하 국장의 계산이 있었다는 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외려 그 덕분에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 시야는 좀 더 넓어졌고, 그에 대한 감사함도 있었다. 그 모두가 내 경험치가 될 것도 확실하고.
다만.
지금 서인하 국장의 제안이 너무 급작스럽고 또 황당하다 싶을 만큼 큰 제안이었기에 나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을.
“……방송국, 나가시는 겁니까?”
“음…… 아마도? 승진을 거부한 상태니까 어차피 짧든 길든 나가게 될 테고.”
“본부장 자리 거절한 건 말씀이시군요.”
“그래. 본부장이 나타나면 아마 나도 길게 일하진 못할 거야. 회사의 나쁜 점이지.”
거기에 덧붙여 서인하 국장이 설명해 주었는데, <더 라이벌>의 성공으로 왕이범 이사의 발언권이 세져서 아마 예능 쪽 인사가 본부장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다만 내부에서는 구하기 힘들어, 스카우트 형태로 외부에서 올 예정이라 했다.
하긴, 내부에서 예능 쪽 인사라면 서인하 국장보다 높은 사람이 없는데…… 외부밖에 답이 없겠지.
만약 그렇게 되면 서인하 국장의 입지는 더 애매해질 것이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고민할 시간을 그리 길게 주지는 못할 것 같아. 그렇다고 오늘 당장 답변을 달라는 건 아냐. 너도 생각이 있을 테고, 고민은 당연히 해 봐야겠지.”
“예…….”
서인하 국장이 잔을 잡은 채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 기억해 둬. 나랑 같이 가면 힘들 순 있어도, 아무런 알력 없이 만들고 싶은 방송을 만들 수 있게 해 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
나는 차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 * *
“……PD님?”
문득 뇌리를 때리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눈을 들었다.
“예?”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전혀 반응이 없으세요.”
민준기 기자가 손가락을 놓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잠시 딴 쪽으로 뇌세포가 튀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집중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계속하시죠.”
“예. 그래서 일단 조사한 대로는 기사가 나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갑질이다, 대기업의 횡포다 하는 문제들이 많아서, 방송계의 불합리성도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획 기사가 될 것 같아요.”
민준기 기자는 내가 며칠 전 정보를 준 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인하 국장의 조언을 받아서, ‘요즘 바람처럼의 건 때문에 외주사에서 돈을 못 받고 있다더라’라는 말을 슬쩍 흘렸더니, 민준기 기자는 대번에 눈을 빛냈다.
그리고 며칠 간의 취재 끝에 나보다 더욱 자세한 사정을 알아 왔다.
“다만 제가 팀장이다 보니 제 팀원도 좀 챙겨야 해서…… 기사는 데리고 있는 팀원 녀석이 쓸 겁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누가 쓰시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나는 웃으면서 그가 사 주는 커피를 홀짝였다.
이전 안주환의 마약 관련 건으로 나는 그에게 빚이 있었다. 분명 큰 건임이 틀림없음에도 내 부탁으로 기사를 먼저 내지 않았는데, 이로써 조금이나마 그 은혜를 갚은 기분이 들었다.
“강 PD님은 참 신기한 분입니다.”
“예?”
문득 날아온 말에 나는 커피를 입에 문 채 되물었다.
내 행동이 웃긴지 그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사실 기자로 있으면…… 나쁜 기사 의뢰가 더 많이 들어오거든요. 좋은 말을 써 달라든가, 저쪽이 맘에 안 드니 까내리는 기사를 써 달라든가. 좋은 기사보다 나쁜 기사가 트래픽이나 돈이 더 되기도 해서 결국 그쪽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고요. 사실 그래서 저희가 기레기 소리를 듣게 되는 거지만.”
현직 기자가 스스로 기레기라고 하니,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나는 입을 다물고 커피만 홀짝였다.
“그런데 강 PD님은…… 지금껏 그런 적이 없으시잖습니까. 안주환 건도, 그렇게 큰 건수를 잡아 놓고 도리어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고 하셨고.”
“그건…… 그게 범죄이긴 해도 제 소관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으니까요.”
“사실 그때, 도리어 답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잘 풀리긴 했지만, 강 PD님이 얻는 게 없었으니까요. 끽해야 방송이 좀 더 수월하게 나갔다 정도잖습니까.”
“저는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가장 원하던 결과는 얻었으니, 나머지는 흘러가도록 둔 것뿐.
“그게 신기하다는 겁니다. 이제 그리 짧은 경력도 아니신데…… 아직도 그렇게 자기 길을 가신다는 게.”
“아니, 뭐…… 그렇게 거창한 건…….”
“달리 생각하자면…… 다 같은 거죠. 회사에 입사할 때의 마음가짐대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신입 말고 어디 있겠어요. 방송계든 저희 쪽이든…… 언론 쪽에도 처음부터 기레기가 되려고 입사한 사람만 있진 않겠죠.”
민준기 기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연예 기자로서 경력도 긴 만큼,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평가를 해 준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민준기 기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이었고, 나도 그 호의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대할 때 노력을 해 왔다.
그 결과라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살짝 싱숭생숭했다.
“말 나온 김에,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되십니까.”
“다음요?”
“<더 라이벌>이 성공적으로 끝나셨으니까 다음 계획이 어떠신가 하고요. <언더커버 싱어> 시즌2 하십니까? 아니면 바로 <더 라이벌> 시즌2?”
“어…….”
민준기 기자는 어느새 기자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문 세례를 내렸다.
깜빡 잘못했으면 이 자리에서 3년짜리 계획을 세울 뻔한 것을 겨우 멈추고, 웃으면서 그와 헤어졌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자리가 끝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하마터면 말 꺼낼 뻔했네…….”
그가 너무나 호의적으로 대해 줘서, 하마터면 질문을 던질 뻔했다.
“제가 콘텐츠제작사를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서인하 국장 이야기는 빼고서, 내가 제작사를 한다면 어떨 것 같냐, 연예 기자로서의 의견을 그에게 물을까 하는 마음이 잠깐 생겼다.
1초만 늦었어도 말이 헛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우…… 모르겠네, 정말.”
서인하 국장과의 술자리 이후로, <더 라이벌>의 뒷정리를 하면서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그러나 정확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서인하 국장이야 시간은 아직 충분히 있다고 했고, 본인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회사를 출퇴근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뻔뻔하진 못했다.
그래서 오늘같이, 그래도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충동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누군가의 의견을 구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인생을 가를 선택이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 누군가가 누가 될지는……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했다.
여전한 고민이 떠도는 머리를 감싸며 사무실로 향하는 그때,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AGD와 함께 100% 성공하는 삶을 쟁취하세요!]
자길 잊지 말라는 듯, 눈앞에 홀연히 메시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