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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공할 확률 100%-107화 (107/200)

107화 오늘부터

이민희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강대한이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했을 때의 일이다.

그 술 한잔. 평소 같으면 별일 아닌 의미로 받아들였겠지만, 오늘만은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전부터 그 술 한잔을 기다려 오지 않았는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고 할 때까지 이민희는 멍하니 그 안에 있었다.

닫히려는 문을 서둘러 붙잡아 밖으로 나오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냐.”

회사를 뛰쳐나가자마자 보이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날아갔다.

머리를 새로 감을 시간은 없지만 세수를 하고 간단하게 화장을 할 시간 정도는 되었다.

<달리는 도시인> 본방을 TV에 틀어놓고, 빠르게 화장을 하고, 사 놓고 한 번도 입지 못한 원피스들 꺼냈다.

방 안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이민희를 보고,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한마디를 했다.

“오늘 약속 있었니? 뭘 그렇게 급하게 준비해?”

방 안에서 세 번째 원피스를 입다가 흠칫한 이민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대답했다.

“어어, 친구들이 갑자기 보자 그래서.”

“누구?”

“있어, 대학교 친구. 합정으로 온다고 해서 나가 봐야 해.”

세 번째 입은 게 그래도 제일 맘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핸드백을 걸치고 방을 나왔다.

거실 TV 속 <달리는 도시인>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저녁 안 먹어요, 나!”

어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한 것 같지만 듣는 중 마는 둥 하고 뛰쳐나와서 다시 택시를 탔다.

강대한에게서 연락을 받은 것은 택시 안이었다. 일단 장소를 정한 다음 근처에서 택시를 내리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 척 담담한 척 가게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가게 안쪽에, 고개를 숙인 채 메뉴판을 보고 있는 강대한이 있었다.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태연함을 가장하고 말했다.

“빨리 왔네.”

“……옷 갈아입고 왔어?”

“음, 응. 토요일이잖아.”

너무 새침하게 말했나, 아씨, 괜히 톡 쏘았나. 말을 뱉어 놓고도 자책을 했다. 절반쯤 후회하는 대꾸를 한 이후, 그녀는 강대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막상 가고 싶은 와인 집이라며 데려오긴 했는데, 맘에 들지 않아 하면 어쩌지.

나는 막상 기대 중인데, 내 기대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어쩌지?

나 혼자 오버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마구 돌아다닐 때였다.

“민희야. 우리 진지하게 만나 볼래?”

강대한이 그렇게 툭 내뱉었다.

“…….”

너무 뜻밖의 타이밍에 나온 말이라 이민희는 평소처럼 대응하지 못했다. 굳은 얼굴을 그대로 여과없이 노출하다가 깜짝 놀랐다.

방금 나, 표정 안 이상했을까.

한참 뒤에야 되물었다.

“……뭐라고?”

“만나 보지 않겠냐고.”

이민희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단번에 노빠꾸로 고백을 해 올 줄은 몰랐다.

그녀도 사실 언제부터 강대한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당잠사> 시즌3이 끝날 즈음부터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PD와 작가로서 동료지만 다소 서먹한 관계였는데, 어느 순간 말을 놓게 되고, 친구가 되고, 가까워지고.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묘하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마음이 본격적으로 기울어진 것은 김유미 팀장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고부터였다.

실제로 그녀를 만난 이민희는 확신했다. 김유미가 강대한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안 것이다.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순간, 자신의 마음도 정확하게 깨달았다.

‘아, 나는 대한이를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그 뒤로 유독 셋이서 마주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곤 했고…… 결국 김유미 팀장과 단둘이 술자리를 가진 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정정당당하게 하자고 합의를 보기도 했다.

사실 연애 관계에 그런 게 될 리는 없다.

그래서 강대한을 불러내, 그런 레스토랑에 데리고 간 건 좀 너무 여우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대한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 그렇게 굴었지만, 사실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며칠이었는데.

“……갑자기?”

이 고백은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원체 본심이 보이지 않던 강대한이었는데, 확신은커녕 희망조차 가지기 어려웠는데.

강대한이 뭐라고 다시 이야기를 하려는데,

“주문하신 와인 세팅해 드리겠습니다.”

주문한 와인이 먼저 나왔다. 그 탓에 둘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

“…….”

묘한 이야기를 던진 직후였기에 선뜻 누구 하나 다시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

평소라면 이민희가 먼저 말을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도 치맛단을 잡은 채 꼬물댔다.

그 모습을 보던 강대한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을 뻗어 이민희의 앞쪽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가 눈을 마주쳐 왔다.

“몇 달 동안…… 아니, 그보다 더 됐나. 나도 사실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서 미루고 미뤘던 것뿐인데, 그게 너한테는 참 나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어. 더는 이러면 안 될 것 같더라고.”

“대한…… 아?”

“서로 더 빙빙 돌지 말고. 사귀자, 우리.”

강대한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자주 보던 눈빛이었다. 회의실에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일 때의 눈빛이었다.

“사내 연애…… 괜찮아?”

조심스레 그렇게 물었다. 강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 괜찮아. 너만 괜찮다면.”

단단히 끄덕여 보이는 그의 태도에 묘한 든든함이 느껴졌다. 함께 제작을 진행할 때 느낀 든든함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때마침 눈앞에 와인이 있었다. 이민희는 그것을 들고 단숨에 원샷했다. 강대한이 헉 하고 말리려고 손을 뻗었다가 내렸다.

“좋아. 사귀자.”

민희가 말했다.

“나, 대한이 너 좋아해. 어떻게 말할까 고민했던 바보 같을 정도로 허망하긴 한데, 네가 먼저 말해 줄 줄은 몰라서…… 그건 좀 기쁘네.”

망설였지만, 결정한 이상 있는 그대로 내뱉는 것이 이민희의 성격이었다.

강대한도 맘에 들어 한 호쾌한 여장부 같은 매력.

“나 참…….”

강대한이 슬쩍 고개를 젓더니, 손을 들어 와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빠르게 가져온 와인을 이민희의 빈잔과 바꿔 주고, 그가 말했다.

“혼자 마시면 어떡해. 짠은 해야지.”

“시끄러워. 사람 갑자기 불러내서 부끄럽게 만든 주제에.”

“누군 안 부끄럽냐.”

가볍게 티격태격한 뒤, 둘은 서로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이윽고 둘은 잔을 들었다.

“단, 조건이 있어. 김 팀장님은 깔끔하게 정리하기. 대신 너무 아프게 하지 말고. 알았어?”

“자신은 없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걱정 마.”

그건 어디까지나 강대한의 몫. 이민희는 맘에 든다는 듯 끄덕이고선 잔을 마주쳤다.

“오늘부터 1일?”

* * *

소식을 들은 박주영 선배를 오한이라도 든 듯 어깨를 감싸고 떨어댔다.

“아이고, 꼴값들 떠시네 정말.”

“꼴값이라뇨.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 후배들을 축하해 줄 순 없습니까.”

“야,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중인데 축하는 무슨. 저주를 퍼부어 주마.”

내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던 장본인이면서 꼭 이럴 때는 흉악스러운 말만 해 댄다.

“가장 먼저 알린 건데, 이러실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가장 먼저 저주하는 거지.”

낄낄댄 선배는 담배를 한 모금 진하게 빨더니 후우 하고 내뱉었다. 깊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렇군…… 둘이 결국 사귄단 말이지.”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뭐 했냐 주말 동안.”

별거 안 했다.

와인잔을 나누면서 연애를 시작했더니, 자리가 끝날 즈음에는 둘이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첫날부터 이렇게 취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오늘은 헤어지고, 내일 영화나 보자.

그렇게 헤어져서, 자기 전까지 애매한 메시지를 주고받고, 일요일에는 요즘 유행한다는 로맨스 영화를 보러 갔다.

“뭣이? 둘이서 영화를 봤다고?”

“로맨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건 천만 년만이었죠, 뭐”

체질에 맞지는 않아서, 두 시간 동안 괜히 몸이 꼬였다.

“그래도 재미는 있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밥 먹고, 그러고 헤어졌습니다.”

“그것뿐?”

“그것뿐입니다. 뭘 바라신 겁니까?”

“재미없는 커플 같으니.”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듣고 대리 연애라도 하려고 했던 건지,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상한 듯 침을 바닥에 퉤 뱉어냈다.

나도 인상을 써 주었다.

“선배도 그러지 마시고, 연애 좀 하세요.”

“누가 보면 한 1년 연애한 줄 알겠네.”

“…….”

순간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박주영 선배는 푹 찌르는 걸 참 잘한다.

“그리고 연애하려고 해도 여유가 없다, 여유가! 망할 주말 예능!”

꽥 소리를 지르더니 주변에 상사가 있나 없나 살피는 걸 보니, 영락없는 월급쟁이의 모습이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애를 뭐 여유가 있어서 합니까. 저도 여유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렇지만 넌 인연이라도 있지. 두 명이나.”

“…….”

오늘만 두 번째다. 갑자기 푹 찌르고 들어오는 게.

또 한 번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선배가 나를 보았다.

“정리해야지?”

“……그렇죠.”

김유미 팀장에 대해서는 선배에게 딱히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그럼에도 대충 다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확실히 나보다 더 촉새다.

“사귀기로 한 거, 민희 걱정시키지 말고 빨리 빨리 정리해. 어영부영하면 내가 친히 민희에게 이를 거야.”

이럴 수가. 이렇게 가까이 첩자를 심어 뒀다니.

“알고 있습니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나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이미 연락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김유미 팀장을 만난 것은 화요일 저녁이었다.

일이 있어서 상암으로 올 일이 있다고, 굳이 그녀가 시간을 지정했다.

박주영 선배의 협조로 회의 중에 잠깐 일어난 나는, 회사 앞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넘겨짚은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지만,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알아서 차는 뉘앙스였다.

“……그래요. 그렇군요.”

내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은 김유미 팀장이 느릿하게 대꾸했다.

앞에 놓여 있는 커피를 손에 들더니 아주 천천히 넘긴다. 내게는 그 행동이 기분을 추스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반복된 인사라고 해도 나는 다시 사과했다.

사과하는 나를 힐끔 쳐다본 그녀가, 마저 한 모금 넘기고 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번에 만났을 때부터.”

“네?”

“나랑 그런 소문이 났는데도 정작 정신은 다른 데로 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참, 이런 쪽으로는 촉이 좋아서 말이죠.”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도 나는 김유미 팀장보다는 민희에게 더욱 마음을 썼다.

확신하고 결심하게 된 계기라면 계기였지만, 그녀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리라.

“……죄송합니다.”

결국 또 사과하는 나에게, 김유미 팀장은 도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과하지 말죠? 내가 그렇다고 정식으로 고백한 것도 아닌데. 지금 참 우스운 상황이라는 건 알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님은 뻔히 보였다.

나는 외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안 좋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진 끝에, 김유미 팀장이 말을 이었다.

“정중하게 알려 줘서 고마워요.”

“……아니요,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그러게요, 대한 씨…… 강 PD는 해야 할 일을 너무 잘하더라고요. 그게 맘에 들었어요, 뒤늦은 고백이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알 수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유미 팀장이 다시 미소 지었다.

“앞으로 일로 엮이는 일이 없진 않을 거고. 그때마다 계속 그런 얼굴 할 거 아니죠?”

“물론입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앞으로는 업무적으로는 잘 지내 봐요.”

김유미 팀장이 먼저 손을 내밀어 왔다. 도도한 태도였지만,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난 고민하다가 그 손을 잡았다.

어색한 악수.

손이 떨어지자 김유미 팀장이 다시 빙긋 웃었다.

“바쁘죠? 들어가 보세요. 난 남은 커피 좀 마시고 돌아갈 테니까.”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먼저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카페 안쪽에 김유미 팀장이 앉아 있었지만,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어떤 얼굴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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