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결심
월요일 출근하기가 솔직히 무서웠다. 결근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하고서 꿋꿋하게 회사로 향했다.
“…….”
“…….”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동안과는 다른 의미로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의식 과잉이겠거니 하고 넘기려고 해도, 어째 사무실 층에 올라갈 때까지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좋은 아…….”
“오, 한창 좋은 때를 보내는 분 아니신가.”
꼭 이런 날만 일찍 출근하는 박주영 선배가 나를 반겼다.
주변 다른 팀원들도 나를 보고 히죽대는 것이, 그래, 이미 소문은 다 퍼뜨리셨다 이거지.
“어제도 말했습니다만,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응? 나 별말 안 했는데? 좋은 때 보내고 있다고밖에 안 했는데?”
“그게 그 말…… 에휴, 됐습니다.”
나는 없었던 숙취가 생기는 듯한 기분으로 이마를 짓눌렀다.
그사이 팀원들이 모두 출근하고, 우리는 월요일 정기회의에 들어갔다.
이번 주 촬영 계획을 확인하고, 토요일 방영분의 편집 상태를 점검하고, 그러고 나서 박주영 선배는 정민우 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올라갔다.
각자의 일을 하러 떠나는 사이, 나도 짐을 챙겨서 편집실로 내려가려는데.
“……어, 좋은 아침.”
복도에서 딱 민희를 만났다.
작가실도 같은 층을 쓰고 있긴 했는데, 그동안에는 일부러 만나려 치지 않으면 머리카락도 안 보이더니 오늘은 딱 이렇게 부딪친다. 이건 뭐, 누가 짜놓은 시나리오도 아니고.
“좋은 아침은 아니야. 힘들어.”
민희가 그렇게 힘없이 대꾸하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괜히 한번 봤다가 나도 돌아섰다.
아무렇지 않아 했던 그날의 대답이 맞는 것 같은데. 정말 평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뭘까, 이 기분은.
서브 일은 역시 바쁘기만 했다.
금세 이번 주 방영분 편집을 끝마쳐야 했고, 이런저런 잡무도 처리해야 했다.
그나마 <당잠사> 시즌5 시절에 권민헌 선배가 이것저것 참 잘 가르쳐 줘서, 서브 일에 그나마 적응이 된 게 위안거리였다.
AGD 앱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반대로 도움이 되었다.
확률을 보며 편집본의 완성도를 측정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박주영 선배의 의견을 우선시했다.
박주영 선배는 의외로 고민 없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달리는 도시인> 방송 스타일에 잘 어울리는 듯했다.
그런 장점을 찾아내 최적의 상황에 맞춰 넣은 정민우 팀장, 서인하 국장의 인선이 제대로 들어맞았다고 봐야겠지.
그 와중에 나는 AGD 앱이 없어도, 박주영 선배의 신조를 길라잡이 삼아 편집을 끝마쳤다.
한 주가 그렇게 쌩하게 지나갔다.
그사이 김유미 팀장에게 몇 번 연락이 왔다. 라방에 얼굴이 찍힌 이후로 그녀의 신변에는 그래도 큰 변화가 없었던 모양이다.
[김유미팀장: 사실 좀 아쉽긴 한데요 뭐 어쩔 수 없죠]
그걸 내려다보는 내 심정은 묘했다.
김유미 팀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의미를 표해 왔다. 무슨 의미인지 이제 모르지 않는다. 그녀의 묘한 언행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 정도로 감이 없음 PD 생활 접어야지.
그래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조금 고민하다가, 한참 늦게 대답했다.
[제 주변에도 이제 다 조용해졌습니다. 김 팀장님도 별일없으시다고 하니 이제 조용히 넘어가면 될 것 같네요]
[김유미팀장: 어머 정없게. 다시 김 팀장으로 돌아간 거예요?]
[김유미팀장: 술 한잔하면서 다시 친해져야겠네?]
마지막 메시지는 푸시로만 확인했다. 내가 읽었다는 표시는 나지 않을 거라, 그냥 메신저창을 껐다.
카메라팀을 만나러 갈 일이 있어서 자료를 챙겨 사무실을 나와, 복도에 잠깐 섰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반대 방향을 잠깐 보았다.
딱히 뭔가를 보는 것은 아닌 시선만 던지고 있는데,
“여기서 멍청히 서서 뭐 하냐.”
촬영 협조 건으로 경기도청과 전화를 하고 온 박주영 선배가 뒤통수를 툭 때렸다.
나와 시선을 같이하던 그가 무심히 말했다.
“너 요새 저쪽 자주 보더라.”
“예? 제가요?”
“그래, 너가요. 저쪽에 뭐 숨겨놨냐? 저 방향에 있어 봤자 작가실…… 아.”
말하던 도중에 뭔가를 깨달은 그가 능글맞게 웃기 시작했다.
“뭐야, 민희랑 뭔 일 있어?”
“일은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래? 강요물 씨 스캔들이 터졌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고?”
“……네?”
“내가 뭐 귀도 없고 눈도 없는 줄 아냐. 옆에서 보면 빤히 다 보이는 것을.”
쯧쯧 혀를 차는 박주영 선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대충 눈치챘다. 그래, 민희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이 선배와 같이 보낸 시간과 같다.
우리 옆에 제일 같이 있었던 존재인데, 나도 눈치챈 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선배, 혹시 오늘 시간 되십니까?”
“오오, 뭐야. 상담이냐?”
“네, 술 한잔 사 주십쇼.”
그는 낄낄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도움받은 것도 있고, 이번에는 내가 상담 들어줄 차례겠지. 각자 일 끝나고, 국밥집에서 보자.”
“예.”
두 시간 뒤,
우리는 조촐하게 술국을 하나 시켜 놓고 마주 앉았다.
소주와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제작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차츰차츰 본래의 주제로 넘어갔다.
“선배는 언제 눈치채셨습니까?”
“누구, 민희? 음, 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언제부턴가 민희가 너랑 효명이를 두고 농담을 안 하더라고. 그걸 알게 된 이후로 의심은 하고 있었지. 확신한 건 얼마 안 됐고.”
“확신한 건 언제이신 겁니까?”
“언제겠어, 얼마 전 네 스캔들 때지. 그걸 알려 준 게 나인데, 보는 앞에서 딱 표정이 굳더라고. 민희가 뭐라고 안 하디?”
“뭐라고 한 건…….”
그냥 확인만 하더라, 별일 없었다고 하니까 아무 말 안 하더라. 요즘 얼굴 봐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더라. 그렇게만 말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있나. 맘에 두고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데이트를 하다가 걸렸는데.”
“데이트 아닙니다.”
“김유미 팀장은 데이트 복장이던데. 너도 꽤 차려입었더만.”
“그건…… 원체 김유미 팀장이 처음부터 빡빡했던 사람이라서…….”
“변명하고는.”
그가 내가 마시던 맥주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소주잔을 두고 거기에 따랐다.
말없이 쳐다보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고 그냥 소주를 꿀꺽 삼켰다.
“네 의도가 어떻든, 어쨌든 민희는 그거 보고 상심한 거고. 그다음에 티를 안 내는 건 걔 나름대로의 자존심일 거고. 안 그래?”
“……그렇겠죠?”
“그런데 너는 그걸 또 신경 쓰고 있는 거고.”
묵묵히 빈잔만 내려다봤다. 거기에 다시 술이 따라지고, 나도 그의 빈잔을 채워 주었다.
“사실 저도 전부터 민희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일에 관해 진지하게 날을 잡고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파스타를 먹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했고,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테니 같이 나중에 술 한잔 하며 이야기하자고. 그리고 그날 헤어지면서 그녀에게 건넸던 이야기와, 그로 인해 그날까진 서로의 감정으로 인해 업무적으로 차질을 빚지 말자고 이야기 나눈 것도.
나는 어렵게 말한 거였다.
근데 선배 말이 내 머리를 세게 때렸다.
“그게 뭐야, 너 진짜 재수똥이네.”
“네……?”
“그렇잖아. 마음 뻔히 알면서도 너는 너 편하자고 그 마음을 짓밟은 거잖아.”
왠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대한아. 나도 어차피 연애 쪽에서는 앞가림 못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 말만은 할 수 있다.”
“예.”
“너도 영 관심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리 저울질하고 있냐.”
“…….”
“그거 되게 건방진 거야. 회사 일이 중요하다고? 그럼 애초에 연애할 생각을 말아야지. 연애 감정은 즐기고 싶고, 업무적으로도 손해 보고 싶지 않고, 너는 너 할 일 다하면서 느긋하게 생각을 정리할 테니, 그때까지 민희더러 참고 기다려라? 그리고 그동안에도 너 필요할 땐 업무적으로 널 도와줘라?”
평소에 연애의 연 자도 꺼낸 적이 없는 박주영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더더욱 뼈가 아팠다.
이전부터 나랑 민희 사이를 두고 사귀냐고 농담조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어투였다.
“이번 스캔들이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어간다 해도, 제대로 수습 못 하면 결국 틈이 커질 거다. 그러기 전에 해결 봐야지.”
“해결이요.”
그의 말을 반복하듯 중얼거린 뒤에, 나는 소주를 꿀꺽 삼켰다. 그 잔을 내밀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웬일이냐. 소주가 달아?”
“한 잔 더 주십시오.”
박주영 선배는 피식 웃고선 다시 잔을 채워 주었다.
“뭐…… 이렇게 말해 봤자 중요한 건 네 마음이지. 어느 방향이든지 정리하려면.”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그를 쳐다보자, 잔을 부딪친 그가 왜 보냐는 식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인마. 누구 약 올리냐?”
소주를 털어 넣은 박주영 선배는 ‘연애 세포가 죽은 건 난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이라며 구시렁거리더니 자작하여 한 잔을 더 마셨다.
“지금처럼 안하무인으로 개소리 늘어놓지 말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결정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선배한테 연애 조언을 받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나도 너한테 이런 소리 지껄일 줄 몰랐어. 왜, 이제 좀 선배답게 보이냐?”
그건 늘 그랬죠. 나는 피식 웃고서 내 잔을 비웠다.
* * *
그렇게 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토요일 방송인 <달리는 도시인>의 본방을 체크하기 위해서 출근한 회사 복도에서, 민희를 마주쳤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더니 그 앞에 민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출근해?”
“어, 응. 너는?”
“난 퇴근. 누구처럼 토요일 방송이 아니거든.”
지원 형태로 나가 있어서 상대적인 메인이던 시절보다는 여유가 있는 듯했다.
“나도 집에 가서 <도시인>이나 봐야겠다. 그럼 힘내.”
“토요일인데 약속 없어?”
나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녀가 1층을 누르면서 픽 웃었다.
“그러게. 좋은 토요일인데 누구 만날 약속도 없네.”
“친구들이라도 부르든지.”
“됐어. 황금 같은 주말인데 집에서 치킨 뜯으면서 쉴 거야.”
그녀가 손을 간단히 흔들어 보였다.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탁.
난 손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뭐야, 왜?”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왜 이러냐는 듯한 눈으로 보는 민희.
왠지 모를 갈증을 느끼면서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나도 <도시인> 본방 체크만 하면 돼. 저녁에 좀 볼래?”
“……갑자기?”
“응. 전에 못했던 술 한잔, 오늘 하자.”
나를 보는 민희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할게.”
“……어, 응.”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나는 전광판 숫자가 떨어지는 것을 본 다음 돌아섰다.
<달리는 도시인> 방송본은 문제가 없었다. 박주영 선배와 몇 번을 논의하면서 맞춘 내용이었고, 실수도 없었다.
끝나자마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놓고 일어섰다.
“어라, 강 PD님. 어디 가세요? 같이 식사 안 하시고?”
토요일에는 으레 팀원들끼리 저녁을 먹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약속이 있어서요.”
나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서기 전 눈이 마주친 박주영 선배가 다 알겠다는 눈빛으로 씨익 웃어 보였지만, 나는 무시했다.
[지금 끝났어. 어디로 나올래?]
[이민희작가: 나 가고 싶은 와인 집 있어]
그러면서 지도 앱으로 위치를 공유해 주었다.
합정역 앞 한잔와인이라는 곳이었다. 합정역이면 회사랑 멀지도 않았다.
부리나케 회사에서 나와 합정역으로 향했다. 거리상으로 멀진 않았지만 왠지 모를 바쁜 마음에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뛰었다.
홍대 주차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술집 가득한 골목에서 어렵지 않게, ‘한잔와인’이라는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덜 졌지만, 어둑해진 분위기와 가게 안 풍경이 잘 어울렸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손님이 없어서,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으니 민희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빨리 왔네.”
거라는 내 생각을 깨고, 민희는 금방 나타났다. 마치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 메뉴판을 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는데,
“……옷 갈아입고 왔어?”
“음, 응. 토요일이잖아.”
좀 전에 보았던 티셔츠에 청바지가 아닌, 처음 보는 밝은 계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새 화장도 한 것 같고, 항상 포니테일 상태였던 머리도 반묶음으로 가볍게 웨이브도 져 있었다.
두어 시간 흘렀을 뿐인데, 대체 언제 이렇게 준비하고 온 거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녀가 안쪽 자리에 앉고, 점원이 와서 피자와 와인 주문을 받아가고, 다시 둘만 남은 상황에서 내 입은 주체 없이 툭 열렸다.
“민희야. 우리 진지하게 만나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