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단독 기사
강대한에게 스튜디오 리스트를 던져 주고서 내보낸 뒤, 서인하는 피곤한 듯 이마를 주물렀다.
맞은편에 앉은 정민우도 그다지 다른 얼굴은 아니었다.
“많이 피곤하냐.”
“그럴 리가요. 간밤에 약주를 먹어서 아주 몸이 팔팔합니다.”
“비꼬려면 그냥 대놓고 비꼬지그래.”
“아, 그렇게 안 들리셨습니까?”
서인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국장과 팀장 관계가 되고 나서 정민우와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보니 이전보다 더 기어오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제 수족처럼 움직이는 팀장이어서야 외려 부담스럽다. 아무리 벼린 칼이어도 세월에는 무뎌지는 법. 서인하가 생각하기엔 스스로가 딱 그랬다. 현역 생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입장. 점점 생각도, 행동도 옛것이 될 터. 그래서 자신의 오더를 기다리는 타입보단 정민우같이 나서는 타입이 좋았다.
“별일 없으면 일찍 들어가. 눈 감아 줄게.”
“어차피 그러려고 했습니다. 국장님 들어가시면요.”
“난 오늘 일찍 들어가진 못할 것 같은데.”
서인하가 강대한이 주고 간 회의록 보고서를 톡톡 치면서 말하자, 정민우는 금방 울상이 되었다.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뭣보다 저도 못 들어가잖습니까.”
“그러니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라고. 특별 무대 기획안만 올리고.”
그럼 그렇지, 하고 조용하게 투덜거린 정민우가 표정을 바꾸었다.
“대한이한테 스튜디오 연계를 시키신 건 저도 찬성은 합니다만, 어제 하실 이야기가 그것뿐이었습니까?”
“응? 무슨 말이야.”
“아뇨,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그 이야기를 하긴 했습니다만,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음…….”
서인하는 정민우를 슬쩍 쳐다보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행동의 수상함을 정민우도 모를 리가 없었다.
“무얼 숨기고 있으신 겁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해 주시다니 섭섭합니다.”
“섭섭할 게 뭐가 있어. 딱히 숨기는 거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다만 좀.”
“예.”
“요새 마음이 복잡하고, 싱숭생숭하고 그래. 어제 술 마시면서 좀 나아졌어.”
어깨가 축 늘어지는 서인하의 반응에 정민우도 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지난 본부장 자리 거절 때부터 서인하의 컨디션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 이후로 여러 일도 있고, 결국 본부장급으로 업무를 해치우고 있고, 그래서 다들 눈치채지 못했을 뿐.
최측근이라 할 정민우에게는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그래서 사실 어제 술을 마실 때만 해도 고민 상담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결국 업무 이야기와 농담 따먹기로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나아지셨다면 다행입니다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달리 더 할 말은 없어서 정민우도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편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우리나라에 예능 제작 스튜디오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NBS에서 몇 개의 스튜디오를 자회사로 들였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 외에도 지금도 많은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있는데, 나에게 넘어온 리스트는 아직 우리 회사와 연계되어 있지 않은 곳들이었다.
그곳들의 정보를 일일이 찾아보는 작업도 하긴 했지만, 이럴 때는 역시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박주영 선배에게 상담 요청을 했다.
“그래, 네가 아무 일 없이 나를 불러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어.”
술자리에서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그는 착실하게 내 상담을 받아 주었다.
그렇게 추려진 세 곳 정도의 스튜디오를, 확률 보기 순으로 순서를 잡아 미팅을 요청했다.
사전에 이야기되어 있기라도 한 듯 미팅 약속은 순조롭게 잡혔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사 앞 카페에서 만난 민준기 기자가 웃으며 인사를 해 주었다.
“그러게요, 매번 메시지로만 연락드리고. 얼굴 뵙는 거 오랜만인데 커피밖에 못 사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대신 비싼 커피를 마시죠, 뭐.”
민준기 기자 앞에서 당당하게 법인카드를 꺼내서, 가장 비싼 메뉴를 시켜 주었다.
각자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은 뒤 민준기 기자가 으레 그렇듯 노트북과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특종 하나 주신다고 하셔서, 오늘 회사 나올 때부터 잔뜩 기대하고 나왔습니다.”
“전 그냥 기사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드린다고 했을 뿐인데…….”
“강 PD님이 이렇게 직접 이야기해 주시는 거면 당연히 특종 아니겠습니까?”
눈이 번뜩이는 것이 아주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빚을 진 것도 있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 맞는데.
저런 눈빛이어서야 부담스럽다.
“너무 부담 주시면 그냥 차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어이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저희 팀장한테 얼마나 호언장담을 하고 나왔는데.”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괜한 긴장이 풀린 기분이었다.
“사실, 이미 카더라로 꽤 풀린 소식입니다만.”
“예, 새 프로그램 말이죠.”
“네. 사실입니다. 새 프로그램을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내가 흉내도 못 낼 속도로 노트북에 기록을 하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여러 선을 통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영화사 미팅도 다니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프로그램입니까?”
“네. 많은 분이 우려하시는 대로 경연이자 오디션 프로그램입니다.”
“현준영 PD가 사라진 자리를 이제 강 PD님이 메우시는 겁니까?”
악마의 편집이다, 투표 조작이다 뭐다 하면서 현준영이 욕을 먹긴 했지만, 그전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NBS에서 그를 스카우트한 이유도 분명 그 때문이었고.
물론 내가 그 자리를 채우려는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형태이긴 합니다. 그래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아시다시피, 뭐 요새 경연 프로그램 여론이 그다지 안 좋지 않습니까.”
경찰 수사 발표가 나고, 현준영이 구속을 당하고, 그러면서 해당 방송사의 중진에도 책임론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 사실에는 입을 닫고 관망하고 있기도 하고.
상황이 이러니 민준기 기자도 한껏 걱정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예, 그래서 프로그램 만들면서 공정성을 더 기하고, 시청자들에게 좀 더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궁리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 기획적인 부분이야 지금까지도 충분히 증명해 오셨으니 딱히 걱정은 안 합니다. 그럼…… 어떤 프로그램일까요? 가수? 아니면 <언더커버 싱어> 같은 변칙적인 형태의 오디션?”
“배우입니다.”
“네……?”
이 대답은 민준기 기자도 의외였는지 노트북 모니터에서 시선이 덜컥 떨어졌다.
“배우요? 배우 오디션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래서 영화사와도 미팅을 하신 거군요?”
“예. 맞습니다. 무엇보다 이 기획을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이 류준혁 배우라서요.”
그 이야기에 민준기 기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내 입장에선 그 가감 없는 리액션이 좋았다.
충격을 받은 모습이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잡힌, 서인하 국장에게서 공개 허락을 받아온 정보를 그의 앞에서 풀어냈다.
제목은 <더 라이벌>. 목표는 류준혁이 주연인 ‘우이독경’의 영화의 상대역. 총 10화 내외 동안 각종 미션을 통해서 그 역을 따내는 것이 프로그램의 구성.
“배우 연기 지도 같은 경우엔 류준혁 배우고 직접 할 거고…….”
“아카데미 형식으로 연기 지도 같은 부분도 담을 건데, 그 파트는 플래티넘에서 진행하게 됩니다.”
민준기 기자가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당장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고 있는 표정이 보였다.
“호오…… 이거, 그간의 프로그램과는 또 스케일이 다르군요.”
“그래서 준비하는 데 좀 오래 걸렸습니다.”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갔을 때부터 따져도 벌써 2개월이 족히 흘렀다.
방송을 털려면 정말 내년이 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실까지 민준기 기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전달하고 나자, 서로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배우 오디션 프로가 없었던 건 아닌데, 잘만 된다면 <더 라이벌>이 또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강대한 PD와 류준혁 배우의 콜라보인데요. 거기에 금완승 감독의 대본 아닙니까. 천만 감독의 새 영화를 이렇게 접목할 생각을 하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아이디어는 준혁…… 류 배우님이 냈습니다. 영화사 쪽 연계는 정말 그 형님이 다한 거죠.”
중간에 대본을 손본 해프닝도 있지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류준혁 씨가 그런 부분에 꿈이 있으셨다니, 참 놀랍군요. 불의의 일로 전 소속사와 헤어지신 거지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민준기 기자가 두서없이 이런저런 감탄을 내놓으면서 목을 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시작을 제가 이렇게 가장 먼저 알게 되어서, 그런 기회를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 와서, 나도 허겁지겁 같이 숙였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여러모로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기자’의 이미지를 불식시켜 주는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기도 하고.
그 이후로 한동안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향후 계획에 관한 대화를 하면서 인터뷰를 이어 갔다.
“오케이. 그럼 이 정도면 기사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공식 보도자료는 언제 나올까요?”
“아마 제작진이 꾸려진 이후에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는 독점이신 거죠.”
“앞으로도 제가 잘하겠습니다, 강 PD님.”
익살스레 웃으면서 노트북을 덮던 그가, 잠깐 모니터를 힐끔 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아참. 이건 기사에 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접촉하신 영화사 중에 ‘바람처럼’도 있습니까?”
어……?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네, 미팅은 했습니다.”
“그곳과 혹시 계약이 틀어진 이유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대본이 ‘우이독경’ 쪽이 훨씬 좋았거든요.”
나는 본심을 숨기고 그렇게 말했는데, 민준기 기자는 도리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그럼 미팅하셨던 분이, 신동욱 실장입니까?”
“예, 그분이 대외 업무는 거의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요즘 저희 회사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곳이라서요.”
조금 얼버무리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물어보려는 찰나, 더 물어보지도 못하게 그가 표정을 싹 바꾸고 일어났다.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좋은 기사로 보답하죠.”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인사를 청한 상황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민준기 기자와 악수를 했다.
그는 힘있게 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단독> NBS 강대한 예능 PD, 내년 상반기 중 새 프로그램 론칭 준비 중!』
미리 통지해 온 시간에 정확하게 민준기 기자의 기사가 올라왔다.
포털 뉴스 카테고리의 연예 홈에서도 상위 순위를 독차지하는 언론사답게, 등장하자마자 뉴스 순위 1위에 박혔다.
내용은 인터뷰를 토대로, 민준기 기자의 문장으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힘든 시기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근본부터 다시 확인해야 하는 시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첫발을 내디디는 프로그램이 또 있을까.
강대한 PD의 다음 걸음이 정당한 환경에서 이어지기를, 또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기대해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다음에, 마음과 좋아요를 눌러 주고서 댓글란을 살폈다.
다른 포털에서는 악플이다 뭐다 논란으로 인해 연예 뉴스 댓글을 차단하고 있기도 했는데, 이 포털은 여전히 댓글이 활발했다.
『―헐 찌라시가 맞는 거 처음 봄ㅎㅎㅎ 강 피디 새 프로가 진짜였네?
―오디션이냐 경연이냐 하더니 대놓고 오디션인데?
―가수를 하다가 이젠 아예 배우 오디션임? 처음인가-_-?
└처음 아님ㅇㅇ 이전에도 있었음 핵망했지만
└이것도 망함
└ㅋㅋㅋ미래에서 오심?
―우리 외삼촌 망하면 안 된다고!
└엑시트빠들은 너네 카테에서 놀아
―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의견이 분분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악플들이 덜한 것 같긴 하지만, 사실 그보다 어떤 의미로 더 매운 덧글들이 많았다.
『―이 시국에 오디션이라니 존나 개용감함
└킹시국씨가 또....
―이건 용기라고 해야 하냐 만용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만들어도 욕먹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모르겠다』
그러게. 나도 괜찮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뭐…….
“여기까지 온 마당에 밀어붙여야지.”
이미 이렇게까지 진행된 상태에서 멈추거나 바꿀 수는 없다.
차라리 조금씩이라도 좋은 여론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야 얼마든 인터뷰에, 기사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데.
마음을 다시 다잡고, 예정되어 있던 제작 스튜디오들과의 미팅을 처리했다.
이틀에 걸쳐서 세 곳을 만나서 그들의 시스템과 일처리 방식을 확인했다.
그들의 회사 소개와 미팅만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들은 당연히 있었지만, 나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75%]
[89%]
[93%]
미팅 상대의 확률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84%]
[79%]
[92%]
기획안을 고치면서 제대로 굴러갈 확률을 확인했다.
최종 결정을 가지고 정민우 팀장을 찾아가 컨펌을 받고, 곧장 서인하 국장에게 갔다.
“꽤 견실한 데를 골랐네. 여기 괜찮아.”
“예. 이야기 나눠 보니 제작 경험도 많고, 또 담당자도 의욕이 있어 보였습니다.”
서인하 국장이 잠시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상부에 보고 올릴 테니, 일단 진행 들어가.”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더니 결재란에 신명 나게 사인을 해 주었다.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