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영화 감독
다음 날, 5팀 사무실로 출근하는 나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해 오는 오지환을 만났다.
“저, 선배님. 저 <당잠사>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어, 정말?”
나를 메인 PD로 만나서 그런지 오지환은 계속해서 나를 PD라고 부르다가, 최근 들어서야 호칭을 ‘선배’로 바꾸었다.
나도 그 후로 ‘오 PD’라고 부르던 걸 편하게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박주영 선배 다음으로 5팀에서 가장 가까운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그래, 한 명이라도 <당잠사>를 같이 해 본 사람이 그 팀으로 가야지.”
오지환도 <당잠사> 제작 후반쯤에 지원으로 경험을 했다. 이번에는 레귤러 멤버가 되는 것이다.
“열심히 해. 권민헌 선배…… 배울 게 많은 분이야. 잘 배워.”
“하하. 네, 잘 부탁드려요.”
그러다가 나는 살짝 침을 삼키고, 덧붙였다.
“민희도 메인 작가로 다시 합류할 텐데, 잘 부탁하고.”
민희랑 사귀게 되면서, 김유미 팀장과 더불어 나를 은근히 신경 쓰이게 만든 존재가 바로 오지환이다.
오지환은 한때 민희를 좋아했고, 고백도 못 해 본 채로 차인 전적이 있다.
<언더커버 싱어>와 <당잠사>를 거치는 동안 마음은 이미 다 정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괜히 ‘원래부터 사귀고 있었던 건 아닌가?’ 같은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아, 그래요? 구 작가님과 도 작가님도 합류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작가님이 계속 메인이라면 아주 좋아 보입니다.”
그렇게 해맑게 대답했다가, 그가 아차 하는 얼굴을 만들었다.
“아, 두 분 선배님이 안 계신 건 물론 아쉬워요.”
“그렇게 덧붙이지 않아도 알아. 뭐, 이미 각자 다른 일 하는 거니까, 그쪽은 너한테 맡길게.”
내가 생각해도 어색한 태도로 그렇게 격려해 주자, 오지환은 끄덕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 사무실을 나갔다.
“정말 다 털어낸 것 같네…….”
그렇다면 괜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주변 눈치를 본 다음에 민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환이 당잠사 팀에 정식 합류라며. 방금 들었음]
[이민희: ㅇㅇ나도 구 작가한테 들었어. 서브만 정해지면 본격적으로 제작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행복)]
사귀기 시작하면서, 준혁이 형님과 준비하고 있던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민희에게 밝혔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제법 추궁을 당했지만, 어찌 될지 모르는 아이템이었고 그땐 사귀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무죄라고 항변했다.
민희도 사실 내 프로그램에 합류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 이전에 <당잠사>에 대한 약속이 있었기에 결국 큰 다툼 없이 정리는 되었다.
[이민희: 어제 이야기는 잘됐고?]
[잘됐다고 해야겠지? 정 팀장님이 지금 국장님 만나러 갔으니까]
까지 쳤는데 국장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정민우 팀장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국장실 들어감ㅇㅇ]
[이민희: ㅇㅇ ㅅㄱ]
[이민희: (파이팅)(하트)]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에 피식 웃은 다음에, 자료를 챙겨 들고 국장실로 들어갔다.
“……그래, 초안은 일단 이 정도로 보류해 두고. 영화사 쪽은?”
초안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보충되어 그나마 기획서라고 부를 만한 물건이 되었다. 그걸 본 뒤 서인하 국장이 그렇게 물었다.
“내일 뵐 것 같습니다. 준혁이 형님이 같이 가도 될 것 같다고 해 주셔서, 저도 그쪽으로 바로 출근할까 합니다.”
“알았어. 결재 올려.”
“저는 같이 안 가도 될까요?”
정민우 팀장이 그렇게 묻자, 서인하 국장도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내가 벌인 이 일이 꽤 스케일이 크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영화 제작사와의 미팅까지 이어졌는데, 나한테만 맡겨서 될까 하는 것이리라.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나도 조금 불안하긴 하다만.”
서인하 국장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덧붙였다.
“부담 없이 갔다 와. 적진을 살핀다고 생각하고.”
“적진이요?”
“그래. 성사되면 메인 PD를 시키긴 할 거지만, 그전까진 너는 나나 정 팀장의 정찰대 같은 존재야. 가서 정보를 모아서 와. 네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우리가 감당해 줄 테니까.”
아, 또 이렇게 훅 감동으로 밀고 들어오시네.
내 연차에서 힘들 수도 있는 일을 시키면서도, 책임은 자신들이 지겠다는 거니까.
“그렇다고 정말 적이라고 생각하라는 건 아니고. 알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에 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 기획…… 이사님도 괜찮아하십니까?”
“왕이범 이사님? 솔직하게 말해 줘, 꾸며서 말해 줘?”
“꾸며서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어쩌라는 거냐, 그 말은.”
서인하 국장의 태클에 나도, 정민우 팀장도 웃었다. 함께 킥킥대고서 서인하 국장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만들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부정적이야. 타사에서 했던 방송들 결과도 그다지 좋진 않았고, 가뜩이나 사회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잖아. 누구 씨 덕분에.”
그 말대로긴 했다. 현준영이 연관된 <스프K> 투표 조작 사건으로 시국이 영 좋지 않았다. 실제로 타 방송사에선 제작 준비 중이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전면 취소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가뜩이나 그런데, 연기는…… 노래나 춤, 이런 거에 비해서 사실 호응을 얻기도 힘들고.”
발연기가 아닌 다음에야 시청자들에게 바로 이해되기 어려운 영역이니까.
서인하 국장이 그렇게 덧붙였다.
누구도 제대로 걸어보지 않은 영역의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언더커버 싱어>도 BJ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결국 음악 경연 프로그램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은 또 다르다.
노래나 춤 같은 요소도 기획에 넣을 생각이긴 하지만, 중심은 어쨌든 ‘연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었다.
왕이범 이사의 우려는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사님은 일단 강 PD한테 해 보는 데까지 해 보자고 시켜 보래.”
“저요?”
“그래. 우리와 같은 마음인 거지. 강 PD 너를 열심히 굴려보고 싶은 마음.”
좀 전에 했던 감동을 다시 돌려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뒤, 굳이 숨기지 않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열심히 굴러라 이거군요.”
“우리가 시킨 거 아니다. 네가 하고 싶다고 가져온 거잖아. 성사되든 아니든, 일단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주겠다는 선배들의 마음이지. 그렇지 않아, 정 팀장?”
“암요. 국장님 말씀이 아주 옳습니다.”
이 오래된 선후배께서 아주 죽이 잘 맞아 후배를 고생시키려 든다.
좀 전 지환이랑 좋은 선후배 사이가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는데, 나도 나중에 박 선배나 지환이랑 이런 관계로 오래 볼 수 있을까?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애매한 기분으로, 나는 국장실을 나왔다.
* * *
다시 다음 날, 준혁이 형님이 오라고 한 주소로 찾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문을 열고 나오자, 때마침 반대편 라인에 주차되어 있던 중형차에서 준혁이 형님이 내렸다.
“뭐야, 차 있었어?”
“회사 차입니다.”
나는 당당하게 ‘호’ 자가 쓰인 번호판을 가리켰다.
“이제 밖으로 다닐 일이 많아질 테니까 차 좀 몰고 다니라고 정 팀장님이 하도 뭐라 하셔서요.”
“하하하. 그분, 그렇게 사람 갈구는 타입이었어?”
“며칠 전엔 형님 앞이라서 낯가리고 계셨던 겁니다. 서 국장님도 그렇고, 두 분이서 죽이 아주 잘 맞으세요.”
어제 있었던 일을 준혁이 형님에게 고자질하면서,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한이 네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거네. 좋은 일이야.”
“그렇겠죠? 저도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 노골적인 반응에 웃음을 터뜨린 형님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한 층을 통째로 쓰는 건지, 엘리베이터 앞에는 통 유리문 하나만 존재했다.
그 위에, 매우 진지해 보이는 궁서체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영화사 우이독경』
처음에 이 영화사 이름을 보고, 무슨 이런 이름이 다 있나 했다.
소귀에 경 읽기, 라니. 남 말 안 듣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가 했는데, 그동안 조사하면서 그 이름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감독이 투자사, 배급사 등의 간섭에 이골이 나서,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제 욕심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영화사를 만들고자 했다.
그 염원이 담긴 이름이 바로 ‘우이독경’. 귓전에서 경을 읊든 말든 소처럼 내 길을 간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라나.
궁서체로 적힌 모습을 보니 얼마나 진지한 마음인지가 잘 전해졌다.
“류준혁입니다.”
문 앞에서 버튼을 눌러 소개를 하자, 안쪽에서 한차례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연 것은 30대 중반 정도 되는 여직원이었다.
“어머! 빨리 오셨네요!”
“예. 사장님 계시죠?”
“그럼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나에게도 눈인사를 던지는 그녀에게 묵례를 한 다음, 우리는 사무실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이 층 전체를 쓰는 것처럼은 보였는데, 건물 자체가 그리 크지는 않아서 그런지 내 편견과는 참 달랐다.
이전에 갔던 문자 투표 집계 외주 회사보다 조금 더 큰 정도?
그런 안쪽의 녹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가 만나러 온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 류준혁 대배우님! 친히 왕림해 주시고,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저희 지난주에도 만났잖습니까, 금 감독님.”
오가는 농담에, 둘이 얼마나 친한지는 알 수 있었다.
영화감독 금완승.
참 흔하지 않은 금씨 성의 이 감독은, 해외 영화계에서도 찾아주는 영화감독이다.
가벼운 톤의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담은 묵직한 영화까지.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하는데, 그 와중에 가장 큰 장기는 바로 액션 영화였다.
장편 영화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그가 감독한 모든 영화는 장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액션 영화.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도 그 부분으로, 한국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액션 영화 계보를 만들었다고도 평가받는 명감독이었다.
TV나 기사를 통해서 본 얼굴 그대로, 다소 마르고 새치가 곳곳에 섞인 40대 후반의 인상이었지만, 눈빛만은 아주 형형히 밝았다.
그 눈빛이 소파에 앉는 나를 보았다.
“그래, 이쪽이 같이 온다던 강대한 PD님이시군.”
“처음 뵙겠습니다. 강대한이라고 합니다.”
“금완승이라고 하우. 요새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가 뜨는 강대한 PD를 이렇게 다 보고, 내 인생에 이런 영광이 또 있을까 싶구마.”
묘하게 어느 지방인지 모를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그가 잔뜩 비행기를 태우려 하길래 나는 손을 내저었다.
“저야말로 금 감독님을 이렇게 실제로 뵙게 되어서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수사의 달인>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오호, 봐주셨구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영화 참 재밌지 않으오?”
“아주 재밌었습니다.”
“그렇지?”
옆에서 준혁이 형님이 소리내어 웃으며 우리의 대화를 끊었다.
“금 감독님, 천만 영화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칭찬하는 것도 썩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만든 자식 같은 영화 내가 자랑하겠다는데 누가 뭐래? 안 그러오, 강 PD? 강 PD도 <언더커버 싱어> 같은 방송이 매우 자랑스러울 거 아냐.”
그 제목이 금완승 감독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언더커버 싱어> 보셨습니까?”
“당연하지. 마침 영화 제작 중이었던 중이라 매주 챙겨 보진 못했지만, 최종 무대는 라이브로 보면서 투표도 했는걸. 난 보우건을 응원했수. 3위라서 아까웠지만 얼마 전 데뷔도 했으니 뭐, 그럼 됐지.”
이런 명감독인 내 방송을 봐줬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뭐라고 감사 인사도 더 못하고 있자, 준혁이 형님이 슬쩍 고개를 내려 말해 주었다.
“지금 후반 작업 중인 영화의 주제곡을 보우건한테 맡기려고 하나 봐.”
“예? 영화 주제곡을요?”
“이번 영화가 딱 힙합풍 노래랑 어울리거든. 아마 직원이 그쪽 회사랑 컨택해 보고 있을 거야. 아, 이런 이야기도 혹시 담당 PD니까 거쳐야 하는 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 손은 떠난 일이고, 어디까지나 보우건 님 소속사와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영화 나올 때까지 함구만 좀 부탁하지.”
앉은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폭풍 같은 일들이 몇 개나 일어나서 잠시 진정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우리를 안내해 준 여직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와 주어서, 나는 그것을 물처럼 꿀꺽꿀꺽 마셨다. 겨우 갈증이 좀 가시면서 심장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방금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가 마시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완승 감독이 입을 뗐다.
“나는 방송업계를 잘 몰라. 아니지, 예능 업계라고 해야 하나. 주변에 드라마 감독은 많아도 예능 감독은 없거든. 그래서 그쪽 제작 진행이나 환경이 어떨지 참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우.”
“저도 영화 제작 환경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준…… 류준혁 배우님한테 듣고, 좀 찾아서 공부한 정도입니다.”
“오, 공부를 하셨다고?”
“예. 아무래도 무지한 채 만나 뵙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부족하나마 영화 제작 과정 같은 것은 어느 정도 훑고 왔습니다.”
“그렇군. 젊은 친구가 자세가 괜찮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하고는 대뜸 물었다.
“NBS 계속 다닐 건가? 우리 회사에 올 생각 없어?”
“예?”
이게 또 무슨 말이야. 옆에서 준혁이 형님이 난처해했다.
“금 감독님, 그건 또 무슨 농담입니까. 대한이는 아직 할 일이 많은 친구입니다.”
“할 일이야 어디서든 찾아서 하면 되는 거지. 왜, 싫어?”
“전…… 영화를 잘 모릅니다.”
“그런 거야 배우면 되지. <언더커버 싱어> 보니까 카메라 잡는 거나 편집 기본은 충분하던데 뭐. 내가 잘 가르쳐 줄게. 어떠우?”
이게 진심이냐, 농담이야.
얼굴만 봐서는 어느 쪽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준혁이 형님을 돌아보았다.
내 SOS 신호를 알아듣고, 그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런 농담은 접어 두시고. 저희 일 이야기하러 모인 거잖습니까?”
“아, 그렇지?”
정말 까먹고 있었다는 듯 능글맞게 표정을 바꾼 금완승 감독이 툭 내뱉었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그거 꼭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