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한 방이 필요한 때
“<강철 사제>가 통합 시청률 6%를 넘으면서, 현재 좋은 상승세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최종화쯤에는 무난하게 10% 이상을 넘볼 수 있지 않을까 제작진 측에서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보고자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은 신호현 이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딱히 어느 누구를 향한 게 아닌 시선을 장내에 던지고서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금토 드라마는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고 봐도 되겠어. 그렇지 않나?”
“그럼요, 맞습니다.”
“최근 드라마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입니다.”
이사들 중 친 신호현 라인을 타고 있는 이사들이 저마다 소리를 높인다.
“제작 스튜디오가 어디였지?”
“<강철 사제> 말씀이시죠? ‘와이번스튜디오’라는 곳입니다.”
“아, 맞아. 거기. 사장 마인드가 참 맘에 들더군.”
신호현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사회의 가장 상석.
대표이사석에는 이사진의 총수이자 NBS 방송사를 이끌고 있는 고덕재였다.
이사회에서는 보통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그에게, 신호현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계속 ‘와이번스튜디오’ 측이랑 계속 좋게 가져가도 될 것 같은데.”
“뭐, 좋아 보이는군.”
고덕재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밍숭맹숭한 태도인 그에게 있어 꽤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신호현은 알고 있었다.
“그럼 제가 한번 나서서 자리를 또 만들어 보죠. 앞으로 더 클 스튜디오인 것 같으니 일찌감치…….”
“조금 빠른 판단 아닐까요.”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 왕이범 이사였다.
고덕재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신호현의 눈빛이 아주 살짝 낮아졌다.
“무슨 말인가, 왕 이사.”
“‘와이번스튜디오’가 이번에는 좋은 드라마를 만들긴 했으나, 작년에는 세 개의 드라마 기획에 실패했습니다. 이번 작에 저희가 투자한 만큼 괜찮게 돌아와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판단은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왕이범은 어디까지나 건조한 어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다른 이사들이 수군대는 사이, 신호현이 가라앉은 눈으로 왕이범을 쳐다보았다.
그 안에 든 감정은 참으로 읽기 힘들었으나, 왕이범은 모른 척 고덕재를 다시 보았다.
“물론 묘안이 있으시겠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음, 아니야. 왕 이사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아직 드라마가 끝이 난 건 아니니.”
고덕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에 신호현을 다시 보았다. 그의 시선이 돌아오자, 신호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 스튜디오에, 나도 즐겨 보고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고 전달해 주게.”
“알겠습니다. 와이번에서도 아주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보고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다시 이어졌다.
변함없는 자세로 보고를 들으며, 왕이범은 책상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하마터면 보는 앞에서 털릴 뻔했군.’
신호현의 교묘한 언행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전 고덕재 사장과의 흐름을 깨지 않았다면, 아마 금토 밤 시간대를 그대로 드라마국에 뺏겼으리라.
NBS라는 방송사 자체만 생각하자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왕이범도 최근 타사에서 방송 시간대에 변화를 주고 여러모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런 변화에 NBS는 언제나 발맞춰서 왔고, 이번에도 그러한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황금 시간대라 할 수 있는 금토의 밤을 드라마국에 내준 것은 사실상 뼈가 아팠다.
왕이범이 총괄하는 NBS의 굵직한 예능들이 항상 포진해 왔던 시간대를 뺏긴다는 것은, 같은 회사 내의 일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엔 힘든 일이었다.
자존감이 깎이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
<당잠사>의 새 시즌도 당장은 방영할 수 없었고, 다른 대표 예능들도 제작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랬다.
‘<강철 사제>가 끝나기 전까지만 어떻게든…….’
왕이범은 어두운 조명을 틈타 신호현 쪽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그는 프레젠테이션을 들으면서 사이사이 고덕재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고덕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연속된 스튜디오 영입의 성공으로 프로그램 제작이 원활해지면서 신호현은 그만큼 파워를 얻고 있었다.
그가 관여는 드라마들이 연속해서 성공하고, 큼직한 스튜디오 투자, 인수가 또 몇 번 더 성공하면 그 파워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 이상으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한동안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오늘은 예능국 쪽의 보고가 없었고, 고덕재의 외부 스케줄로 인해 자리는 빨리 끝났다.
“다음에는 왕 이사의 보고도 듣고 싶군.”
고덕재가 문을 나서기 전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을 던졌다.
왕이범은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선, 마른 입안을 느꼈다.
한 방이, 대책이 필요한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이상입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종현이 준비한 연기가 끝났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방긋 띠며 그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제작진 전체가 멍하게 보았다.
“……아, 그래. 고생하셨습니다. 가 보셔도 됩니다.”
내가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내 말에 백종현이 한차례 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연출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금완승 감독이 의자에 푹 주저앉았다.
“허 참. 저런 놈이란 말이지? 생각도 못했는걸.”
그의 어조는 진심이었다.
“제대로 연기하는 건 처음 봤는데…… 저런 연기도 할 줄 아네요.”
준혁이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둘러보니 카메라 감독들도 수군대고 있었다.
힙플 스튜디오의 카메라 감독들은 뒤쪽에 배치되어 있고,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은 우이독경 소속의 감독들이었다.
총 3대의 카메라를 금완승 감독은 준비해 왔는데, 그들 각각의 모니터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이거 봐, 이거. 액션 하자마자 표정이 사라지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그러고 나서는 컷, 하자마자 또 본래대로 돌아오고.”
백종현이 준비해 온 연기는 살인마와 국정원 요원 간의 대결을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잔혹한 19금 수위로도 유명한 작품이었는데, 주연인 두 배우의 연기로도 매우 화제가 되었었다.
살인마를 연기한 배우는 그 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한동안 칩거를 했다고 할 정도로 연기를 몰입했었는데, 백종현은 그 살인마 연기를 정말 자기 식으로 섬뜩하게 풀어냈다.
“눈썹 꿈틀거리던 것 봤나? 디테일하게 안면 근육 하나하나를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 거기다 카메라 3대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서, 시선 처리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금완승 감독이 철저하게 감독적인 시선에 평가한 다음에 나를 보았다.
“쟤가 지금까지 무슨 역을 했다고?”
“주로…… 주연 커플 옆에 있는 조연을 맡았죠. 여주를 좋아하거나, 다른 여조를 좋아하거나.”
“감독들이 눈에 삐었구만. 저런 인재를 가지고 그딴 장난감 같은 연기를 시켰단 말이지.”
금완승 감독은 헛웃음을 터뜨리고서는 연기를 리와인드해 다시 돌려보았다.
“얘는 무조건 확정이야. 지금 내 감을 이야기해 줄까? 내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 녀석은 조만간 톱으로 뜰 거야.”
작품에 들이는 공만큼 연기에도 까다롭다고 알려진 금완승 감독의 절찬을,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우철민 PD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낮게 물었다.
“적당히 잘라야 할 것 같지?”
“그러게요. 앞의 배우들 평과는 너무 달라서, 멘트 조절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정성을 해치지 않을 만큼. 과한 표현의 평가를 자르는 선을 지켜야 할 것 같다.
이 정도면…… 금완승 감독의 발언만으로 논란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발언이면 지금 캐스팅이 끝나도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많이 맘에 드시는가 보네요.”
“응? 류 배우는 아니야?”
“아뇨, 저도 맘에는 듭니다만, 그게…….”
준혁이 형님이 뭐라고 이야기를 주저하는데, 금완승 감독이 아 하고 끼어들었다.
“라이벌 역에 안 맞을 것 같다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나도 ‘내 영화가 아니라도’라고 전제를 다는 거야.”
흥분한 것 같았는데, 그런 판단은 명확하게 하고 있었다.
“저건 뭐랄까. 감으로 연기하고 있는 거거든. 내 대본을 주기 전까진 어떻게 나올지 장담도 할 수 없어. 천재형이라고 할까, 불확실하다고 할까.”
“분석하고 공부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만들어지는 연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거. 그러니까 더 지켜봐야지, 내 영화에 맞을지는.”
두 연기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안심했다. 머릿속으로 편집점들이 떠올라서, 우철민 PD를 다시 손짓으로 불렀다.
“음성 확실히 땄는지 확인해 주시고,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오케이.”
그가 조용히 물러난 뒤, 다시 카메라 테스트가 이어졌다.
백종현이 15번이었고, 나머지가 다섯 명.
“좋은 연기를 봤더니 힘이 나네. 다시 가 보자고.”
그가 어깨를 붕붕 돌리면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백종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소 지쳐 보였는데, 되레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도 결국 뒤로 갈수록 예전으로 돌아갔다.
하루 내내 이어지고 있는 카메라 테스트이니, 아무리 그라도 쉽진 않은 것이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연기 평가를 하고, 그러기를 반복한 뒤.
드디어 마지막 20번째 차례가 왔다.
“박지운입니다.”
난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준혁이 형님이 슬쩍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운이라……. 아이돌 출신이네?”
금완승 감독이 프로필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사실 오늘 카메라 테스트 이전에, 2, 3차의 기록 영상을 모두 넘긴 후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프로필을 보는 것은, 금완승 감독의 기억 확인에 가까웠다.
“얘가 그, 아이돌이었는데 사장이 돈 들고 날아서 배우로 전향했다는 걔지?”
“예. 원래 목표는 배우였다고 합니다. 연기 심사 때도 기본기는 튼튼했습니다.”
“음, 맞아. 그랬지.”
금완승 감독이 턱 밑을 슥슥 긁더니 나한테 눈짓을 했다.
내 신호를 받은 박지운이 카메라 앞에 섰다.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가, 중앙 카메라 바로 옆의 금완승 감독을 보고는 눈이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누구처럼 다가와 인사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성실하게 숨을 고르면서 신호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프로필을 한 번 더 넘겨본 뒤, 금완승 감독이 확성기를 들었다.
“좋아. 한번 연기를 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한 듯 한차례 숨을 몰아쉰 뒤, 박지운이 뒤를 돌아섰다.
그리고 액션, 이라는 금완승 감독의 신호와 함께 돌아서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
“데이터를 내놔라.”
“호오…….”
박지운의 연기 시작과 함께 금완승 감독이 묘한 소리를 흘렸다.
권총은 정확하게 중앙 카메라를 향해 있었다. 카메라를 상대역으로 잡은 듯, 박지운은 진중한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가 준비한 연기는, 중요 데이터를 훔쳐 간 테러범을 쫓아온 수사관이었다.
권총을 들고 위협을 하는 연기 후에는 공간을 활용해 구르고 움직이면서 몸을 은폐, 엄폐하고 총을 겨누는 연기, 그리고 추격하는 연기, 그다음은 울분을 쏟아내는 장면까지.
홀로 한 연기임에도 어떤 구성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상대 배역이 없음에도 그 시나리오가 정확히 전달되었다.
약 5분간의 연기가 3대의 카메라가 바라보는 중에 쏟아졌다.
대사가 모두 끝난 듯 헉헉대는 모습을 확인한 금완승 감독이 확성기를 들어 올렸다.
“컷! 고생했습니다.”
“……헉헉. 감사합니다.”
주저앉은 자세였던 박지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은색 일색의 정작은 연기 전에는 정갈했으나, 격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지금은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박지운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헉헉대면서 금완승 감독을 똑바로 보았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경호원 같은 모습이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묵묵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그가 카메라 앞을 떠났다.
“쟤가 아이돌 출신이라고?”
박지운이 사라진 뒤, 금완승 감독이 확인하듯 물어왔다.
“맞습니다. 몇 개 영상을 찾아봤는데 춤과 노래도 곧잘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가. 몸을 움직일 줄 알아. 카메라 테스트에서 액션 연기를 준비해 오는 경우는 잘 없는데, 의외성도 찌를 줄 알고.”
“거기다 착실하게 정장을 입고 온 것을 보니, 자신이 맡게 될 역에 대한 어느 정도 연구도 한 것 같습니다.”
“아이돌 출신이라고 해서 사실 그리 기대는 안 했는데……. 지난 연기 심사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진지하게 준비하는 자세가 있군.”
금완승 감독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중에, 내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박지운의 연기가 맘에 드셨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응? 아니, 그건 아니고.”
칭찬을 하는 듯하더니, 또 대번에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쁘다는 건 아닌데, 특색 있는 것도 아니야. 액션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져서 발음이 뭉개지는 것도 있고. 발성은 나쁘지 않은데, 표정이 좀 단조롭기도 하고.”
“음…… 그럼 안 좋으신 거군요.”
“근데 착실하게 연구해 온 것이 보이니까 그건 또 기특하잖우.”
어쩌자는 거지, 이 감독은.
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준혁이 형님을 보았다.
내 표정에 새침한 미소를 짓더니, 그도 이야기를 덧붙였다.
“연기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보여서 좋은데, 사실 기본기가 아주 탄탄하게 잡혀 있진 않아. 소속사 문제나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거 자체는 현재로선 단점이겠지.”
박지운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신인 배우들이니만큼, 또 마음이 쓰이는 만큼 더 냉정하게 보고 있는 걸까.
나는 절로 복잡해지는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띤 채 두 전문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두 분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