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호승심
2차 심사 통과자가 결정되었다.
우리 제작진으로 들어온 프로필은 개인 지원자와 기획사 소속 지원자를 모두 합쳐 583명.
그중에서 2차 면접 심사로 넘긴 이들은 총 103명이었다.
경쟁률로 치자면 5대 1을 좀 넘는 수준인데, 사실 이것도 우리에겐 감지덕지한 규모였다.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은 지원자만 3,000명이었다던데.”
“그건 아이돌 프로그램입니다, 형님. 저희하곤 길이 달라요.”
그 프로그램에서 최종적으로 9인조로 데뷔하여,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프로그램은 300대 1을 넘는 경쟁률이었으니, 지원자의 스케일이 다르긴 하다.
“하긴, 이쪽은 출연진 10명 중에서 최종 1명을 뽑는 거니까.”
“예, 그렇죠. 100명은 올렸으니까 충분하기도 하고요.”
준혁이 형님도 욕심이라는 걸 안다는 듯 끄덕거리는 것을 보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었다.
“아이돌 하니까 떠올랐는데, 2차 면접자 중에 아이돌 출신이 있었죠?”
나는 노트북에서 PDF로 정리해 둔 이력서를 찾았다.
『성명: 박지운
나이: 25세
.
.
경력: 보이그룹 맨엠블럼』
몇 가지 경력이 더 있긴 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경력은 그것이었다.
맨엠블럼은 영 생소한 그룹명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하는 한편, SNS로 민희 찬스를 썼다.
준혁이 형님도 검색을 하면서 말했다.
“배우 활동 시작한 지는 1년이 채 안 된 모양이네. 웹드라마 하나랑…… 조연 몇 개 정도네.”
그즈음, 아이돌 학과가 있었으면 박사를 땄을 민희에게서 정보가 왔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돼서 알아보니, 그 그룹이 그다지 좋게 해체한 건 아닌가 보더라고요.”
“무슨 일인데?”
“기획사 사장이 투자금을 들고 날랐답니다.”
“아…… 그거 나도 들은 것 같은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 회사였나 보구나.”
나도 민희에게 듣고서야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뉴스도 몇 번 나온 일이었다.
맨엠블럼이 소속되어 있던 중소 회사의 사장이 투자금을 끌어서 들고 날았고, 맨엠블럼은 별다른 수도 없이 해체당하고 말았다.
회사가 사라졌으니 멤버가 공중분해된 건 뻔한 일. 가뜩이나 아이돌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 인지도가 약한 그룹은 쉽게 회생할 수 없다.
멤버들이 <스프K>에도 나오거나 하는 등 재기를 노리던 중에, 박지운은 배우로 전향을 한 것이었다.
“지금도 소속사는 없다고 나와 있네요. 그 이후로 주욱 혼자서 활동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회사에 믿음이 사라질 만하지. 젊은 나이에 큰일 당했네.”
혀를 두어 번 차고, 준혁이 형님이 프로필을 진득이 관찰했다.
본인도 전 회사에서 큰일을 당하고 플래티넘으로 옮겼으니, 아마 심적으로 끌리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저희는 객관적으로 심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그렇게 말을 했더니, 그는 한 박자 느리게 끄덕였다.
“강 PD, 촬영 준비 다 됐어.”
우철민 PD가 대기실로 들어와 알려 주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일하고 있으니, 두 살 많은 그에게 그냥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해 주었다.
메인 PD에게 그럴 수 없다고 그가 극구 거절하긴 했지만, 결국 내 고집을 이기진 못했다.
“형님, 그럼 준비하고 나오세요.”
“그래. 머리만 좀 만지고 갈게.”
대기실에서 나오는 나와 교대하듯 윤대명 매니저가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철민 PD를 따라 내려간 곳은 플래티넘 회사의 지하 연습실.
보통은 가수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들이 쓰는 공간인데, 촬영은 위해 이곳을 오늘 하루 동안 빌렸다.
나중에 플래티넘 소속이 될지도 모르는 신인 배우들을 위한 포석인 셈이었다.
사실 면접은 그냥 힙플이나 NBS 회의실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플래티넘 신사업기획부에서 강한 요청이 있었다.
“플래티넘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사업기획부의 담당자인 성희섭 팀장의 말에 나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획을 통과시키는 동안 워낙 기다리게 한 죄도 있으니까.
사실 오케이 하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괜찮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메라 배치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중에 바로 그 성희섭 팀장이 내려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사이 곧장 준혁이 형님도 도착했다.
거울 앞에 배치된 자리 중 중앙 자리를 준혁이 형님에게 내주고, 면접관들이 자리하는 대로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지잉-
눈치 없이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내 주머니에서였다.
거절 메시지를 보내려고 꺼냈는데.
『신동욱실장』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5분만 있다가 시작합시다.”
“무슨 일이야?”
준혁이 형님과 우철민 PD가 동시에 쳐다봐서, 나는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나는 연습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강대한입니다.”
“아이고오. 강 PD님. 제가 너무 늦게 연락을 드렸죠. 죄송합니다. 요즘 경황이 없어서. 하하하.”
연결이 되자마자 뻔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죠, 아주 경황이 없으실 것 같긴 했습니다.”
반사적으로 그렇게 내뱉고 나서야 나도 아차 싶었다. 그간 나도 모르게 화가 많이 쌓여 있었나 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지만, 저희가 영화 하나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예, 기사 봤습니다. 그때 저에게 보여 주신 그 대본 같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때 제목은 없었던가요? 가제이긴 하지만 제목 좋지 않습니까? ‘갈 데까지 간다’ 캬아. 좋게 뽑힌 것 같습니다.”
뭐지, 왜 이리 능글맞은 어투지?
그동안 만나거나 통화 나눌 때와는 말투가 어째 이미지가 달랐다. 원래 이런 말투였던가?
“제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닙니다만.”
“예? 아, 뭔가 용건이 있으셨던 거죠?”
모르는 척 하는 건가. 태도가 뻔한데.
“영화 만드시면서, 영화 제작 리얼리티를 같이 제작하신다던데요.”
“아, 그 기사를 보셨구나. 예. ‘무비 메이커’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찾아보니 영화 제작 과정을 좇는 리얼리티는 딱히 만들어진 적이 없더라고요. 재미있는 시도가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다른 할 말 없으십니까?”
“다른 할 말이라. 뭐가 있죠?”
모르쇠인가. 뒷골이 찌릿해지는 것을 억누르면서 다시 말했다.
“제가 준비하는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아실 텐데요. 비슷한 영화 제작 콘셉트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게 우연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허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모르겠는데.”
전파 너머에서 코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이 아이디어는 애초에 저희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수소문하다 보니 NBS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고 해서 접촉했던 거고요.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다른 영화사를 선택하셨잖습니까? 그게 저희 잘못입니까?”
능글맞은 어투를 버리고, 신동욱 실장의 어조가 매우 날카로워졌다.
“애초에 이런 시국에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거기에 협력하는 게 맞는 일이냐고 회사에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밀어붙였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강 PD님이 틀어 버리셨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할까요? 이젠 원래 하려던 기획으로 갈 수밖에요. 근데 그게 문제가 있습니까?”
“…….”
이 기분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황당하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하는데, 반대로 냉정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아니다.
같은 영화 제작을 소재로 한다 해도, 이쪽은 배우 오디션이고 저쪽은 관찰 리얼리티다.
신동욱 실장의 말은 트집 잡힐 구석이 아예 없을 만큼 똑부러지고, 당연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믿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AGD 앱으로 그의 흑심을 보기도 했었으니까.
“어차피 다시 통화할 일은 없을 것 같고. 각자 좋은 프로그램, 영화를 만들어서 선의의 경쟁을 하시죠. 그럼 어쨌든 문화 산업에 서로 이바지하고,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뚝- 하는 정적에 황망하게 스마트폰의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선의의 경쟁이라……. 하, 선의 다 죽었네.
“뭐래?”
뒤에서 들여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준혁이 형님이었다. 걱정되어 나온 모양이었다.
“뻔뻔하네요. 아이디어 훔쳐 간 적 없고, 원래 하려던 기획이었단 식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애초에 처음부터 엮이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엮인 이상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타입이었던 거야.”
뭐지. 난 신 씨와 별로 인연이 좋지 못한가.
회사 내에서도, 회사 밖에서도 신 씨랑 트러블이 난다.
이거 사주라도 한번 보러 가야 하나.
스마트폰을 노려보다가, 쑤셔 넣듯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형님. 이 방송 성공시킵시다. 영화도 대박 내고요.”
“그래, 그러자.”
어쨌든 신 씨랑 엮여서 좋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꼽자면 하나는 좋았다.
전에 없이 호승심이 들었던 것이다. 온몸에 활력이 감도는 기분이었다.
* * *
2차 면접은 총 5일간 치르기로 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20여 명씩 나눠서, 1명씩 면접을 진행했다.
그냥 서류만 보는 게 아니라 연기력까지 보다 보니, 하루에 꼬박 5시간은 쏟아야 했다.
금요일 오후. 50명 단위의 면접자가 넘어가면서 겨우 절반을 마무리했다.
벌써 오늘만도 몇 잔째 들이붓는 건지 모를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옆자리의 준혁이 형님을 보았다.
“좀 괜찮으십니까?”
“음, 며칠 철야로 촬영한 적도 있는데 뭐. 이 정도야 거뜬하지…… 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사실 좋진 않아.”
초췌한 얼굴로 씩 웃는 모습인데도 남자가 봐도 설레게 매력이 있다. 이러니 뭘 해도 화제지.
나는 피식 웃고서 다음 이력서를 체크했다.
“예의 그 백종현이네요.”
“그러게. 이렇게 만날 줄이야.”
촬영 기재를 체크하고 있던 우철민 PD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서, 나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음, 백종현 씨. 들어오세요.”
위층 대기실에서 미리 신호를 받고 내려와 있던 백종현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면접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분위기와 카메라들을 보고 얼어붙곤 했다.
그러나 백종현은 등장부터 달랐다.
“안녕하세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서는, 카메라를 둘러보면서 한 번 더 웃음을 지어 보이고 의자에 앉았다.
면접관 맞은편에 단 하나 달랑 있는 철제 의자를 부담스러워한 면접자가 많았는데, 백종현은 아니었다.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듯한 여유로움이 있었다.
“저게 연기라면 대단한데요.”
가만히 속삭이는 내 말에 준혁이 형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백종현을 보았다.
“일단, 자기소개 좀 해 주실까요.”
“예. 안녕하십니까, 백종현이라고 합니다. 연기 시작한 지는 이제 2년 정도 되었고, 아직 대표작이라고 할 것이 연애 예능인 <러브트러블>이나 <당잠사> 정도라서 민망합니다. 그래도 역을 따내게 된다면, 정말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준비해 둔 멘트인 듯 술술 흘러나온다.
확실히 처음 봤던 이미지는 <당잠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꽃미남 계열 마스크에, 키도 훤칠하게 크고.
앉아만 있어도 그림으로는 완벽하다.
그런 남자가 눈웃음을 살근살근 지어 가면서 면접관과 카메라에 눈을 맞추니, 절로 머릿속에서 편집점이 보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몸으로서 단순히 그런 화제성만 따질 순 없었다.
“저나 여기 류준혁 배우님과 <당잠사>를 같이 했었죠.”
“예. 그때는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이력서를 보고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지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한마디 먼저 귀띔이라도 해 주었다면 저희도 관심을 가졌을 텐데요.”
슬쩍 떠보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을 압박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겠지.
그런 기대를 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백종현은 아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이더니, 잠깐 눈을 굴리다가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조언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꼭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
날카로운 척 질문한 내가 민망해지는 해맑은 대답이었다.
뭐지, 연기인가? 연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 <당잠사> 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 뒤에도 몇 번, 기존의 경력에 대해서 물었다.
성적이 좋지 못한 단막극 주연이나 조연 경력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쑥스럽다는 듯, 민망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면서도 해맑고 흔들림 없는 대답은 여전했다.
저건 원래 타고난 자신감과 능력일까. 아니면, 배역을 받기 위해 태연한 척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지금 저 모습이 연기이고 거짓일 확률은 얼마일지 궁금했다.
백종현의 머리 위로 아지랑이같이 숫자가 나타났다.
[5%]
유수현 작가가 <당잠사> 시즌5에 합류해 줄 확률 이후로, 이런 낮은 확률은 처음이었다.
5%라니. 일단 기본 바탕은 연기가 아니라는 건데……. 대체 그럼 5%의 거짓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