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엘리베이터
준혁이 형님과는, 금완승 감독과 자리를 한 번 더 가지자는 협의를 해 둔 상태다.
영화사도 믿을 만하고 대본도 괜찮은데, 문제는 금완승 감독 본인.
그래도 방송을 하고 싶어 하는 의사는 있어 보여 마지막으로 만나 보자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다.
다만 아직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는 않은 상태였는데…… 금완승 감독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이런 문자가 이 상황에서 굳이 내게 왔다는 것은, 준혁이 형님이 아직 그에게 미팅 건을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리라.
침대에 앉아서 잠깐 메시지를 내려다보다가 한 글자 한 글자 터치하며 답장을 작성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더 연락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다음 주에 시간 괜찮은 날 알려 주시면 류준혁 배우와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썼나 하고, 보내 놓고도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답신이 돌아왔다.
[금완승감독: 난 언제든 괜찮아요 담주는 계속 회사에 나와 있을 거라]
[금완승감독: 대신 우리끼리만 좀 봤으면 하는데]
우리끼리만? 준혁이 형님 빼고?
그가 없이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건가.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완승 감독에 대해서는 준혁이 형님이 더 잘 알겠지만, 오히려 관계가 없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변덕의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은 비즈니스.
사적인 관계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화요일 오후에 사무실로 찾아뵙겠습니다]
[금완승감독: 알았어요~~ 시간 비워둘게요~~]
아재 냄새 풀풀 나는 답장을 받고서야 짤막한 대화가 끝났다.
나는 이걸 준혁이 형님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대화방을 켜서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결국에는 그냥 앱 자체를 껐다.
형님 없이 둘이서만 보려는 이유가 있을 테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사후 보고를 하자.
* * *
주말 동안 민희와 데이트는 하지 못했다.
민희가 다음 시즌 사전 조사를 위해서 권민헌 선배와 지방으로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당잠사 다음 시즌은 국내편으로 준비 중이라나 뭐라나.
그 탓에 간신히 통화만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었다.
내 주말은 박주영 선배 대신 채워 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주말에 불러내는 바람에 쉴 기회를 놓쳤다.
“야, 이 기획 어때 보이냐.”
만나고 보니 나를 불러낸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몇 개의 기획안을 내 앞에 늘어놓고 골라 보라는 식이었다.
“저 이제 서브 아닌데요.”
“알아. 친한 후배가 선배 좀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 촉새 촉 좀 믿어 보려고.”
뻔뻔한 태도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도시인> 팀에서 떠난 뒤에 서브가 새로 들어오고, 팀 자체가 잘 굴러가고 있었다.
매회 시청률도 안정적이니, 이제는 완벽하게 주말 레귤러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매주 돌아가는 방송이란 게 쉽지는 않아서, 다음 주 촬영 기획과 동시에 다음 달, 혹은 몇 달 뒤의 기획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내 앞에 있는 기획안들도 그런 것들이었다.
대신 몇 달짜리 규모들이 있어서, 한번 시작하면 대규모 프로젝트가 되니 내 의견을 구해 보고 싶었다는 모양이다.
“작가들이 워낙 난리여서 말이야. 선배가 돼서 후배 덕 좀 보고 오라더라고.”
“잘못돼도 책임 안 집니다, 저.”
“그럼요, 당연한 말씀입죠.”
그의 아부 떠는 말투에 다시 피식 웃고서, 기획안을 살폈다.
“사실 최근 방송들 보고 떠올린 게 있긴 합니다.”
“오, 그래? 어떤 거?”
“여기, 이런 거요. 시청률은 이제 안정적이니까 좀 더 시민 참여가 가능한 기획을 해도 되지 않을까요.”
기획안 중에서 나는 시민들을 참여시켜서 진행하는 기획을 선택했다.
[85%]
대화를 하는 동안 일일이 AGD 앱으로 확률을 보고 있었다.
그중, 화제성을 일으킬 확률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 준 기획이었다.
곧장 박주영 선배가 이 기획을 맘에 들어 할 확률을 보자,
[94%]
감언이설로 꾀어내서 나머지 확률을 몽땅 채우고 싶을 만한 수치가 그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선배. 사실 이 기획 하고 싶죠?”
“……무, 무슨 소리야!”
뻔히 속이 보이는 얼굴로 선배가 화들짝 놀랐다. 머리 위의 확률을 보지 않더라도 8K 올레드 패널처럼 뻔해서 또 웃음이 터져 한참을 웃었다.
결국 그한테 한 대 맞을 뻔하고 나서야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단풍놀이 핫플레이스들을 돌면서, 놀러 온 시민들과 같이 미션을 진행하는 형식이니까 아마 반응은 이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음음.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역시. 역시 이게 가장 하고 싶었던 거였구나.
AGD 앱의 확률이 가장 높은 기획을 하고 싶어 한 거니, 그의 심미안이 정확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박주영 선배는 점점 진화하고 있구나.
괜스레 뿌듯해져 술잔을 나누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나서 월요일.
[박주영선배: 니가 꼽은 걸로 가기로 했다 땡큐함]
[박주영선배: (엄지척)]
[박주영선배: 전에도 말했지만 고민 있으면 불러라 맛나는 술 사줄게. 물론 값싸고 좋은 우리 소주로.]
주말에도 본인이 선배라고 술값 내셨으면서 어쩜 이렇게 후배를 아끼실까.
꼭 그러겠다고 답신을 보낸 다음에, 정민우 팀장 자리를 보았다.
출근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오지 않았다.
“<뮤직스케치> 팀으로 가셨나.”
아침 회의가 있을 텐데 그전에 팀 사무실을 들르는 것은 늘 있는 일.
난 기다릴까 하다가, 금완승 감독 건을 빨리 진행하자 싶어 그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는 신호현 이사가 있었다.
먼 곳에서 보거나 스쳐 지나가는 정도라서, 이렇게 눈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서 나는 그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간신히 인사하자, 그가 빈 엘리베이터를 눈짓하며 말했다.
“안 타나?”
“먼저 내려가십시오. 저는 다른 엘리베이터 타면 됩니다.”
“뭘 또 그렇게 내외하고 그러나. 같은 회사 식구끼리. 괜찮으니까 타.”
그가 굳이 닫히는 문을 버튼을 눌러 잡아서, 나는 우물쭈물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단적으로 말해 매우 긴장됐다.
그가 현준영 스캔들과 엮여 있음을 내가 아는 줄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관심조차 없을 수도 있고.
표정만 봐서는 전혀 생각을 읽을 수 없어, 초조하게 패널의 숫자만 노려보았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만든다고.”
그래서 그가 툭 내뱉은 말에 딸꾹질이 터질 정도로 놀랐다.
“……예,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획사랑 연계도 해야 할 거고,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힘들겠구먼.”
뭐지, 이 따뜻한 분위기는.
그가 태연한 어조로 그렇게 이야기해서 나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일단 대꾸를 했다.
“쉽지는 않지만, 하나씩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 서 국장한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 내에서 다 반대하고 있는 건 아니야. 이 시국이라서, 나는 더 기대하고 있어.”
“이사님……께서요.”
“내가 예능 쪽을 관리하지는 않지만 보는 건 좋아하거든. 강 PD가 실력 좋은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으니, 좋은 프로그램 만들기를 기대하겠네.”
어정쩡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그는 1층으로 가는지 미동도 하지 않아서,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나와 다시 인사했다.
“응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아 참.”
그가 문이 닫히지 않도록 손으로 붙잡더니, 덧붙였다.
“영화사 구하는 데 애먹고 있다지? 혹시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게. 내 방은 언제나 열려 있어.”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나는 닫히는 문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느낌.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현준영 PD랑 똑같네.”
현준영의 스캔들 기사가 나기 전날. 그가 불러내서 술집에서 만났을 때, 그의 태도에서 느꼈던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었다.
“젠장, 확률을 봤어야 하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 확인할 기회였는데, 아쉬웠다.
신호현 이사가 이미 떠난 엘리베이터를 노려보고서, 나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정민우 팀장은 예상대로 <뮤직스케치> 팀 사무실에 있었다.
“류 배우 없이 둘이서만 만난다고?”
“예. 긴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같이 가는 것도 좀 아니겠네.”
“다녀온 후에 필요하면 요청 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도 국장님께 보고해 놓을게. 왕 이사님도 궁금해하시고.”
“……왕 이사님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절로 얼굴이 굳었다.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이 술을 마시면서 위로를 해 주긴 했지만, 왕이범 이사 눈 밖에 날 것 같은 기분이 며칠 만에 나아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 강 PD 진행하는 거 디테일하게 보고하라고 하셨거든.”
“다녀와서 일이 틀어지면…….”
“그것도 보고가 올라가겠지. 그래도 뭐, 진행 자체를 막자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우리가 있잖냐, 하고 정민우 팀장이 장난스레 엄지를 들어 주어서, 나는 그냥 힘없이 웃고 말았다.
왕이범 이사는 압박을 주고, 신호연 이사는 괴상한 응원을 해 주고.
……방송사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분명 좋은 일일 텐데, 그것이 마냥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뭐랄까, 분명 내 방송인데 내 맘대로 만드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안다.
지금 내 위치에서 이 점을 답답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건방진 일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방송사 안에 있는 내 처지가 참으로 답답하게 다가왔다.
“응? 표정이 왜 그래. 고민 있어?”
“……아닙니다. 그럼, 일단 그렇게 다녀오겠습니다.”
정민우 팀장 앞에서 얼굴이 어두워질 뻔해서, 억지로 웃으면서 물러섰다.
* * *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장 먼저 협력을 약속한 회사는, 누가 뭐라 해도 플래티넘이었다.
다만 현재로서는 이 프로젝트 진행에 있어 플래티넘이 가장 소외되고 있었다.
오늘은 사실 그래서 플래티넘 사람을 만나서 진행 상황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 또 향후 진행을 위한 사전 협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 정기 회의를 마치고 나온 정민우 팀장에게 그 관련으로도 확인을 하고서, 플래티넘으로 가 미팅을 끝마치자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그래, 그럼 거기서 바로 퇴근해.”
정민우 팀장에게 전화로 보고를 하자 그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당장 들어가서 정리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라서 그 지시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전화를 끊었다.
“효명이한테 연락이나 해 볼까…….”
요새 너무 일과 일의 연속이라서 효명이와의 연락이 다소 소홀해진 감이 있었다.
여자 친구가 출장을 가 있으니, 바람을 피우는 기분으로…….
“내가 미쳤지, 뭐라는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태클을 걸면서 효명이에게 전화를 걸어보려 했다.
그보다 한발 앞서 스마트폰이 진동을 했다.
『신동욱실장』
영화사 바람처럼의 신동욱 실장이었다.
사이사이 메시지를 보내 적극적인 어필을 하기는 했는데, 전화가 오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예, 여보세요. 강대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바람처럼의 신동욱입니다. 전화로 연락드리는 건 오랜만입니다.”
“그렇네요. 자주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연락을 드려야죠. 퇴근 시간 다 되었는데, 칼퇴근 하십니까?”
저쪽도 방송업계 사정은 잘 알아서, 칼퇴근이 참 요원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전 미팅에서 한 적이 있었다.
“오늘은 놀랍게도 칼퇴근입니다.”
“오…… 축복받은 날이군요. 제가 타이밍이 좋았네요. 바로 집에 들어가실 겁니까?”
“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 순간,
“이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다음에 한번 뵈면 좋은 곳에서 대접하겠다고. 저도 오늘 일찍 마치는 날이라서요, 혹시 어떠십니까?”
그가 그렇게 은근한 어조로 내 의사를 물어왔다.
“제가 잘 아는 데가 있습니다. 한잔하시면서 방송에 대해 좀 더 조율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