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네가 그렇다면
그런데 아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옆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선반 위로 올려다보는 인물은 보우건이었다.
아무래도 데이트 중이었던 모양이다.
“헐. 대박. 잠깐만요, 여러분! 저희 뒷자리에 누가 있는 줄 아세요?!”
거기다가 그걸 또 라이브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온이 테이블에 세워 둔 핸드폰 거치대를 벌떡 들고 일어서서, 우리 테이블까지 모두 보이게 높이 들었다.
“어, 아온 씨. 잠깐 카메라 내려 주세요!”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김유미 팀장은 그때도 얼굴 찍히는 걸 싫어했었다.
내 말에 아온이 아차 싶었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아니지. 잠시만요. 죄송해요. 지금 라방 중인데 얼굴 찍어도 되나요?”
황급히 카메라를 다시 내리며 아온이 물어왔다. 나는 허망하게 김유미 팀장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것 같은데요.”
“아…… 그럼 목소리만! 인사만 좀 해 주세요.”
아온은 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본인들만 찍히도록 선반 위에 두었다.
“여러분! 놀랍게도 강대한 PD님이십니다! 누군지 아시죠? <당잠사>를 만들고! <언더커버 싱어>로 저를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강남 아버지 같은 분이죠!”
성형외과 의사에 갖다붙이다니. 아, 안 돼…… 이 패턴이면 또 별명이 생길지도 몰라.
하지만 날 위해 항명해 줄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하기는, 회사에서도 아무도 없다.
핸드폰 화면에 작게 보이는 대화창에서 우르르르 채팅들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너무 많고 글씨가 작아 읽을 수는 없었다.
“어…… 안녕하세요. 강대한입니다. <언더커버 싱어>는 만들었지만 강남 아버지는 아니고요. <당잠사>는 제가 만든 게 아닌, 그런 사람입니다.”
아온이 이 차게 식은 분위기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지만, 나는 입을 싹 다무는 걸로 대응했다.
내 반응을 포기한 아온이 김유미 팀장 쪽을 쳐다봤다.
“언니도 인사…….”
김유미 팀장은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내저었다. 아온은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그려 보이고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런데 둘이 저번 엑시트 공연에서 친해지긴 한 모양이다. 언니 동생 하는 걸 봐서는.
그때 보우건이 나한테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어떻게, 이런 데서 다 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데이트 중이셨어요?”
보우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언더커버 싱어>가 끝난 뒤 한 차례 미팅했던 후로 처음 얼굴을 맞대는 거였다.
하지만, 어쩐지 스캔들 기사 때문에 아온하고 사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했었던 일이 있어서인지, 전보다 덜 어색했다.
“네. 어차피 다 공개된 상태여서, 외려 시청자들이 난리를 치더라고요. 데이트하는 걸 영상이든 라방이든 보고 싶다고 해서요……. 이 가게 좋다고 김 팀장님이 전에 알려 주셨거든요.”
김유미 팀장, 여기 사장을 진짜 찐동생으로 대하는 모양이다. 어디까지 홍보를 해 준 거야?
그래서 여기서 라방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본의 아니게 날이 이렇게 겹치다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이야기나 하고 싶은데, 다 드셨네요?”
김유미 팀장이 그 말을 딱 잘랐다.
“데이트 방해는 절대 하면 안 되죠. 저희는 다 먹고 이제 나갈 참이라서, 두 분이서 이쁜 사랑 오붓하게 즐기시길 바랄게요. 아, 라방도요.”
와, 말에 담긴 뼈가 거의 해장국에 담긴 통뼈네. 역시 김유미 팀장은 적으로 돌리면 무서워 죽을 유형이다.
오죽하면 그 텐션 좋은 아온이 한 발을 물러설 정도였다.
“헤헤. 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네요. 그래도 강 PD님, 마지막으로 시청자들한테 한마디?”
여기서 나까지 싫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적당히 호응해 주기로 했다.
“어…… 아온 님 데뷔 앨범 대박 기원! 전국 콘서트 기원! 보우건 님 데뷔 앨범도 마찬가지요.”
“하하하하! 감사해요! 역시 센스쟁이!”
아온이 활기차게 엄지를 세우며 날 칭찬했고, 보우건도 쑥스러워하면서 인사를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있는 줄 몰랐을 때랑은 달리 라방을 하면서 다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선반 너머에서 계속 들려왔다.
나는 타이밍을 보고 김유미 팀장에게 말했다.
“나갈까요? 아무래도 신경 쓰이실 것 같은데.”
“음, 아니라고 하긴 어렵네요. 그러죠. 커피는 내가 살게요.”
우리는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면서 아온―보우건 커플에게 다시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고 나서야 김유미 팀장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후우. 방송은 녹화든 라이브든 영 익숙하지가 않다니까요. 전 역시 무대 뒤 체질인가 봐요.”
“그럴 수 있죠. 하는 일도 그쪽이시고, 보통은 다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런 BJ들이 대단한 거죠.”
“대한 씨는 그래도 카메라 샤워 좀 받지 않았나요? 방송에서도 여러 번 얼굴 들이미시던데.”
“그건 장면상 필요해서 편집에 넣었을 뿐이고…… 아직도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변명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먼저 걸었다.
걸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작스런 해프닝에서 생겼던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OMG 대표더러 보우건 좀 혼내라 해야겠어요. 오면 온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지.”
자주 간다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김유미 팀장이 그렇게 투덜대고, 나도 웃으면서 맞장구쳐 주었다.
사적인 자리를 갖는 건 오늘이 처음인 데다 오늘 분위기가 영 마음에 걸려서 분위기가 어색했는데, 아온 커플 덕분에 좀 풀어진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나오면서 옷매무새를 다듬은 김유미 팀장이 이야기했다.
“대한 씨. 종종 이렇게 봐도 될까요?”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진 않았다.
나는 최대한 말을 돌려서 대꾸했다.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런 자리가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업무의 연장선상이요? 거기다 내가 먼저 연락하라고?”
기껏 돌린다고 돌린 말이지만 기분이 상했는지, 김유미 팀장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 뒤돌아섰다.
굽을 또각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그날 일은 끝난 줄 알았다.
[엑시트최효명: 형 이건 뭐예요]
[엑시트최효명: (캡처)]
[엑시트최효명: 이거 김유미 팀장님 맞죠? 연애해요 형?]
[박주영선배: 야야야야야야 망할 후배놈아]
[박주영선배: 너 어느새 김유미 팀장이랑.....!!!!!!!!!!]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하철에서부터 내 핸드폰을 수놓기 시작한 메시지들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 *
발단은 뻔했다.
레스토랑에서 만난 아온―보우건 커플. 그들이 하던 라방에 아주 잠깐 얼굴이 비쳤던 게 화근이었나 보다.
라방이 아무래도 화질이 널뛰는 면이 있다고 해도 아는 사람 눈에는 전부 보였다.
너튜브 댓글만 봐도 내 의심이 킹리적 갓심임을 증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강대한PD다! 진짜네!
―명리더는 어디다 두고....!
―뭐야 강이 양다리 걸쳤다 이거야?
―옆에 여자는 누구임?
―└이전 브이로그에도 나온 적 있음 이름은 밑의 애가 대답해 줄 거임
―└엑시트 공연 놀러 갔을 때의 영상 말이지? 김씨라고만 나옴ㅇㅇ』
나야 사람들이 대번에 알아봤지만, 덜 얼굴이 알려진 김유미 팀장은 세간으로는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이 소식을 전달받은 주변 사람들은 전부 알아봤다.
지하철에서 연신 날아오는 메시지들을 푸시로만 읽으며 답장을 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상암역에서 나와서 긴 통로를 걸어 나와, 원룸 건물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하나 사서,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서 단숨에 절반을 먹어치웠다.
“……망했네, 아오.”
뭐가 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망했다.
지잉―
지잉지잉―
플라스틱제 테이블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연신 떨어 대는 것을 두고 나는 무시했다.
화면을 엎어놔서 누구에게 오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사실 보기 두려웠다.
다름 아닌 한 인물의 메시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바로 민희.
여태까지의 화려한 전적상, 김유미 팀장과 마주하면 항상 으르렁댔던 그녀의 메시지가 무척이나 겁났다.
하지만, 마냥 무시하기엔 진동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거의 옛날 톡지옥을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일단 폰을 열어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박주영선배: 대답해]
[박주영선배: 대답하라고]
[박주영선배: 아 아직 데이트 중이냐? 그래서야? 그래서 대답을 못해?]
[엑시트최효명: 도시인 때문에 바쁜 줄 알았는데ㅋㅋㅋㅋㅋ 이야 할 거 다 하시네요ㅋㅋㅋㅋㅋ]
[엑시트최효명: 진짜? 진짜예요 정말로?ㅋㅋㅋㅋㅋ]
두 사람이 가장 열정적이었고, 가장 많이 떠들어댔다. 박주영 선배는 쉬고 있을 테니 그렇다 치더라도, 효명이 이 녀석은 스케줄 하던 중 아니었나. 왜 이렇게 여유롭냐, 너.
[그런 거 아닙니다. 지난번 스캔들 기사 때 빚을 갚으려고 밥 좀 산 것뿐이에요]
[밥 살 일 있어서 산 것 뿐이요. 오해 ㄴㄴ]
두 사람에게 그렇게 일단 답을 보낸 뒤에 다른 메시지도 훑어보니 가관이었다.
[배우류준혁: 다시 봤어 대한아]
[배우류준혁: 당분간 또 바쁠 것 같다더니 그래서였어?ㅎ]
[오해십니다 형님 아무 일 없어요 바쁜 건 진짜 일 때문이에요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영화 찍느라 바쁠 준혁이 형님도 효명이에게 들었는지 그렇게 연락이 왔고,
[권민헌선배: 나는 이해해 너라도 연애를 해서 다행이다]
[....주영 선배에게 무슨 말을 들었든 아닙니다 선배]
권민헌 선배도 그렇게 연락을 해와서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민준기기자: 난생처음 예능PD의 스캔들을 한번 터뜨려 볼까요?ㅎㅎㅎㅎㅎ]
[민준기기자: 독점 인터뷰 좀 해주시오]
[인터뷰 할 거리 없습니다. 그냥 밥만 먹었을 뿐이에요]
[민준기기자: 전형적인 스캔들 무마 멘트네요]
아니, 이 아저씨는 예능 PD 스캔들을 누가 본다고 이런 농담을.
대학 친구들까지 연락이 와 있어서, 일일이 답장을 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그냥 답변을 복사 붙여넣기로 쳐 넣은 다음에 폰을 내려놓았다.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그걸로도 속이 안 차서 그냥 만 원에 네 캔을 사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또 몇 개의 메시지가 더 와 있어서 읽고서 답변을 하던 중에, 아직 확인하지 못한 푸시 하나를 발견했다.
아니, 사실 확인은 진즉에 했다.
다만 차마 누르지 못하고 넘겨두고 있던 것이었다.
다른 메시지를 전부 정리한 다음에,
“……후우우.”
내가 생각해도 매우 깊은 한숨을 쉰 다음에 아직 안 읽었던 메시지를 터치했다.
[이민희작가: 김 팀장 만났어?]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딱 그 한 줄.
그 한 줄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옥죌 수 있다니. 대체 이 무거워지는 마음은 뭐란 말인가.
캔 맥주를 다시 까서 목을 축이면서 냉정히 생각했다.
“내가 왜 죄책감을 느끼지.”
소리 내어 말하니 새삼 더 다가왔다.
그러게, 김유미 팀장이랑 밥 한 끼 먹은 것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겁을 내야 하지?
오해를 풀긴커녕 겁을 집어먹어야 하나?
술기운을 빌려 냉큼 메신저 창을 열었다.
[스캔들 기사 막으면서 신세 져서 밥 샀어]
[이민희작가: 대답 참 빠르네]
[이민희작가: 그 스캔들은 막고 조만간 네 스캔들 터질 분위기던데]
[아무 일도 없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헤어졌어]
딱히 꿇릴 것도 없고, 설명한 이상의 일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떳떳하니 말이 꼬일 것도 없었다.
[이민희작가: 그래? 김유미 팀장님은 별말 없고?]
[뭐가 있겠어. 그러고 나서 헤어졌지]
나는 맥주를 마시며 창을 내려다보았다.
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안주 없이 먹는 게 처량해서 육포라도 사 오려고 다시 일어나려 했는데,
지잉―
화면이 꺼진 스마트폰이 울었다.
[이민희작가: 그래]
[이민희작가: 네가 그렇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이민희작가: 알았어 (엄지)]
그것이 마지막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