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124화 (124/200)

124화 무비 메이커

힙플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시작되면서, 방송사에는 거의 아침에 얼굴만 비추는 수준이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업무가 가능한 시대다 보니 밖에서 업무 보고를 하는 것도 가능했고, 정민우 팀장도 그런 편의는 봐주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게을렀나 싶을 정도로, 회사에 얼굴만 비추다 보니 아예 회사에 나가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다.

급기야 일주일에 두 번은 갈까 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에, 방송사에 직접 얼굴을 비추어야 할 일이 생겼다.

“송구스럽네요…….”

마케팅 팀장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더 라이벌>은 초반부터 광고가 잘 붙지 않는 상태여서, 마케팅 담당의 힘이 필요하다 보니 서인하 국장이 신경을 써 줬다. 덕분에 마케팅 팀장이 담당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난항을 겪고 있었다.

팀장이 내미는 리스트를 훑어보고, 난 다시 그녀를 보았다.

“여기서 확정은 여전히 두 곳……입니까?”

한 곳은 차 계열의 음료, 또 하나는 샌드위치.

둘 다 우리 방송사와 협찬 광고 계약이 맺어져 있는 곳이다.

NBS에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면 예능이고 드라마고 사실 가리지 않고 들어가는 곳.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런데도 추가 확정이 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추가로 협의하고 있는 데는 세 곳 정도 더 있어요. 그런데 조금 미적지근해서 좀 더 푸시가 필요해 보이긴 해요.”

“푸시요…….”

“그래서 말인데, 방송 안에서 좀 더 노출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부분 있을까요?”

리스트를 훑어보면서, 지금까지 기획해 둔 방송 내용과 대조했다.

“겨울 야외 촬영이 분명 있을 거라, 매주 패딩은 필요할 겁니다. 배우들도 늘씬할 테니까 협찬에는 어울릴 것 같은데.”

“패딩이라……. 아웃도어룩은 그럼 좀 더 푸시할 수 있겠네요.”

팀장이 빨간 펜으로 체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기획안을 열어서, 마케팅 관련 페이지에 제시된 협찬 회사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

“…….”

아이템을 써서 한 번에 몇 개씩 본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마케팅 팀장이 뭘 하는 거냐는 듯 쳐다보는 걸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면서, 리스트에 있던 이름들을 전부 집어넣고 확률의 변동을 확인했다.

[현재 사용 중인 ‘<더 라이벌> 방송에 가장 알맞은 협찬 선정 확률’이 변동되었습니다.]

[92%]

그중, 마케팅 팀장이 짚어 주지 않은 이름 하나가 훌쩍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여긴 어떤 곳입니까? 제품은…… 무선 이어폰이네요.”

“아, 이곳은…… 협찬 문의 들어온 곳이긴 한데 스타트업 수준인 작은 회사라서, 금액으로는 가장 적을 거예요. 괜찮아 보이세요?”

“무선 이어폰이면 촬영 때도 쓸 곳은 많아 보이니까, 한번 진행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뭐.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 여기도 추가해 둘게요.”

[94%]

마케팅 팀장이 빨간 펜으로 체크하자, 다시 확률이 뛰었다. 최근에 100%의 확률을 달성한 게 없어서 6%의 부족 확률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지금 미팅에서는 어려울 것 같았다.

“진행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노트북을 정리해서 마케팅 팀을 나왔다.

“시간이…… 지금 넘어가면 딱 맞겠네.”

다시 힙플 스튜디오로 가서 출연진 회의를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잡아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민준기 기자에게서 연락을 받은 것은 그때였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다가 메시지가 온 것을 발견했다.

“심상찮은 보도자료?”

우리 <더 라이벌>의 추가 보도자료는 이미 보내서 기사 등록이 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그냥 전화를 걸기로 했다.

“예, 기자님. 접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로 전화 주셨군요. 혼자 있으십니까?”

“예. 차 안입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좀 전에 다른 방송사에서 새 프로그램이 론칭된다는 보도자료를 받았는데, 그게 좀 수상해서 말입니다.”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차를 출발시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곧 드는 대답이 돌아왔다.

“콘셉트가…… 영화 제작 추적 리얼리티입니다.”

“네?”

이게 무슨 말이야.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다음에 들려오는 민준기 기자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바람처럼’에서 만드는 영화입니다.”

자료 자체를 유출할 순 없어서, 민준기 기자는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바람처럼’ 영화사에서 신작 영화를 만드는데, 제작 준비부터 배우 선정, 제작 진행 등의 과정을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사는 NBS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케이블사 채널T.

정확한 방송 일정은 나오지 않았지만 제작에 들어간다는 것은 확정사항이라는 내용이었다.

“저희야 기사를 등록할 수밖에 없으니 미리 알려라도 드리는 겁니다. 아마 내일 올라갈 것 같아요.”

“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장 일산으로 갔다. 힙플 스튜디오에는 준혁이 형님도 도착해 있어서, 이 사실을 전했다.

“잠깐, 영화 제작 리얼리티?”

“리얼리티 예능으로 만든다는 건가요?”

준혁이 형님과 우철민 PD가 동시에 놀랐다. 우철민 PD는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바깥에 있던 조연출에게 다른 제작사 수소문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일 정식 기사가 올라온다면…… 일단 그때를 기다려 봅시다.”

나는 상대적으로 태연함을 가장하고 그렇게 결정했다.

하루 촬영을 진행하고, 2차 진출자를 추가로 뽑았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더 라이벌>의 배우 모집 종료 기사가 나가기도 전에 문제의 기사가 포털에 등록되었다.

『<단독> 영화 제작 리얼리티 예능, 국내 최초로 선보여

―민준기 기자』

내용은 어제 민준기 기자가 전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디테일한 점들이 추가되어 있었는데, 그중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본문 후반의 내용이었다.

『……‘무비 메이커’(가칭)에서 다룰 영화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많은 흥행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 ‘바람처럼’의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형사와 연쇄 살인마의 대결을 그린 ‘갈 데까지 간다’(가제)가 바로 그것이다.

‘대본 완성도가 아주 좋아서 제작을 서두르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의 케미도 기대해도 좋다’고 영화사 관계자는 전했다.』

“이 대본, 우리가 본 그 대본 같습니다.”

준혁이 형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용 설명은 똑같네. 애초에 이런 기획이 있어서 우리한테 접촉해 왔던 건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우철민 PD가 앞에서 듣고 있었다. 나는 준혁이 형님과 눈을 맞추고, 영화사 선정 중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우이독경’ 이전에 ‘바람처럼’과도 이야기를 나누셨단 말이죠……. 그 영화사면 스튜디오 사이에서도 유명합니다.”

“어떤 식으로요?”

우철민 PD가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원래는 저희와 같은 외주 제작 스튜디오로 시작했었는데, 투자를 받아 규모가 커지면서 영화사로 확장한 데거든요.”

“덩치가 작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다만, 투자를 받은 만큼 빨리 성과를 내야 하니까 이런저런 안 좋은 수도 많이 쓴다고 들었습니다.”

“안 좋은 수?”

“가령…… 아이디어를 훔치거나, 남의 기획을 베끼거나 하는 것들요.”

우철민 PD의 진지한 어투에, 단순히 농담이 아님은 확실했다.

신동욱 실장을 만났을 때의 확률이 떠올랐다. 그가 본심을 숨기고 있을 확률이 89%였다.

그때는 단순한 찜찜함으로 끝났지만, 설마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한 플랜도 이미 짜 놓고 있었던 걸까.

“제 기획을 듣고, 그것을 비슷하게 바꿔서 진행한 것일까요.”

“……그렇다고 단언하기에는 좀 애매한걸.”

준혁이 형님이 옆에서 중얼대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데, 우철민 PD가 끼어들었다.

“어제 이야기 듣고 좀 알아봤는데,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에서 기획 자체는 바람처럼에서 제안한 거라고 했다고 해요.”

확률을 보지 않아도, 그 정도면 정황적으로 명백한 거 아닌가.

내 방송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신동욱 실장이?

찜찜함에 접대 전화도 거절했던 건데 이런 식으로 사람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건가?

나는 스마트폰을 노려보다가, 들고 일어섰다.

“전화 한 통 하고 오겠습니다.”

“누구한테? 신동욱 실장이라는 그 사람?”

“예. 어떻게 된 건지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전화를 받을까?”

그건 나도 의문이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강대한입니다. 오늘 올라온 기사 봤습니다. 설명을 듣고싶은데 시간날 때 연락주십시오]

메시지만 그렇게 간단히 남긴 뒤,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안 받지?”

“그렇네요. 일단 연락 달라고 해 놨습니다. 오는지 보죠.”

전화가 오면 정말로 뻔뻔한 거고, 만약 뻔뻔하게 온다면 어떤 말을 할지 기대가 된다.

“일단 저희는 저희 일을 하도록 하죠. 우리 기사도 곧 올라올 겁니다.”

* * *

다음 날이 되어 우리가 보낸 보도자료도 올라왔다.

『<더 라이벌> 배우 모집 마감, 2차 진출 심사 중……』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첫 발을 내디디다―<더 라이벌> 2차 심사 일정 공개』

출연진 서류 모집은 오늘부로 종료하였고, 이제부터는 2차 면접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거기에 대한 일정은 보도자료에서 어느 정도 나와 있지만, 공식 SNS 채널에도 발 빠르게 등록을 해 두었다.

포털을 타고 실검까지 올라간 기사의 반향을 체크하고 있던 중에, 소식을 들은 이들이 연락을 해 왔다.

[민희: 뭐야 왜들 기사에서 싸우고 있어?]

[민희: 무비메이커랑 엄청 비교당하고 있네?]

[민희: 내가 또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왕년에 키워 떴던 실력을 발휘해 줄게]

[박주영선배: 저쪽에서 알바 좀 풀었나 보다 야]

[박주영선배: 나도 좀 지원사격해줘? 우리 애들 풀게]

말로만 들어도 감사하여, 직접 표시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좋은 사람들이라서 다행이지만, 그들 이야기대로 기사 댓글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야 차라리 무비메이커가 더 신선하지 않냐

―리얼리티라니까 주작하기도 힘들고 애초에 주작할 건덕지도 없네?

―한쪽은 영화에 넣을 배우오디션이고 한쪽은 영화 만드는 리얼리티고. 비슷한 컨셉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데 이게 우연임?

└우연 아님 둘 다 강 피디 기획

└개소리ㄴㄴ 기획 바람처럼이라고 다나옴

└영화 잘만드는 영화사가 방송 기획도 잘함

―주작이 없을 테니 난 무비메이커 응원함』

“무비 메이커를 응원한다는 덧글을 왜 우리 프로그램 기사에다 달까요.”

막내 작가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모인 모두가 주억댔다. 딴 데 가서 할 것이지, 왜 그런 말을 우리한테 하고 앉았어.

“콱 신고할까요?”

조정아 메인 작가도 거들고 나서고, 다른 작가들도 한 팔 돕겠다고 나서서야 겨우 분위기가 좋아졌다.

메인 PD인 내가 분위기를 이끌어야 하는데 작가들이 저렇게 뛰어주고 있으니, 참 면목이 없다.

“바람처럼에서는 연락 왔습니까?”

우철민 PD가 조심스럽게 물어와서 고개를 저었다.

“쉽게 연락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차하면 쳐들어가려고요.”

“가실 때 불러주십시오. 큰 힘은 안 되더라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서글서글한 사람 좋은 인상의 그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여도 딱히 믿음은 안 가는데 말이지. 하긴, 목청은 크니까 도움은 되겠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준혁이 형님이 스케줄을 마치고 합류했다.

“바로 달려오셨나 보네요. 정장 안 불편하십니까?”

“정장은 괜찮은데 메이크업은 답답해.”

“답답하신 김에 그럼 오늘은 그렇게 촬영하죠. 그동안 형님 비주얼이 너무 안 보였습니다.”

나는 카메라 감독에게 말해, 준혁이 형님을 비추는 카메라 각도를 조금 손봤다.

그 모습을 보고 준혁이 형님이 피식 웃었다.

“이럴 때도 카메라 각도를 따지는 걸 보니, 너도 참 지독하다.”

“이럴 때니까 더 제 일 철저하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뱉어놓고 보니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었다. 난 내 말에 스스로 공감하면서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저쪽이 어떻게 나오든,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든, 저희는 저희 일을 제대로 하면 됩니다. 방송만 제대로 만든다면 어차피 모든 게 잘 풀릴 겁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팀원들이 동조해 줘서 한층 더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오늘 촬영 시작합시다.”

“예.”

혼란한 분위기는 접고, 마지막 서류 심사의 촬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촬영이 끝날 때까지 신동욱 실장으로부터의 연락은 역시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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