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수해랑
[류준혁선배님: 내일 보자]
박지운은 재차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약속한 일식집 앞까지 오긴 왔지만…… 선뜻 발을 들일 수 없는 것은, 지은 죄를 알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까지 이어진 액션 스쿨 촬영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
다른 배우들은 매니저가 있어서 촬영장까지 함께 오가지만, 박지운은 현재 에이전시 자체가 없다.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하고, 출퇴근도 마찬가지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지운 씨.”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는 스태프와 인사를 나눈 뒤에, 마스크를 끼면서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박지운은 현재 관악에 살고 있다.
촬영지인 파주에서부터 관악까지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두 시간 가까이 가야 한다.
그만큼 누구보다 일찍 촬영장을 나서려고 한 것인데,
“태워 줄까, 형?”
그보다 빨리 준비를 끝내고 차를 몰고 나온 이가 있었다.
백종현이었다.
매니저가 몰고 있는 차 조수석에 앉은 그는, 창문을 내린 채 물었다. 박지운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 대꾸했다.
“너 강남으로 가잖아.”
“어차피 올림픽대로 탈 거니까. 당산쯤에 내려 줄게.”
백종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괜찮죠?”
그 물음에 매니저도 슬쩍 고개를 끄덕이면서 박지운을 쳐다봤다.
평소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였다곤 해도 오늘 백종현의 어깨를 걷어찬 죄도 있어서 쉽게 거절하지는 못했다.
“……알았어. 고마워.”
결국 박지운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는 금세 파주를 빠져나와 자유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매니저와 오늘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백종현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형 액션 잘하더라. 혹시 전에 좀 배웠어?”
“아니…… 딱히.”
“춤춘 게 역시 효과가 있나. 난 영 몸으로 하는 건 젬병이라 그건 좀 부럽더라.”
‘좀’이라고 붙는 단어에 박지운은 자신이 왜 움찔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백종현은 언제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이야기 같은데.
민감해지려는 스스로를 무시하고, 박지운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 내가 좀 더 빨리 멈췄어야 하는데. 어깨 괜찮아?”
“어깨? 조금 뻐근하긴 한데 걱정 마. 약도 발랐고. 내일이면 낫겠지 뭐.”
백종현이 어깨를 과장되게 돌리다가, 아아…… 신음을 흘리며 도로 내렸다.
매니저가 조심하라고 타박하는 와중에, 박지운은 기분이 침전되는 것을 느꼈다.
괜히 탔다. 혼자 갈걸.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백미러를 슬쩍 보면서 그런 박지운의 얼굴을 살핀 백종현이 물어왔다.
“형 내일 스케줄 있어?”
“……없는데.”
“그럼 술 한잔 할래?”
돌아보면서 싱긋이 웃어 보이는 백종현을 보고서, 박지운은 이번에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대로 차를 얻어타고 강남까지 가, 매니저를 먼저 보내고 둘은 백종현이 자주 간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작은 가게의 사장은, 정말로 단골인지 금방 백종현을 알아봤다.
그가 내어주는 간단한 안주를 먹으며, 맥주를 몇 모금 마시는 동안 박지운은 백종현의 대화를 맞장구치는 정도였다.
왜 이리 기분이 가라앉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형.”
그리고 백종현도 낮게 그에게 물었다.
“나 싫어하지?”
“…….”
너무나 돌직구인 물음에 박지운이 잔을 붙잡은 채 얼어붙었다. 겨우 고개를 들어 백종현을 보자, 그는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왠지 그런 것 같아서. 나, 이래 봬도 딴 사람이 나한테 가지는 적대감 같은 거, 그런 걸 잘 캐치하거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박지운은 도리어 화가 났다.
자신을 싫어하냐고 물으면서 저렇게 웃는다는 건, 네가 싫어하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 이 말인가.
“그렇다면? 어쩔 건데?”
박지운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원래도 표정이 적고, 무뚝뚝한 편인 박지운이다.
그런 그가 차가운 얼굴을 하자 되레 진심이 그득 담겼다.
그러나 백종현의 얼굴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쩌고 뭐고 할 거 있어? 싫든 말든 이번 방송 끝날 때까지는 봐야 할 텐데. 그냥 티만 좀 덜 냈으면 좋겠다 싶어서.”
티를 덜 내라니. 내가 티를 냈단 말인가? 백종현을 싫어하는 티를?
박지운에게 그런 자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누명을 쓴 듯한 기분이 들어, 기어이 화가 났다.
그것을 참지 못했다.
벌떡 일어나 소리치듯 이야기하고, 백종현은 그것을 웃는 얼굴로 받아치고.
작은 가게라도 해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옆 테이블의 사람들은 둘을 알아보지는 못해서 수군거리기만 했고, 곧 사장이 나와서 두 사람의 언쟁을 말렸다.
하지만.
통유리 밖에서 지나가던 시민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그 광경을 찍어 올렸다.
금세 백종현의 소속사 측에서 손을 써 내려가긴 했지만, 하루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원치 않은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을 제작진이 모를 리 없었고, 류준혁도 마찬가지였다.
류준혁은 <당잠사> 촬영 중임에도 그 소식을 듣고 박지운에게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오늘 서울로 돌아온다고, 돌아오자마자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그것이 이곳, 그가 자주 간다는 일식집인 ‘수해랑’이었다.
박지운은 수해랑 앞에서 몇 분을 더 망설였다.
하늘 같은 선배이자 존경하는 배우인 류준혁과의 약속시간을 어길 순 없어서 일찍 도착했지만, 도리어 그 시간만큼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피할 순 없어서, 결국 수해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어서 오세요. 일행 있으신가요?”
“어…… 류준혁 배우님을 뵈러…….”
“아.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류준혁이 있다는 룸의 문을 열었다.
“……!”
그곳에서 박지운은, 류준혁 이외의 사람을 발견했다.
“왔어? 들어와 앉아.”
“……네.”
뭐라고 반응도 하지 못하고, 박지운은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하고 들어갔다.
빈자리에 앉아 옆에 앉은 이를 힐끔했다.
“나도 형 올 줄 몰랐어.”
백종현이었다.
어제 그렇게 언쟁을 벌이고, 다음 날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기에 박지운은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그러나 백종현은 여전히 빙긋이 미소 지은 얼굴.
다시 한번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지만, 류준혁 앞이라 표현하진 못했다.
“일단 음식은 적당히 시켜 놨어. 술 필요해?”
“……아닙니다.”
술을 마시면 정말 조절이 안 될 것 같아서 박지운은 사양했다. 류준혁과 백종현 앞에 술이 없기도 했고.
“그래. 그럼 밥이나 먹자.”
류준혁이 주문한 요리들이 나오고, 박지운은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아직 그렇게 사정이 여의치 못한 박지운으로서는 쉽게 먹지 못하는 음식들.
하지만 옆자리의 백종현은 매번 나오는 요리마다 어디보다 맛있다, 그 가게와는 이게 다르다 등등 평을 남겼다.
“튀김 정말 잘하네요. 여기 단골 될 것 같아요.”
“음식 잘해, 여기. 다음에 오면 더 잘해 줄 거야.”
류준혁도 그것을 받아 주고 대화를 이어 나가자, 박지운은 서서히 자신이 소외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난 왜 이 자리에 와 있는 거지. 뭐 때문에 불려온 거지?’
그런 어두운 감정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음식의 맛도 느끼지 못하겠고, 차라리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
그때, 류준혁이 입을 열었다.
“지운아. 너 오기 전에 종현이랑 잠깐 이야기를 나눴어.”
“……예.”
갑작스런 시작에 박지운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겨우 대답했다. 불려온 것은 당연히 어제 일 때문이다. 백종현과 싸운 일을, 아마도 선배이자 프로그램 제작자 입장에서 혼내려는 거겠지.
“종현이에게도 말했지만, 혼내려고 불러낸 거 아니야.”
“……네?”
뜻밖의 말이라 박지운이 고개를 들었다. 류준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쳐다보네. 뭘 그렇게 죄를 지었다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어? 너 잘못한 거 없으니까 고개 들어.”
“…….”
“아, 물론 아예 없진 않지. 어쨌든 연예인이 사람들 있는 곳에서 소란을 피운 건 맞으니까. 그건 앞으로도 조심하자. 둘 다.”
백종현이 순순히 대답하고, 박지운도 뒤따라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박지운의 머리가 혼란해지고 있었다. 혼내는 게 아니라면 왜……?
“너희 둘은 성향이 달라. 그건 제작진 전부가 알고 있던 바야. 성격도 다르고 연기 스타일도 다르고. 이렇게 앉혀 놓고 봐도 생김새부터 다 다르지. 그래서 서로 다투고, 언쟁이 나고, 그런 건 전혀 상관없어.”
류준혁은 여유롭게 말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히려 그렇게 경쟁하고 서로를 의식하는 것이 방송에는 더욱 도움이 될 거야. 뭐, 주먹질한 것도 아니잖아? 아니면 영상 안 찍힌 데에서 주먹질했어?”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 부분은 둘 다 단언할 수 있었다. 영상이 찍혔다는 것을 알고, 박지운이 먼저 가게를 나왔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배우 간에, 성격이든 의견이든 맞지 않아서 싸울 수 있어. 그러니까 그걸 혼내려는 게 아니야. 다만 하고 싶은 말은 해 둘게.”
여전히 부드럽지만, 류준혁의 말은 단호했다. 그 태도의 변화를 백종현과 박지운, 둘 다 매우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싸우더라도, 경쟁하더라도, 너희 둘은 같은 배를 탄 동료야. 최소한 방송 제작까지, 어쩌면 영화 제작까지. 그것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
“배우는 평생 배우는 직업이고, 너희는 아직 여러 가지를 배우기 시작한 시점이야.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뭔가를 하나 배우겠지. 그게 반복되는 한, 너희는 같은 배우이자 동료야.”
“…….”
“꼰대 같지만, 그 말 해 주려고 너희 둘을 같이 부른 거야.”
따로 두고 하는 말이 아닌, 서로를 두고 함께 하는 말.
그 사실에서 박지운은 느꼈다. 류준혁이 둘을 위해서 진심으로 충고를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성격이 안 맞든 뭐가 안 맞든, 둘은 동료다.
그것은…… 마치 배우 인생 전체를 두고 해 주는 말 같았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박지운은 혼란하기도 하고, 동시에 차분하기도 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류준혁의 말이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는 감각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이 기분이 류준혁에게 전해질까. 그것을 고민하는데, 백종현이 그를 쳐다보았다.
“형. 미안해.”
“어?”
“내가 형을 좀 질투했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박지운은 뒤늦게 이해했다. 질투? 백종현이 나를 질투했다고?
“형은…… 몸 움직이는 건 뭐든 잘하잖아.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봐도 나보다 잘할 때가 많고. 그래서 괜히 형 신경을 긁으려고 이야기할 때가 있었어. 그래선 안 되는데. 내가 노력했어야 하는데, 난 노력을…… 잘 못 하거든.”
백종현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항상 그린 듯 떠 있던 미소가 없고, 진지하게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지적을 받아도 계속 노력을 안 멈추는 형이 부러웠어. 그래서 어제도…… 일부러 형을 도발했던 거야.”
그가 시선을 들어 박지운을 보았다.
“미안해, 형. 그래도 형 싫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뭐랄까…… 응, 부러운 거지. 결국 질투고.”
박지운도 그제야 깨달았다. 매번 백종현이 신경에 거슬리고, 반감이 들었던 이유를.
“……나도야.”
“응?”
“나도…… 나와 다른 네가 부러웠어. 넌 뭐든…… 곧잘 해내니까. 난 연기 지적도 많고, 매번 더 고생해야 하는데, 넌 금방 해내니까.”
“헐. 그건 내가 형한테 생각하는 건데.”
백종현이 장난스레 받아쳐서, 박지운이 쓰게 웃었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고 질투를 했던 것이다.
박지운은 말하면서 그것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동시에, 류준혁이 왜 이 자리에 둘을 불러냈는지도 알았다.
“선배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응? 뭐, 안다고 하면 뻥이겠지? 하지만 신인 때야 뭐 다들 그런 거 아닐까. 나보다 더 잘해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나도 그랬으니까.”
류준혁은 피식 웃고서 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게 다 밑거름이 되는 거야. 두 사람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알아서 깨달아 줬으니 더 할 말이 없네.”
백종현과 박지운이 눈빛을 마주쳤다.
몇 달을 얼굴을 마주쳤던 관계인데, 왠지 모르게 처음 보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미안했다, 종현아.”
“아냐, 형. 내가 미안했지.”
악수를 나누진 않았지만, 박지운과 백종현 둘 다 처음으로 솔직해진 장면이었다.
그것을 훈훈하게 선배의 눈길로 보던 류준혁이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참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 너희 오늘 나랑 술 한잔 해야겠다.”
<당잠사> 촬영 종료를 한 그날, 류준혁은 두 명의 친한 후배가 생겼고, 셋은 밤이 깊을 때까지 술잔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