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금완승의 진심
AGD 앱에 경고 알림 기능 같은 건 없다.
눈앞에 신동욱 실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확률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전파 너머로 확률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신동욱 실장의 제안에, 감추고 있는 꿍꿍이가 있을 확률이 ‘100%’라는 것이.
“죄송합니다. 칼퇴이긴 한데, 약속이 있어서요.”
“아…….”
폰 저쪽에서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잠깐의 텀 뒤에 그가 말했다.
“그러시군요. 제가 타이밍이 좀 더 빨랐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습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거죠.”
“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앞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 가면 언제든 술 한잔 기울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번 봤을 뿐이지만, 그의 미소 띤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저도 여기저기 소식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서, 영화사 미팅 많이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스마일박스 쪽이랑 이야기가 잘 되신 것 같다고요.”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지.
“우이독경과도 아직 이야기가 결정된 것은 아니실 테니, 저희 제안 메일 한 번 더 확인해 주시고, 얼마만큼 이 방송에 의욕이 있는지 알아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예. 물론입니다. 고민하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긴 한숨을 새어나왔다.
분명 의욕도 있고, 태도도 좋고. 여러모로 괜찮은 사람이고 회사다.
그럼에도 이렇게 불안함이 느껴지는 것은, 저 태도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AGD 앱을 통해서 확인도 했다.
“좋은 데에서 술이라.”
현준영 스캔들 관련 기사 중, <스프K> 제작진의 혐의에는 향응접대도 있다고 했다.
분명 현준영도 좋은 데에서 술 한잔에서 시작하여, 결국 점점 더 깊어지고 퇴폐적으로 변했겠지.
내 연차도 3년. 방송 업계에서 일하면서 그것을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바람처럼이라. 계속 경계해야겠어.”
결심하듯 소리 내어 말하고, 원래 목적이었던 효명이에게 연락했다.
아쉽게도 효명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 분 뒤에야 스케줄 중이라는 메시지만 보내왔다.
톱 아이돌은 참으로 바쁜 모양이다.
* * *
점심을 먹고, 짐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타이밍에, 정민우 팀장이 나타났다.
“지금 가?”
“예. 내려가는 길에 얼굴 비추려고 했습니다.”
“뭘 굳이. 전화하면 되지.”
그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본인의 자리에서 파일철 하나를 챙겨 들더니 같이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가면 정해지려나?”
“어느 쪽이든, 그러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래, 만약 안 되면 차선은?”
“……스마일박스로 가려고 합니다.”
“바람처럼이 아니고? 스마일박스는 대본도 아직 제대로 안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바람처럼의 대본은 조금만 고치면 될 거 아냐.”
내 발언이 의외였는지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되물었다.
난 주변을 슬쩍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바람처럼 신동욱 실장이 전화가 왔었습니다. 자기도 일찍 마쳤다고, 괜찮다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더군요.”
“그래? 뭐, 영화사 쪽 인맥도 만들어두면 좋지. 나이도 비슷하다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영 께름칙해서요.”
“께름칙?”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좀, 감입니다. 술 한잔하자는 게 영 순수한 의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음…… 접대?”
“그런 뉘앙스로 느껴졌습니다.”
정민우 팀장의 음색도 저절로 딱딱해졌다.
“그래…… 지금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할 때지. 밖이 한참 시끄러운 중이니까. 아무리 관행이고 서로서로 돕고 사는 거라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맞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내 상사들이 의견이 맞아서 참 다행이다.
“그래도,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어.”
안심했다가, 그의 말에 난 잠깐 얼굴을 굳혔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패널의 숫자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이 바닥에 일하면 할수록 그런 제안은 얼마든지 또 받게 될 거야. 다 피해 가면 좋겠지만…… 다 피할 수 있다면 이 바닥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의 말투에는 꽤 오래 묵은 회한 같은 것이 있었다. 잔소리는 많지만 항상 힘을 북돋아 주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응? 아니, 딱히 일은 아니고. 그냥, 강 PD도 그런 걸 알 때가 되었지 싶어서 그래.”
그가 모호한 웃음을 띠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래도 나는 강 PD가 지금처럼 주제도 좀 넘고 요물처럼 재주도 부리고, 그랬음 좋겠어. 몰라도 되는 건 최대한 모르고.”
“…….”
엘리베이터가 열려서 뭐라고 이야기를 더 이어 가진 못했다. 먼저 <뮤직스케치> 팀 사무실 층에서 내린 그가, 깜빡했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그 방송에 일단 광고 몇 개 붙을 것 같아. 지금 협의 중이라고 하니까 연락 줄게. 가서 잘하고 와.”
“예.”
고개를 숙이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지은 지 30년 된 빌라 배수도처럼 꽉 막혀 있던 광고가 뚫렸다면, 이제야 이 방송이 드디어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정말 이젠 금완승 감독과 결판을 낼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차를 타고, 오늘도 막히는 강변북로를 달려 우이독경 사무실에 도착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직원이 나를 반겨주었다.
“기다리고 계세요.”
첫날 본 여직원이 안내해 준 사장실 소파에 금완승 감독이 앉아 있었다.
“아이고, 어서 와요. 강 PD.”
기분 탓인지 저번 봤을 때보다 훨씬 헬쑥해 보였다.
저게 우리 방송 때문에 고생을 해서인지 아니면 영화사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웃으며 인사를 하기로 했다.
“제가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야. 오늘 온다고 해서 어차피 스케줄 전부 취소했어.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수.”
……나 때문에 스케줄을 전부 취소했다면서 부담 갖지 말라고?
하지만 내 당황을 모르는 듯 그는 아이스면 되지? 하고 커피를 직원에게 내오도록 했다.
좀 전의 여직원이 커피를 가지고 오고, 나는 괜한 목마름에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찾아뵙자고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아이고, 아이고. 이렇게 갑자기? 너무 단도직입적인 거 아닌가?”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돌렸다.
“세상 사는 이야기도 좀 하고, 숨도 좀 돌리고 그러고 하는 게 어떠우. 우리 준비 중인 영화 이야기라도 들어볼 테요?”
“아니요, 제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나의 단호한 말에 금완승 감독도 그제야 느슨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크흠. 이거 참. 단단히 날을 잡고 왔나 보우.”
“예. 맞습니다. 저 혼자 오라고 한 건, 감독님도 그런 생각이셔서 아닙니까?”
굳이 준혁이 형님 없이 만나자고 했으니, 나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으리라.
오늘은 그것을 들어야 했다.
“준혁이 형님이 몇 번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 방송이 지금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닙니다. 제 사정도 그렇고 방송사 사정도 그렇고. 조금이라도 빨리 결과물을 내보여야 합니다.”
“나도 알아. 투표 조작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시기가 그리 좋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정면돌파를 하려고 하고 있고, 그래서 감독님의 대본이 필요합니다. 우이독경과 파트너로 같이하고 싶고요.”
“내 대본…….”
“어떤 내용인지는 대략 귀동냥으로 들은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준혁이 형님이 선택하셨으니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다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말을 한번 끊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감독님께서 계속 말을 바꾸시니, 아무리 아까운 대본이라도…… 욕심을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더 큽니다.”
“아니, 강 PD. 그게…….”
“건방진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제 방송이 더 우선입니다. 그러니 결정을 해 주십시오. 저희 방송에 합류해 주실 수 있습니까?”
“…….”
직접적으로 묻자, 또 그의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도 같다가, 결국 다물고 커피만 한 모금 더 마셨다.
다람쥐 쳇바퀴인가.
나는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팬심도 차갑게 끊고 말했다.
“아직도 결정 못 하시겠다면, 외람되지만, 방송을 위해 여기서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강 PD.”
“예. 말씀하세요.”
“그게…… 하아, 젠장.”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결국 커피를 죄다 마셔 버렸다.
인터폰으로 한 잔 더 시키는 그를 고구마 세 개는 먹은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정말 이 사람의 진심은 뭐지? 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왜 이렇게 결정을 못 내리는 거지?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면서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긁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확률을 띄웠다.
정말 순수하게, 그가 이 기획을 같이하고 싶어 하는가에 관한 확률이었다.
[95%]
높다. 엄청.
그럼 대체 뭐가 그의 결정을 막고 있는 것일까.
이쯤 되자 답답함보다 호기심마저 들었다. 나는 상체를 숙이며 그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냥 솔직하게 여쭙겠습니다, 감독님.”
그가 퀭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영화 제작에 저희가 간섭을 할까 봐 걱정되시는 겁니까?”
협력사가 되면 제작 투자 형태의 이야기도 오갈 가능성이 있다.
영화 제작에 있어 누군가가 간섭하는 것이 싫어 영화사를 세울 정도의 사람이니, 그것을 우려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95%]
확률이 전혀 변동이 없는 것을 보니 진심인 모양이었다. 우리 방송에 대한 의욕에 흔들림이 없다.
“그럼 실례될지 모르지만, 혹시 영화사에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 그럴 리가. 우리 회사는 건실해. 그건 자부하고 있지.”
[95%]
“그럼…….”
나는 머릿속으로 곱씹다가, 물었다.
“대본에 문제가 있습니까?”
“…….”
그의 표정이 굳었다.
[76%]
그 순간, 확률이 단숨에 하락했다.
너무나 극명한 반응에, 금완승 감독의 머리 위를 봤다가 입을 쩍 벌릴 뻔해서, 서둘러 시선을 똑바로 돌려야 했다.
대본? 대본에 문제가 있다고?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떡밥을 던졌다.
“만약 그런 문제라면…… 예, 저희가 알아본 다른 영화사에 좋은 대본이 있는데, 그냥 그쪽으로…….”
“무슨 소리야! 내 대본이 더 좋아! 구멍만 메우면!”
발끈해 소리친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3초쯤 뒤에 헉 하는 얼굴이 되어서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
“…….”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여직원이 다시 커피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놓고 사라진 다음에 나는 다시 물었다.
“감독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
“속이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64%]
[71%]
[82%]
아주 머리 위에서 확률이 요동을 치고 있다. 완전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폐부 깊은 곳에서 한숨을 끌어올려 내쉰 그가 이야기했다.
결론은, 대본이 맘에 안 들어서가 맞았다.
준혁이 형님은 대본을 맘에 들어 했지만, 정작 그 대본을 작성한 금완승 감독은 대본의 완성도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더 고치고 싶고,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배우는 맘에 들어 하고, 방법은 잘 안 떠오르고.
그래서 그동안 계속해서 갈팡질팡 변죽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
진상을 듣고 나니 차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변덕이 심한 성격인 거야 이미 익히 들었고 경험도 했다.
한데 설마하니 그 변덕의 이유가 작가주의적 마인드에 의한 것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금완승 감독의 대본이 좋은 평가를 받아 온 것은 이러한 고민들을 수없이 수정하며 완성한 데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어쨌든 십 년 묵은 체증이 활명수 먹고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부끄럽구만. 이거 참.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정말 부끄러운 건지 그의 얼굴이 붉었다. 헬쓱한 인상도 이제 왜 그런지 이해가 되어서 그런지 측은해 보였다.
“대본이 그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준혁이 형님은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서요.”
“음…… 뭐랄까, 만든 사람만 알 수 있는 약점이라고 해야 할까. 그걸 보충하고 싶은데 잘 떠오르질 않아서…….”
영화 대본은 잘 몰라도, 가장 가까운 곳에 방송 작가를 두고 있어서 어느 정도 이해는 될 것 같았다.
예능 프로그램도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세상이라, 그만큼 작가의 몫이 중요하다.
영화와는 달라도 스토리를 다루는 것은 같으니, 그의 심정이 이해는 되었다.
왜 준혁이 형님 없이 나만 불렀는지도.
“오늘 저만 오게 한 것은, 결국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셨던 거죠?”
“……맞아. 많이 망설였지만…….”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냐는 듯한 눈으로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대본, 저도 한번 볼 수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