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똑바로 만들어야 할 거야
“……그럼 이상으로, 정기 이사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이사진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왕이범도 분위기에 맞춰 손뼉을 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한 자리였다.
일개 PD로 시작해 NBS의 이사 자리까지 오른 인물로서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사회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번 이사회에서는 내년 상반기까지의 대략적인 청사진이 세워졌다. 물론 이사회에서 논의했다고 끝은 아니었다.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두고 이사들은 내년까지의 계획을 세우고, 해당 부서에 전파하고, 실무 라인을 만들고…… 할 일이 태산처럼 남아 있었다.
이사들의 움직임은 바빴다.
왕이범도 친한 이사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가려 했다.
“왕 이사.”
그런 그를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신호현 이사였다.
순간적으로 왕이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일 상대하기 싫은 작자와 마주치자 잠깐이나마 속내를 감추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왕이범이 돌아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 이사님.”
“그러게 말이야. 같은 층 쓰는 사이에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우니 원.”
그의 곁에는 흔히 신호현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몇 명의 이사와 비서가 보였다.
노골적인 시선을 보낼 순 없으니 왕이범은 더욱 표정을 다듬었다.
“해외 업체 인수 건, 성사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걸 뭐 내가 잘해서 그런 건가. 직원들이 고생해 준 덕에 잘된 거지. 거기다 다 NBS에 도움이 되는 거니까 그 수혜는 우리 왕 이사도 같이 받는 거 아니겠어?”
신호현이 이사로 온 이후 여러 사업을 벌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해외 제작사의 인수였다.
이번에 딜이 성사된 곳은 태국이었는데, 그쪽 제작사를 이용해서 베트남 현지 TV에서 NBS 프로그램이 원작인 프로그램의 개발 및 방송 등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의 제안으로 성사된 자회사 인수 등을 합쳐서, 그가 몇 달 사이 이뤄 낸 것은 현준영과 관련된 실패를 메우기에 충분했다.
“그러게요. 제가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왕이범은 꼬이는 속을 숨기고, 그렇게 인사치레 말만 남기고 돌아서려 했다.
“왕 이사, 그런데 말이야. 본부장은 정해졌나?”
“……아직 사람을 골라 보고 있습니다.”
“서인하 국장은 거절했다며. 차선은?”
오늘 정기 이사회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뻔했다.
왕이범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깊게 내쉰 뒤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누구를 골라도 다 아까운 인재라서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잘 골라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혹시 인재가 없다면 내가 수소문을 좀 해 보려고 했지. 내부 인력만이 답은 아니잖아. 그렇지 않나?”
그 질문에 주변 이사들이 맞습니다, 옳습니다 등등 앵무새처럼 대답을 늘어놓았다.
왕이범은 표정을 굳히고 딱딱하게 말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이니,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날카로운 말투를 대놓고 드러냈지만, 신호현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그가 그렇게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이사들을 이끌고 왕이범을 지나쳤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돌아서서 왕이범을 보았다.
“아, 맞아. 이 이야기를 안 했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만든다고 했던가? 그, 강대한이라는 친구가.”
“……예. 그렇습니다만?”
“요새 이쪽 업계가 워낙 뒤숭숭하잖아. 그 와중에 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하니 다들 말이 많더라고. 있는 기획도 엎고 있는 중인데 만들어도 되겠냐고.”
왕이범은 다시 욱할 뻔했다.
그 일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니었다.
현준영 사건이야 백번 양보해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한다 한들, 그런 현준영을 놓고 <언더커버 싱어>에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게 바로 저 신호현이었다.
현준영의 스캔들이 터지자 바로 꼬리 자르기를 해 놓고, 이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애써 숨기며 왕이범은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정식으로 통과시키진 않고 있습니다. 때를 좀 기다릴 필요도 있으니…….”
“아니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이런 때니까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거지.”
“예?”
의외의 이야기라 왕이범은 무심결에 소리를 냈다. 신호현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웃음을 짓고서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아, 우리 NBS가 어떤 방송사인가. 비공중파의 터줏대감이자 선두주자 아닌가. 아무리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여론이 나쁘기로서니 그것에 겁먹고 젊은 PD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한다면 그건 또 안 될 말이지.”
“아, 예. 그건…… 맞습니다.”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나도 응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어. 이 위기를 잘 넘긴다면 또다시 NBS의 이름이 높아질 테니.”
신호현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말이 계속해서 튀어나와 왕이범은 얼떨떨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듣자 하니 여론 때문에 광고 협의도 잘 없다고 하던데. 영화사 섭외도 잘 안 된다 그러고. 맞나?”
“예…… 그렇게 보고 받았습니다.”
“광고 쪽은 내가 좀 알아봐 주겠네. 영화사도 혹시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내가 알고 있는 곳을 소개할 테니.”
“가, 감사합니다.”
“이 친구도 참. 감사할 일인가 이게. 다 NBS를 위한 일인데.”
신호현은 대범한 웃음을 터뜨려 보이고서는 이사들을 이끌고 썰물처럼 사라졌다.
왕이범은 대체 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회의장 정리를 끝낸 직원이 그를 부르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회에서 혹시 무슨 일 있으셨나요?”
혼 빠진 얼굴로 가장 늦게 나온 왕이범을 걱정하는 비서를 보고, 왕이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계속해서 신호현의 말을 곱씹었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광고 협의.
영화사.
그 정보들을 신호현이 알고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굳이 이 시점에 짚고 가는 것은, 아무래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현준영 사건 이후로, 예능 제작만은 왕이범이 전권을 잡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전까진 다른 이사들이 관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신호현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찝찝한데.”
굳이 다른 이사가 충고나 조언을 했어도 불편할 시기인데, 그 대상이 신호현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왕이범은 자리로 돌아와 잠깐 고민했다가 서인하 국장을 불렀다.
서인하에게는 굳이 숨길 일이 없었기에, 이사회 결정사항을 전하면서 신호현 건도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이면 단순한 응원이라고 보이겠지만…….”
“신 이사라면 말이 다르지.”
서인하도 같은 반응이었다. 허나 그는 고개를 젓고 다시 말했다.
“이번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서 다른 이사들 반응이 안 좋다고 했으니, 신 이사가 좋게 생각해 주고 있다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용하라고?”
“솔직히 시기가 안 좋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강 PD도 알고 있고요. 그렇지만…… 신 이사 말대로, 그렇다고 눈치를 본다면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 숫자가 확 줄어들 겁니다.”
그 판단은 왕이범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조금 더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 PD 지금 어디 있지? 영화사 미팅 갔나?”
“그렇긴 한데, 좀 전에 정 팀장이 복귀한다고 했으니 연락해 보겠습니다.”
서인하는 왕이범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민우에게 전화했다. 타이밍 좋게 사무실에 복귀하여 전화를 받은 정민우에게 강대한을 곧장 이사실로 올라오게 지시했다.
“금방 올 겁니다.”
“그래. 자네는 내려가 봐.”
“예? 독대하시려고요?”
왕이범이 자신 없이 강대한을 만난 적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서인하가 다소 당황하자 왕이범이 눈을 부라렸다.
“왜, 네 새끼 내가 뭐라고 할까 봐 그래?”
“아이고, 선배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냥 좀…… 옛날 생각 나는 표정이시라 그렇습니다.”
같은 예능 PD로 일하던 시절, 왕이범은 서인하를 참으로 혹독하게 가르쳤다.
그때 엄하게 꾸짖던 얼굴이 언뜻 보여, 서인하는 사실 진심으로 강대한이 걱정되었다.
“걱정 마. 너처럼 지지리도 못했던 것도 아니고, 혼내려는 거 아니야. 그러니 빨리 썩 사라져.”
왕이범이 손을 휙휙 내저어 보이자, 서인하도 결국 묵례를 하고 물러났다.
강대한이 나타난 것은 10분쯤 지나서였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문을 연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왕이범의 사무실로 올라오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하지만 첫 번째에 비해, 이번에는 독대였다. 연락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서인하나 정민우가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예능5팀 사무실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측은하게 바라만 볼 뿐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강대한은 타는 목마름 같은 것을 느끼면서 왕이범의 데스크 앞에 섰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강 PD. 요새 많이 바쁘다고.”
“아닙…… 아뇨,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보니 조금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중간에 말을 바꾸는 강대한의 태도에 왕이범이 피식 웃었다.
“그래,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말이지. 영화사 미팅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잘 되었나?”
“영화사 후보군을 세 곳으로 줄인 상태입니다. 보시겠습니까?”
저번 만남 때 준비한 기획서가 효과가 좋았음을 기억하고 있기에, 강대한은 이번에도 기획서를 출력해 가지고 올라왔다.
우이독경, 처음처럼, 스마일박스. 세 군데의 영화사가 이름을 올리고 있는 기획서였는데, 가방에서 그것을 꺼내려고 하자 왕이범이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런 실무적인 건 서 국장이 알아서 하는 거고. 할 말이 있어서 오라고 한 거야.”
“……예, 경청하겠습니다.”
가방을 내리고 손을 모으는 강대한을 왕이범이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난항이라고 들었어. 그렇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만들고 싶다고 하는 거고.”
강대한은 어쩐지 이 자리에서 부정적인 말을 들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얼굴이 절로 굳으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왕이범을 직시했다.
왕이범 또한 그런 강대한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그 방송, 똑바로 만들어야 할 거야.”
“……반대하는 거 아니셨습니까?”
“그래, 들었겠지만 난 지금도 부정적인 편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안 될 프로그램이란 것도 아니지.”
왕이범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대한보다 키는 작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오히려 더 강했다. 그런 게 일선에서 일하다 이사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의 기세임을 강대한은 새삼 느꼈다.
“회사 밖에서도, 이사회에서도 관심이 많아. 그러니까 어쭙잖게 할 거면 시도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게 맞아. 하지만, 기왕 만들기로 했으면 똑바로 만들어야 하고. 알겠어?”
왕이범은 굳이 말을 가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그럴 지위도 아니었기에.
강대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호승심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무턱대고 질러대서는 안 되는 자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옅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눈을 다시 뜨고 대답했다.
“똑바로, 제대로 만들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그래, 지켜보도록 하지. 나가 봐.”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강대한이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한참 뒤에야 왕이범은 다시 의자에 앉아 깊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괜히 젊은 피를 압박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PD로서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몰랐던, 다양한 방송사 내의 구도.
이사가 되고 나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하지만 익숙해져야 하는 그 구도들 때문에 새싹 하나가 끊어지는 결과가 일어나면 안 될 텐데.
내가 그 싹을 자른 게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게 둬선 안 되고.”
그러면서도 왕이범은 뒤늦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필 이사가 되어 가지고.”
* * *
왕이범 이사를 만나고 나서, 금요일 저녁에는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이 위로주를 사 주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굳이 물어보진 않아서 나도 이야기하진 않았는데,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많이 마신 것은 아닌데도 일찍 취해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손수 잡아 준 서인하 국장이 마지막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대한아. 다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 하려고 하는 방향으로만 가라. 그럼 된다.”
진한 정이 느껴져서, 술이 오르는 중에도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서 헤어졌다.
토요일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술에 취해 괜히 이 소리 저 소리 다 늘어놓은 것 같아서, 두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고 스마트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때마침 도착한 메시지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금완승감독: 나 금완승입니다. 토요일에 미안한데, 담주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