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이사실
내가 고른 스튜디오의 이름은 ‘힙플 스튜디오’.
미팅을 앞두고 찾았던 정보에 따르면, 설립된 지 5년이 되었고 여러 방송사에서 외주 형식으로 많은 방송을 제작한 경력이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재밌게 보았던 연애 리얼리티나 관찰 예능 같은 것도 있었는데, 제작 이력을 찾아보니 비단 예능만 하는 게 아니었다. 드라마, 다큐 같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서인하 국장의 리스트 중에서 가장 견실해 보이는 외주 제작사였는데, 찾아가서 미팅한 결과 가장 좋은 확률을 보이기도 했다.
서인하 국장의 허가도 얻었으니 담당자와 연락할 차례였다.
『우철민PD기획실장/힙플』
연락처에 저장해 둔 이름을 찾은 나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를 떠올리면서 전화를 걸었다.
“……안 받네.”
한참 신호를 기다렸는데 받지 않아서 그냥 끊었더니, 곧장 메시지가 날아왔다.
[회의 중입니다.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 회의라니. 고생 많으시네.
메시지로 스튜디오 컨펌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메시지보다는 목소리가 나을 듯해서 기다리기로 했다. 회의 끝나면 연락 부탁한다는 간단한 메시지만 남겼다.
그렇게 휴게실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리자,
“욥!”
시야 안으로 폴짝 하고 작은 얼굴 하나가 날아들었다. 민희였다.
“어, 오늘 저녁 도착 아니었어?”
“예정보다 일찍 끝나서, 회사 복귀했다가 퇴근하게 됐어. 복도에서 뭐해?”
하긴, 민희 입장에서는 이상한 놈으로 보였으리라. 전화를 들었다가 넣었다가 서성거리기까지 했으니.
나는 브이를 그려 주었다.
“국장님이 스튜디오 컨펌 내주셨거든. 그쪽 스튜디오에 연락할 참이었는데 회의 중이라고 못 받는다네.”
“힙플이었던가, 거기? 가장 맘에 든다더니 다행이네. 드디어 본궤도인가?”
“왕 이사님이 스톱만 안 건다면야 이제 빨리빨리 해야지.”
제작진 자체도 이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젠 정말 제작만 남았다.
“더 바빠질 텐데, 오늘 저녁 정도는 시간 되지?”
“응? 오늘?”
“데이트한 지 좀 됐잖아.”
아니,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점심시간에 짬짬이 카페도 갔고, 바로 엊그제 데이트를 했지 않나.
하지만 본능은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
“퇴근 시간은 좀 지날 거 같은데, 괜찮아?”
어떤 면에서 여자 친구는 왕이범 이사보다 무서운 법이니까.
“나도 회의 하나 있어서, 그거 하고 나면 비슷하게 마치지 않을까.”
“그래, 그럼 나중에 끝나면 연락하기로.”
“응.”
복도를 슬쩍 살핀 뒤에 서로 손을 깍지 껴 맞잡은 후에 헤어졌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도로 연락을 기다리다가 사무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잠깐 앉아 있자니 잘 울리지 않는 내선전화가 올렸다.
그 전화를 받고,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빙하기의 공룡처럼 얼어붙었다.
“……예, 알겠습니다. 네.”
전화 상대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고,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중 한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팀 사무실에 내려갔을까 하고 전화를 했더니, 역시나 바쁜지 바로 받지 않았다.
국장실로 가서 노크를 하자,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보고를 위해 올라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어떡하지.
혹시나 싶어 두 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나 이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할 수 없나.”
시계를 보자, 전화가 온 지 벌써 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 올라오라고 했지.
애초에 거부권 같은 게 없는 관계이니, 나는 각오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착한 것은 이사실 층.
회의실 몇 개를 지나서 안쪽으로 가자, 나를 불러 올린 이사실이 있었다.
괜한 긴장에 헛기침을 하고,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강대한입니다.”
나에게 연락을 한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지.”
소파에 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호현 이사였다.
“안녕…… 하십니까.”
“그래, 앉아. 뭐 마실 것 필요한가?”
“아뇨, 괜찮습니다.”
긴장으로 목이 칼칼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넘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는 것만이 최대한의 움직임이었다.
“바쁜 사람 부른 건 아닌가 모르겠군. 하긴, 새 프로그램 제작 들어가는데 바쁘지 않다면 그게 더 문제겠지.”
네, 그런 바쁜 사람을 불러 올리셨습니다만.
그런 불만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내뱉을 순 없었다.
개인적인 껄끄러움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신호현 이사는 이사진 중에서도 한 파벌을 만든 데다 파워깨나 있는 사람이었다.
직접 얼굴 대면한 것은 지난번 엘리베이터가 전부였는데, 나를 이렇게 불러 올린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괜찮습니다. 혹시 어떤 일로 부르신 건지 우선 여쭙겠습니다.”
“단도직입적이군. 그래, 좋은 자세야.”
그가 신사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띠고서는 나를 보았다.
“딴 일로 부른 건 아니고, 이번에 외부 스튜디오랑 연계를 하기로 했다던데. 맞나?”
“예, 맞습니다.”
이사인 그가 이 일을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미팅 몇 곳 다녔다고 들은 것 같은데, 혹시 확정한 상태인가?”
“…….”
말을 듣고서도 무슨 용건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이 타이밍에 갑자기 외부 스튜디오 건을 물어본다고?
내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가 손을 내저었다.
“딱히 다른 말을 하려던 게 아니야. 아직 안 정한 거면 괜찮은 곳이 있으니 추천해 주려 했던 거지. 전에도 한번 이야기하지 않았나.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그런 말을 하긴 했지. 하지만 뻔히 그와 현준영의 관계를 아는 내 입장에서 그 말이 진담으로 들릴 리가 없다.
신호현 이사의 눈빛이 마치 독사의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누구의 조언이라도 받고 올라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사람은 없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내 행동을 결정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외부 스튜디오를 추천해 주신다는 겁니까?”
“그렇지. 자회사 스튜디오도 몇 곳 있잖아? 아예 외부보다는 자회사나 좀 관계가 있는 곳이 아마 일하긴 더 쉬울 거야.”
그가 데스크로 돌아가 파일철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여기, 내가 추천하는 몇 곳의 소개서를 넣어놨으니 보게.”
일단 받아 들었다. 훑어보는 척 한번 끝까지 넘겨 보고 대답했다.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말씀을 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왜, 벌써 정했나?”
“예. 이미 보고는 해 둔 상태입니다.”
“결재가 난 건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할까.
“아직 왕 이사님 결재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뭐 아직 모르는 거 아니겠어. 그 리스트에 더 맘에 드는 곳이 있을 수도 있고.”
그가 가리키는 파일철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살펴보고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힘내게. 만든다는 방송, 나도 기대하고 있어.”
그가 일어나서는 내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나는 그의 머리 위를 조금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비서가 일어나 인사를 하는 것을 묵례로 받고, 도망치듯 복도를 나서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능구렁이 같으니.”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신사적으로 웃으면서,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이 리스트를 건네주면서도, 그의 머리 위에서 보이는 확률은 반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100%]
본심을 숨기고 있을 확률.
어떤 의미이든, 나에게 스튜디오를 추천해 주겠다는 그의 말이 선의가 아님은 명백했다.
[100%의 확률을 달성하였습니다.]
[포인트가 지급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확률을 확인해 보고자 할 때부터 100%였다. 그 때문인지 포인트 정산할 것이 없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래, 이런 걸로 포인트 받아봤자 기분만 더러워지지.
신호현 이사에게서 받은 리스트를 어디다 버려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 PD, 왜 여기 있어.”
멀지 않은 회의실 중 하나가 열리더니, 그곳에서 서인하 국장이 나타났다.
그 뒤로 얼굴은 알고 있는 국장, 부장들과, 왕이범 이사가 걸어나왔다.
왕이범 이사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뭐야, 너 여기서 나온 거 아니지?”
서인하 국장이 바쁘게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내가 있던 위치가 정확히 신호현 이사실 앞이었다. 오해…… 아니지, 갔다 온 건 맞으니 오해라고 할 순 없지.
나는 다가오는 왕이범 이사 쪽을 의식하며 말했다.
“국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단 내려가자. 왕 이사님, 저희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
다른 이들을 복도에 두고 서인하 국장이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에 있었고, 그는 눈치 보지 않고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설명해 봐.”
두 층 정도 내려온 층간참에서 그가 물었다. 어떤 눈빛인지는 알 것 같았기에, 나는 들고 있던 파일철을 그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내선 전화로 올라오라고 하더니, 이 리스트를 줬습니다.”
“리스트?”
“방송 제작을 맡을 외부 스튜디오 구했냐고, 도움을 주겠다고 하면서 주더군요.”
그가 좀 더 깊어진 눈으로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소개서가 동봉된 그 리스트를 나는 대충 보았지만, 그는 몇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진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거…… NBS 지분이 들어간 회사들이네.”
“그런 겁니까?”
“그래. 전부 신 이사님이 투자 진행한 회사들이지.”
회사로서는 별다를 일이 아니다. 자회사, 혹은 지분이 있는 회사들에 일을 주는 것은 어떤 의미론 당연했다.
관행이라면 관행.
하지만 그 사이에 나를 끼우려 했다는 것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러려고 했다는 것이 나는 불쾌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거절은 못 했습니다. 잘 생각해서 진행하겠다고만 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네 입장에서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겠지. 정말 순수하게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뇨, 그건 아닙니다. 분명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단호해서, 뱉어 놓고도 나 스스로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서인하 국장의 반문에 이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하고 후회가 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콜라라서 닦아 봤자 끈적할 것 같았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만, 감입니다.”
“강촉새가 여기서도 통해?”
그가 우스갯소리를 섞어서, 나는 은근슬쩍 넘어갈 기회를 잡았다.
“그보다 왕 이사님이…… 오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왕이범 이사가 이번 일을 영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왕이범 이사가 신호현 이사와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신호현 이사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왕이범 이사가 봤으니, 어쨌든 오해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서인하 국장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그 점은 내가 잘 설명할게. 넌 그냥 스튜디오 협업만 잘 진행해. 보고는 끝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정리되고, 그는 이사실로 다시 향했다.
나는 한 층을 더 계단으로 내려와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잠깐 사이에 별일을 다 겪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다 보니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서인하 국장이 준 스튜디오 리스트, 신호현 이사가 준 스튜디오 리스트.
두 리스트는 겹치는 곳이 전혀 없었다.
즉, 서인하 국장이 의도적으로 회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스튜디오만 골라서 줬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일을 진행하려면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편이 더 매끄러울 텐데.
왜 그랬을까.
“……뭔가 생각하시는 바가 있겠지.”
그게 뭘까 궁금했지만 차마 확인할 새는 없었다.
* * *
민희와 저녁 데이트를 하던 중에 힙플 스튜디오에서 뒤늦은 연락을 해 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계약서는 내일 샘플 보낼 테니 확인해 주세요.”
“예!”
우철민 PD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민희가 인상을 찡그릴 정도였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고 하는 소리는 이럴 때 쓰는 거지?”
“그러게. 전에 봤을 때 이런 캐릭터인 줄 몰랐네.”
웃으면서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일은 다 끝난 거지?”
“응. 오늘은.”
“그럼 데이트에 집중해. 같은 회사에 있는데 얼굴 보기도 힘드니 원.”
“예, 죄송합니다.”
이게 내가 사과할 일인가 싶었지만 나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민희에게 사과를 하고,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부터는 곧장 힙플 스튜디오와 제작 협력 계약을 맺고 제작을 진행했다.
계약서가 끝나는 대로 힙플 스튜디오의 사무실로 가서 꾸려진 제작진과 인사를 하고, 방송이 만들어질 파주 쪽 스튜디오도 확인했다.
미리 사전 조사와 미팅을 하면서 확인한 것들이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니 역시나 방송사 내부와 시스템이 달라서 앞으로 맞춰 갈 부분들이 많아 보였다.
“저희가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은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부족한 점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한 점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저도 배우 오디션은 처음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족한 사람들끼리 잘 맞춰 가도록 하죠.”
위치상 나의 서브가 될 우민철 PD와 든든하게 악수를 나누고, 또 다른 기획자라 할 수 있는 준혁이 형님과의 미팅을 잡았다.
『<단독> NBS 새 오디션 프로 베일을 벗다―<더 라이벌> 배우 모집 시작』
민준기 기자의 지원 사격과 함께, 드디어 기다리던 배우 모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