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운명의 제안
“또 한 소리 하는 줄 알고 잔뜩 쫄았다니까요.”
내 말에, 고기를 굽던 우철민 PD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강 PD가 쫄았다는 건 도저히 믿기가 힘든데. 전에도 가서 들이받지 않았나?”
“들이받은 적은 없는데요……. 이사님이시잖아요, 좋은 의미로 불렀다고 해도 쫄 수밖에 없습니다.”
회식에 오기 전, 왕이범 이사의 호출을 받았다.
그것을 알려 준 것은 친절하게도 서인하 국장.
이사실에서 내려온 그는 영수증 정리를 하고 있는 내 어깨를 통통 치고는 위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 말로 다 통한다는 게 참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사실로 올라가자 왕이범 이사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카드를 내주었다.
“프로그램 만드느라 수고했네. 내가 처음에 좀 많이 고생시켰는데, 너무 맘에 두진 않았으면 좋겠어. 내 사정도 모르진 않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고는 말했다.
“앞으로도 많은 일이 있겠지만, 잘 부탁해.”
여전히 얼떨떨하게 대답을 하고선 이사실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잠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왕 이사님도 강 PD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 아니겠어?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야.”
나도 그렇게는 생각해서, 뒤늦게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왕이범 이사의 카드를 들고, 팀원들과 함께 소고기집을 온 것이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꿀 부위들을 시켜 먹음에도 그다지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이사님과 함께하기에!
……농담이고, 그만큼 고생을 했고 성과도 남겼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철민 PD는 소고기를 잘 굽는 특기가 있어서, 열심히 고기를 구워 주변에 나눠 주었다.
“강 PD님, 한잔 받으시죠.”
“그동안 참 고생하셨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저희 이대로 끝 아니죠?”
나는 팀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술을 받았다.
준혁이 형님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술이 좀 나뉘었을 것 같은데, 영화 제작이 시작되어 그쪽이 바빠진 탓에 오늘은 정말 순수하게 나와 힙플 팀원들만의 회식이었다.
“그럼요, <더 라이벌> 다음 시즌 만들어지면 또 같이해야죠.”
“어? 다음 시즌 만들어?”
“확정 난 거예요?”
“오더 받은 건 아니고요. 다만 머릿속에는 있습니다. 준혁이 형님과 또 이야기해 봐야죠. 만약 성사되면 그때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와아! 꼭 됐음 좋겠다!”
그렇게 오가는 술잔 속에 회식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배도 적당히 차고, 술기운도 좀 오르고, 이제 각자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맞은편의 우철민 PD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어, 사장님이시네.”
잠깐 전화 좀 받고 오겠다는 제스처를 하고 일어선 그가 잠시 후에 조금 경직된 얼굴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기, 강 PD. 회식 분위기에 이런 질문 하긴 좀 미안한데…….”
“예, 말씀하세요.”
“그…… 돈은 언제 들어올까?”
돈이란, 제작비를 말함일 것이다.
제작이 전부 종료되었으니, 외주 제작사인 힙플스튜디오에 계약대로 대금이 지불되어야 하는데, 그 시점은 계약서에도 명시가 되어 있었다.
“결재는 오늘 전부 올리고 왔으니까, 다음 달에 들어갈 겁니다. 왜요? 돈이 급하시대요?”
힙플스튜디오가 외주 제작사 중에서는 견실한 편이라고 서인하 국장에게 들었다.
견실하다는 건 자금적인 면도 포함된 이야기일 텐데.
“음…… 아니, 그렇진 않을 텐데. 한번 체크해 보라고 하셔서 말이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요?”
“우리 말고, 그…… <무비 메이커> 제작사 쪽에 문제가 있나 봐.”
한번 확인해 보겠다고 또다시 일어난 그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10분 정도가 걸렸다.
“거참.”
앉자마자 한숨을 짓고 소주를 따르길래, 나도 덩달아 잔을 들었다.
“뭐래요?”
“이번 일 때문에…… 거기서 아직 돈을 제대로 못 받았나 봐.”
<무비 메이커>의 제작 책임사는 영화사 바람처럼이지만, 실질적인 제작은 외주사에 맡겼다.
간간이 우철민 PD를 통해서 소식을 들은 그 외주사에도, 이번 제작 중지 건이 영향을 미쳤다.
기사에서는 영화사다, 투자사다 하는, 큰돈이 오간 쪽 위주로 다뤘기에 외주사가 언급된 것은 한 건도 없었다.
언론의 맹점이라면 맹점이고, 사각지대에 있는 것이다.
그 탓에, 그 외주사는 현재 제작 중지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아직도 대금 지급을 확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바람처럼 입장에서도 영화 제작이 멈추고, 투자사들 달래느라 정신은 없겠지.
하지만 외주사 같은 곳은, 대금 지급이 밀리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인 곳도 더러 있었다.
지금이 딱 운 나쁘게도 그런 경우고.
“지금 바람처럼과 싸우고는 있긴 한데, 사실 그쪽이 더 큰 회사이기도 하고 또 정신이 없기도 하니, 대금 지급이 그래서 언제 될지 알 수 없다는군.”
“국 사장님은 그래서 우리 NBS도 확인해 보라고 한 거군요.”
“미안해. 기분 좋은 회식에 이런 이야기해서.”
“아닙니다. 다음 달엔 들어갈 텐데, 정확한 날짜는 저도 한번 확인해 볼게요.”
국성재 사장이 우철민 PD를 들들 볶을 수도 있는 상황은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약속하고, 정민우 팀장에게 확인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우철민 PD의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음…… 아니 좀,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쪽이랑은 친하다 보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네.”
그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혼자 술을 마셔서, 나는 서둘러 잔을 마주쳤다.
인상만큼이나 사람 좋은 그는 진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외주 제작사가 이렇게 돈을 못 받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거든. 외주사 자체로 힘이 있거나 하면 모르겠지만…… 일 받아서 하는 처지인 건 똑같으니까, 괜히 맘이 쓰이고 그렇네.”
나중에 만나서 술 한잔이나 해야겠다면서 따라 주는 잔을 받고, 나도 대꾸했다.
“자리 잡히면 저도 불러 주십시오.”
“강 PD도? 아니 뭐, 강 PD랑은 사실 상관없는 문제잖아.”
“우 PD님이 그렇게 맘을 쓰시는데, 저도 알아두면 서로 좋지 않을까요.”
나는 웃으면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하긴…… 소개한다면 거기도 거절은 안 하겠지. 알았어, 약속 잡으면 말해 줄게.”
“꼭입니다.”
우철민 PD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가 조금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 * *
회식 1차.
소고기집에서 두 시간이나 있었던 데다 와인도 몇 명 시켰더니 꽤 후덜덜한 금액이 나왔다.
“진짜 괜찮겠어, 강 PD?”
“……그럼요! 저희 왕 이사님, 그렇게 쪼잔한 분 아닙니다.”
“강 PD님, 입꼬리가 떨리는데요.”
그 태클을 무시해 주고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다.
그 직후, 전화가 걸려와서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서인하국장』
뭐지? 이 카드 결제가 서인하 국장에게 문자 들어가는 건가?
양해를 구하고,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예. 국장님.”
“빨리 받네. 회식 중이야?”
“방금 끝났습니다. 2차는 그냥 제 카드 쓰겠습니다.”
“응? 왕 이사님이 카드 줬잖아? 맘껏 쓰라고 준 거니까 그냥 2차도 그걸로 내.”
1차에서 많이 긁었다고 혼내려고 한 전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이사님이 왜 카드를 줬겠어. 눈치 볼 필요 없으니까, 다들 고생한 사람들인 만큼 시원하게 긁어. 영수증은 내가 갖다 줄 테니까.”
영수증을 직접 제출해 주시다니. 은인이다. 이분은 정말 평생의 은인이야.
“그럼 맘 놓고 먹겠습니다.”
“그래그래.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고, 대금 결제 언제 되냐고 정 팀장한테 물어봤다며?”
그 이야기를 듣고 굳이 전화를 준 모양이었다.
지급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어서 나는 그것을 곧장 우철민 PD에게 전했다.
우철민 PD가 국성재 사장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사이, 서인하 국장이 다시 물었다.
“일산이지?”
“예. 장항동 쪽에 있습니다.”
“나도 일산에서 미팅이 곧 끝날 것 같은데, 2차 언제 끝나?”
응? 온다고?
“저번에 내가 한 이야기 잊지 않았지? 방송 다 끝나면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 거.”
“어……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2차 끝날 즈음에 연락해.”
그가 전화를 끊었다. 뭐지, 갑자기…… 싶긴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식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테니.
“뭐해, 2차 안 가?”
“강 PD님 빼시는 거 아니죠?”
내 통화가 끝난 것을 알고 우철민 PD가 장난스레 물었다. 다른 팀원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당당하게 왕이범 이사의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카드, 맘껏 긁어도 된다고 합니다!”
“와아아! 왕 이사님 사랑해요!”
“한 번도 못 뵈었지만 오늘도 존경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팀원들을 이끌고 나는 2차 자리로 향했다.
그렇다고 2차가 길어지지는 않았다.
오늘이 금요일이면 모를까,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의 숙명을 다들 받아들이고 있어서 10시가 넘어가자 슬슬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나도 오늘은 안 취하고 들어가야지.”
집에서 아내가 기다린다는 우철민 PD도 정리하려는 분위기라서, 나는 마지막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이들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잔을 채우고 들었다.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말 이것저것 고생시켜서 죄송합니다. 제 개인도 많이 성장한 시간이었고, 많은 것을 알고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오늘이 끝이 아니니, 또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건배!”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 건배와 함께 <더 라이벌> 팀이 마무리되었다.
왕이범 이사의 카드로 다시 결제하고, 소중히 영수증을 갈무리하고 밖으로 나와, 아쉬워하는 팀원들과 악수를 하고 자리를 파했다.
그러고 도로 쪽으로 돌아서자 서인하 국장이 서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정말 근처에 있었거든.”
미팅이 끝난 모습으로, 서인하 국장은 여느 때보다 단정한 코트와 서류 가방 차림이었다.
“춥다. 어디 갈래?”
“저는 충분히 배가 차서요. 편하신 곳으로 가시죠.”
아직 추운 3월의 밤이라서 우리는 따끈한 전골집으로 들어갔다.
전골을 시키고 술도 적당히 나누면서, 나는 회식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바람처럼한테 아직 돈을 못 받았단 말이지.”
“예. 아마 투자사들 해결이 나야, 그다음에나 대금이 지급될 것 같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바람처럼 입장에서야…… 일단 투자사들 쪽이 더 바쁠 테니까.”
“예.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마음에 계속 걸려서요.”
내가 한 일 때문에 그 외주사가 피해를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그것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서인하 국장이 소주를 털어 넣고는 피식 웃었다.
“많이 컸구나, 강 PD. 다른 외주사도 신경 쓸 줄 알고.”
“……죄송합니다. 그냥…… 차라리 제가 그 외주사였다면 그런 일을 당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계속 맘이 쓰입니다. 건방진 생각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만…….”
“그래, 건방진 생각이야. 그 외주사가 직접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 일은 그들 일이고, 네가 신경 쓸 일은 결코 아니지. 이런 걸 보통 오지랖이라고 하지.”
푹 하고 가슴을 찌르는 단어. 오지랖.
그래, 오지랖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알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작게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내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일 뿐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고 싶진 않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직접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건 어떨까요…….”
사실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방법론에 대한 확인이었다.
지금껏 외주사에 관한 기사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민준기 기자에게 부탁하여 거기에 대한 기사를 올리면, 조금이라도 그들의 발언에 힘이 실리지 않을까.
“……나쁘진 않네. 딱 그 정도 선이 네가 할 수 있고,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일 거야.”
서인하 국장은 금방 긍정해 주었다. AGD 앱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믿음이 생겼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당장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래. 정식 업무는 아니니까 보고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래도 필요하면 말해. 조언은 해 줄 테니까.”
이런 든든한 상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일 할 일 목록에 올려 두는 사이.
서인하 국장은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잔을 비웠다.
안주로 나온 전골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미팅이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하지만, 그의 빈 잔을 다시 채우면서 살피자…….
긴장하고 있는 거 같은데……?
서인하 국장이 내 앞에서, 나한테 긴장할 일이 있나?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같이 잔을 비우고, 전골 좀 드시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저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전에 그러셨죠. 그 일 때문에 오늘 보자고 하신 걸까요?”
“……어, 그래. 맞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그의 자세는 정말로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목이 탄다는 듯 술이 아니라 생수를 따라 마시더니, 깊은 한숨까지 내쉰 뒤에야 다시 나를 보았다.
“내가 오래 생각해 오던…… 그래, 작년부터 고민해 오던 계획이 있어.”
“예.”
긴장한 얼굴로도 똑바로 나를 보면서 내뱉는 서인하 국장의 말은, 저녁 내내 회식의 여파로 쌓인 술기운을 단번에 날리는 제안이었다.
“강 PD, 나랑 같이 제작사 차려 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