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난항
금완승 감독.
액션 영화 전문 감독임에도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하나하나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24세 이상만 봐야 할 것 같은 잔혹한 영화가 있는 반면, 전연령의 코믹 영화도 있다.
영화감독 중에서도 이 정도로 전천후인 사람은 드물었다.
그에 관해서 준혁이 형님이 이전에 해 준 말이 있었다.
“금 감독님 본래 성향은 피가 쏟아지고 육편이 흩날리는, 그런 잔혹한 연출에 가까워.”
“헐. 그럼 그동안 찍으신 전연령 영화들은요?”
“투자사의 간섭. ‘우이독경’ 세우기 전까지는 다른 영화사에 소속되어 있기도 했으니 맘대로 만들 수 있는 제작 환경도 아니었고. 억지로 만든 것에 가까워.”
그 말을 듣고 딱하다기보다는 감탄이 나왔다.
“그 간섭을 받으면서 억지로 만들었는데, 그 영화들이 다 괜찮다니. 그분 대단하시네요.”
“재능이지. 저주받은 재능이라는 말도 있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준혁이 형님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주받은 재능……?”
“뭐, 나중에 만나 보면 알겠지만…… 사람이 좀, 변죽이 많아.”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만나고 보니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난 아직 기획서도 본 적 없고. 아니 뭐 영화판에서는 기획서 없이 시작되기도 하고 그러긴 하는데, 방송은 또 다르지 않수?”
“기획서……는, 네, 지금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숨길 게 없어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늘 가져오지 못한 건 이사님 보고에 올라간 상태라서요. 통과되는 대로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꼭 나한테 보여 줄 필요 있나.”
손을 내저으며 또 능청스럽게 구는데, 좀 전의 표정과 또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준혁이 형님을 슬쩍 눈짓했다. 지금 이게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냐고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형님이 커피를 목을 축이듯 마시고 이야기했다.
“금 감독님. 지난주에는 괜찮아 보인다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거야 근데, 이렇게 대놓고 진지하게 진행해 보자고 한 것은 아니잖아.”
쯧쯧 혀를 찬 뒤, 그가 잠깐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대본처럼 보였다.
“이 대본, 류 배우가 꼭 하고 싶다고 해서 맡아 두긴 했는데, 지금 같이하자는 방송에 따르자면 또 내년에나 개봉할 수 있는 거잖아.”
“어차피 올해는 금 감독님 스케줄은 다 꽉 차 있지 않습니까.”
“나야 그렇지. 그런데 우리 영화사에 감독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입봉 기다리는 애들도 많고.”
금완승 감독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강 PD님도 얼마 전 입봉하셨으니, 그 마음 아주 잘 이해하실 거고.”
“……예. 그럼요.”
“영화감독에게도 입봉은 인생을 좌우하는 큰 기회라서 말이우. 이 대본 기다리는 애들이 많은데, 걔들한테 내년까지 기다리라고 할 순 없잖아.”
마지막 말은 준혁이 형님을 향한 말이었다.
나는 그때 눈치챘다.
준혁이 형님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금완승 감독도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해도, 그의 시야에 든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납득되기도 했다.
이제 입봉작 하나, 서브작 하나 정도 가진 예능 PD가, 천만 영화 감독에게는 얼마나 존재감이 없을까.
그리고 또 슬퍼지는 일이었다.
금완승 감독을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준혁이 형님과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축객령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미팅이 있던 금완승 감독이 시간을 내주었던 것이고, 시간이 되어 작별을 한 것이다.
“미안하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준혁이 형님이 그렇게 말했다.
“왜 형님이 사과하세요.”
“아니, 분명 지난주에는 아주 좋다고, 해 보자고 하더니 오늘은 말이 바뀌니까. 전에 이야기한 게, 저런 면 때문이야.”
변죽이 많다는 의미를, 나는 아주 단적으로 깨달았다.
준혁이 형님 데뷔 때부터 알고 지낸 감독인데도 아직 단 한 번도 같이 작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 저런 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감독과의 작업도 생각했다면, 이번 영화는 대체 대본이 얼마나 좋은 걸까.
한번 보고 싶은데 프로그램 제작이 성사되기 전에는 힘들겠지.
차에 오르면서 한 번 더 물어봤다.
“저러다가 또 갑자기 맘에 든다고 해 보자고 할 가능성도 있으실까요?”
“많지. 아주.”
그는 그렇게 한숨 섞인 대답을 하고서, 연락하겠다고 먼저 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그 길로 회사로 복귀해, 정민우 팀장에게 이 과정을 보고했다.
“그 감독님, 이야기는 들어 봤는데 정말 그런 분인가 보네.”
“금완승 감독님에 대해 좀 아시나요?”
“자세히 아는 건 아니고. 금완승 감독님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 까칠한 사람이구나, 그 정도는 되어야 그런 영화를 만드는 거구나 했는데, 강 PD 이야기 들으니 그런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정민우 팀장은 고심하듯 턱을 쓰다듬다가 일어섰다.
“국장님 뵙고 올게. 일단 이야기에 따라서 밀어붙이든 하는 걸로 하자.”
“아뇨, 굳이 그렇다면 금완승 감독님 아니어도 됩니다.”
내 말이 의외였는지 정민우 팀장이 행동을 멈칫했다.
“금완승 감독이랑, 우이독경이랑 하겠다는 거 아니었어?”
나만이 아니라 준혁이 형님이랑 이야기해서 정한 것이었다. 우이독경의 영화라면 퀄리티도 믿을 수 있고, 준혁이 형님을 통해 어느 정도 이빨도 통한다. 그런 선택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을 봐서는, 그게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강 PD가 한번 정한 것을 그렇게 바꾸는 모습이 흔하지 않아서 그래.”
원래 한번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잖아, 라고 덧붙이는 정민우 팀장의 말에 괜히 민망해졌다.
일단 지르는 것이 나의 장점이라고 전에도 말했던가.
사실 그건 정확한 것 같지만, 이번만은 그 ‘지름’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제 자기 의견을 바꿀지 모르는 사람하고 일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들 것 같아서요.”
오늘 나는 드디어 확률 보기를 사용했다.
대상은 인물, 금완승 감독.
그가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그를 설득할 수 있는 확률’이 변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89%]
[67%]
[58%]
[92%]
이 숫자들이, 긴 시간 동안 일어난 변동도 아니다. 단 몇 분 사이. 같이 커피를 마신,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이었다.
금완승 감독의 머리 위에서 실시간으로 변하는 확률을 보고 있으니, 변죽이 들끓는다는 표현이 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지금껏 만들어 왔던 영화가 정말 작가주의적 성향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래서 제작사의 간섭이 많았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딱 한 번 만난 사람이라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순 없었지만, 나는 돌아오는 길에 결론을 내렸다.
“괜찮다면 다른 제작사도 찾아보겠습니다. 준혁이 형님도 이해할 겁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강 PD한테 융통성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아 보이긴 하는데, 너무 갑자기 변하면 무서워. 알지?”
내가 멋쩍게 웃어주자, 그도 따라 피식 웃고서는 국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서인하 국장의 오케이가 떨어져서 나는 본격적으로 다른 제작사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 * *
[76%]
초안 정리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짓자, 프로그램 성사를 위한 확률이 떠올랐다.
기획이 정식으로 통과된 것이 아니다 보니 아직도 80%를 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괜찮다고 봐야 하는 건, 영화 제작사 측은 아직도 확정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우 계약과 투자를 맡아 줄 플래티넘과는 서인하 국장 선에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나도 그 상황을 공유받고 있다.
다만 영화 제작사는 ‘우이독경’ 이후로 여러 방향에서 추천을 받아 초안에 포함시켰지만 마땅히 확률이 나아진다거나 하진 않았다.
“드라마 쪽은 어떨까요.”
실제로 정민우 팀장은 차라리 드라마국이랑 자리를 만들어서 의사를 타진해 보자는 의견을 내비쳤다.
NBS 내라면 오히려 성사될 확률이 더 높으니까.
하지만 그 의견은 준혁이 형님이 고개를 저었다.
“드라마는…… 아무래도 제작 기간과 환경이 문제지. 영화는 만들어 놓고 배급을 잡아도 되지만 드라마는 아니잖아.”
배급이 잡히냐는 것도 문제지만, 그건 또 준혁이 형님의 자신감일 것이다.
어쨌든 나도 그 의견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일단 내가 아는 몇 군데 영화사를 좀 더 찾아보고 있어. 윤 매니저 통해서 따로 이야기 들어오는 곳도 있다고 하고.”
준혁이 형님이 영화가 아닌 일로 영화사들 미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우이독경 미팅 이후로 여기저기 의사를 타진해 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 소문에는 나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류 배우랑 강 피디가 또 뭐하나 한다는 소문 있던데?
―그건 또 무슨 루머야
―나님 영화사에서 일하는데 오늘 류준혁 왔다감ㅇㅇ 거기서 강 피디 이야기도 나옴
―당잠사 말고 또 예능하나?
―언커싱 시즌2?
―└언커싱을 왜 영화사에서 이야기하냨ㅋㅋㅋ
―└언커싱 영화화 하나 보짘ㅋㅋ
류준혁 갤러리에 올라오는 글을 민희가 보여준 적 있었다. 여전히 이런 쪽으로는 정보가 밝았다.
올라오는 글들은 워낙에 루머성 글들이 많긴 했지만, 가끔 그렇게 나름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글도 있었다.
그 글을 준혁이 형님과 나누고, 같이 실없이 웃은 뒤에 그가 다시 말했다.
“대본 들어온 것 중에서도 일단 골라 보고 있긴 한데…….”
“딱히 맘에 드는 게 없으신 거군요.”
“뭐, 그렇지.”
그쯤 되자 나는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우이독경의 그 대본, 어떤 대본이에요?”
“내가 말 안 해 줬던가? 아, 아직은 오프더레코드라고 이야기 안 했구나.”
준혁이 형님은 잠깐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댔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 못 해 줄 건 없지. 뭐냐면 말이야…….”
간단하게 설명해 준 그 시나리오는, 은퇴한 첩보요원이 정착한 시골에서 일어나는 국가 기밀 연구와 관련된 액션물이었다.
SF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고, 등장하는 소녀와 주인공의 관계, 그리고 주인공의 옛 동료였으나 적이 되어 나타나는 라이벌과의 대결이 중심인 이야기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몇 년 전 대히트한 액션 영화 <이웃집 아저씨>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서정적 분위기로 그런 피칠갑의 액션을 그린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금완승 감독이 딱 잘하는 장르인데 대본도 잘 빠져서…… 어휴, 말하다 보니 정말 아깝네.”
목이 탄다는 듯 혀를 차는 준혁이 형님에게 맥주를 내밀었다.
요 며칠 매일같이 만나다 보니, 그냥 오늘은 간단히 술 한 잔이나 하자고 들른 호프집이었다.
방송국 앞이고 어둡다 보니, 대배우가 당당히 앉아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형님하고 이야기하고 오케이했을 때는 이렇게 어려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말이죠.”
“누군 아니겠어. 나도 그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영화나 드라마면 더 쉽게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기본이 예능이잖아. 내 욕심도 무시 못 하고.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네.”
준혁이 형님에게는 자신의 꿈으로 가는 첫발인 프로그램이 될 터였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향후 그가 만들 아카데미를 위한 것.
그러나 그 첫발이 땅에 디디기도 전에 지면이 흔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차례 더 한숨을 쉬다가 호흡이 맞아버려서, 우리는 피식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때였다.
지잉―
테이블 위의, 준혁이 형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힐끔 눈이 가는 바람에 패널에 떠오른 이름을 봐 버렸다.
『금완승 감독』
이 감독이 갑자기 왜……?
준혁이 형님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감독님.”
그렇게 말하며 그가 밖으로 나갔다. 호프집이라 시끄러우니 통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간 그를 기다리며 추가로 맥주 두 잔을 시켰다가, 통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먼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내 스마트폰도 진동을 한 것이 그때였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먹태를 씹으며 알림을 터치해 확인했는데,
[안녕하세요, 강대한 PD님. 영화사 ‘바람처럼’의 신동욱 실장이라고 합니다.
새 프로그램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 건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혹시 미팅 괜찮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