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오래된 약속
박주영으로서는 정민우 팀장과 단둘이 대면할 일이 많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다. 정민우 팀장이 박주영을 차별한 것은 아니고, 단지 팀 내에서 박주영의 위치가 그러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정민우가 담배 한 대 피우겠냐며 물었을 때, 박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은 끊으셨잖아요.”
“넌 피워도 된다는 거지.”
“저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둘이 있고 보니, 박주영은 정민우가 새삼 그렇게 편한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갔다.
이런 팀장을 앞에 두고 강대한은 잘도 뻗댄단 말이지. 새삼 그 안면이 참 두껍다고 박주영은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회식 말고 너랑 편하게 본 일이 없었구나. 미안하다. 내가 신경을 못 써줬네. 3팀에서 너를 끌어온 게 난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거, 대한이한테 저 붙여 주시려고 하신 거 이제 다 압니다.”
“아니라니까. 진짜 내가 필요해서 그랬다고. 지금도 많이 도움 받고 있어.”
<언더커버 싱어> 진행, 그리고 <당잠사> 시즌5까지 주욱 달리느라 사실 5팀 업무를 돕기 시작한 건 최근 일주일이 거의 다였다.
그렇기에 정민우의 말이 인사치레라는 것도 알지만, 굳이 태클을 걸진 않았다.
“뭐, 나도 팀장이 처음이라 부족한 게 많다. 앞으로 더 신경 쓸게.”
“괜찮습니다, 전. 오늘도 팀장 회의 하느라 힘드셨잖아요. 고생하시는 거야 다들 아는데요 뭐.”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고.”
정민우는 박주영의 말에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불러낸 이유가 궁금하지?”
박주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이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주말 예능, 해 볼래?”
박주영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되짚다가, 헉 하고 되물었다.
“<달리는 도시인>요?”
현재 NBS의 주말 예능 중, 토요일 레귤러를 맡고 있는 <즐거운 토요일> 코너인 <달리는 도시인>.
얼마 전 불미의 사고로 인해 현재는 제작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어 있는 상태고, 해당 시간에는 파일럿 프로그램이 투입되고 있었다.
“오늘 회의에서 이 이야기도 나왔어. <달리는 도시인>의 재제작을 들어가면서 메인 PD를 새로 배정하는 쪽으로.”
“2팀에서…… 문 팀장께서 하시는 게 아닙니까?”
“문 팀장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닌데, 본인이 부담스러워해. 지난 일도 있고 해서, 차라리 다른 팀이 나을 것 같다고. 그래서 누가 괜찮을지 이야기를 하다가, 박 PD 네 이야기가 나온 거야.”
박주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팀장급에서 본인을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떠오르는 솔직한 의문 그대로 물었다.
“왜 대한이가 아니고 접니까?”
이건 꾸밈없는 질문이었다. 박주영 스스로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5팀에서 <달리는 도시인>을 맡는다면, 박주영보다는 강대한이어야 한다.
이미 입봉도 훌륭하게 수행했고, 무슨 일을 맡겨도 성과를 내는 믿음도 있다.
심지어 그 강대한은 지금 딱히 제작에 들어간 프로그램도 없다.
그런데 왜?
“뭐야, 입봉시켜 준다는데 불만이냐.”
정민우의 표정이 짐짓 진지해졌다. 박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분명 저한테는 기회죠. 어떤 이유에서든 주말 예능을 할 수 있으면 당연히 욕심이 납니다. 하지만…… 불안한 것도 사실이거든요.”
박주영이라고 입봉을 꿈꾼 일이 없었을까.
그간 수도 없이 썼다 지우고, 고치고 엎기를 반복했던 기획들이 있었다. 더욱이 주말 예능이라면, 누구든 꿈꿔 보는 기회다.
그렇지만 동시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에 불안함도 컸다.
“주말 예능으로 제가 입봉해도 될 거라고, 팀장님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었다면, 내가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정민우도 박주영이 가진 불안과 부담을 알기에,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야, 박 PD. 주영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다 알아. 입봉 전인 PD 중에 누가 그런 부담을 안 갖겠어? 네 경우에는 밑에 대한이도 있고. 그래서 내가 더 밀어붙인 거야.”
“팀장님께서요?”
“그래, 솔직히 다른 팀장 중에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 좀 더 연차 있는 사람한테 맡기자는 말도 많았고. 그렇지만 연차가 능사는 아니잖냐. 문 팀장은 연차가 없어서 사고를 못 막았나? 강 PD는 연차가 높아서 잘했어?”
그의 말은 정론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 맞긴 했다.
“주영이 네가 다른 동기 PD들보다 입봉이 느린 건 아니지만, 빠르지도 않지. 후배 밑에서 서브를 뛰기도 했고. 그렇지만 그게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야. 나도 그렇게 판단하지 않고, 국장님도 내 생각과 같아.”
“국장님도…… 찬성하신 겁니까?”
“얘는 왜 자꾸 당연한 소리를 물어? 국장님 컨펌이 없으면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하고 있지도 않겠지.”
정민우의 말에 힘이 실렸다.
“불안한 것도 알겠고, 고민하는 것도 괜찮아. 그렇지만 네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넌 충분히 메인 잡을 능력이 되고, 그게 주말 예능이라도 괜찮을 거야. 네 팀장인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고.”
“…….”
“그러니 주영아. 기회를 잡아 보자. <당잠사> 제작도 일단 밀렸으니 얼마든지 시간은 되잖아.”
박주영은 쉬이 대답하진 못했다.
그의 말에, 가슴을 지배했던 불안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냉큼 받아들이기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답답하지만.
“……혹시 시간이 있습니까?”
“있기야 하지만 많진 않아. 외주 주자는 말도 있으니까, 되도록 빠른 대답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그럼…… 늦어도 금요일까지는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그사이 언제든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고.”
정민우는 마지막으로 응원하듯 박주영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일어섰다.
박주영은 몇 번이나 고민하고, 다시 고민하다가, 저녁에 결국 강대한을 불러냈다.
* * *
주말 예능이라니. <달리는 도시인>이라니.
내가 거절한 이후로, 제작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건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몇 번인가 파일럿 프로그램이 들어갔다가 자리를 못 잡은 것도.
그 와중에, 다른 PD가 맡는다는 소리도 없어서 이대로 사라지는 건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박주영 선배에게 오다니.
“지금도 좀 이상하긴 해. 왜 네가 아니고 나한테 온 건지.”
“저는 이미 다른 프로그램 기획 중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래서겠죠.”
이 제안이 내게 오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한차례 걷어찼기 때문이지. 공론화된 적이 없으니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 정도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굳이 이 상황에서 꺼내면 상황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난 말을 돌렸다.
“안 하실 겁니까?”
“내가 괜찮아 보이냐?”
“그럼요. 선배는 잘할 겁니다.”
“말은 쉽지, 인마. 주말 레귤러인데…… 매주 돌아가는 예능을 내가…….”
박주영 선배가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최근 예능판 추세가, 레귤러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예능도 시즌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으레 시즌제 제작부터 시작된다.
시즌제에 비해 레귤러는 끝을 생각하지 않은 채로 매주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
박주영 선배가 그런 제작 환경을 겪어 본 것은, 개편 전까지 했던 퀴즈 예능이 전부였다.
그것 또한 문 닫기 몇 달 전부터 합류한 것이니 경험이 필연적으로 부족한 건 맞았다.
그렇지만 다시 못 올 기회라는 것을 명확했다.
그 기회를 걷어찬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선배. 강범람답게 주제넘은 소리 좀 하겠습니다.”
“……뭔데.”
“이 기회를 두고 고민하는 건, 속 편한 소리일 것 같습니다.”
“뭐라고?”
박주영 선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까부터 소주를 따라 놓고 마시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보니 복잡하긴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더 화가 나는 것일 테지만 나는 이 자리에선 굳이 참지 않았다.
“능력이 안 되시는 것도 아니고, 부담스럽다고 이 기회를 차 버리실 겁니까? 그러고 나서 후회 안 하실 수 있어요?”
나는 심호흡으로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선배. 다른 동기들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갈 수 있고, 방송사 내에서 또 새롭게 역사를 쓸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세요. 선배라면 할 수 있습니다.”
“……야, 넌.”
뭐라고 소리치려고 했던 그가 한차례 말을 삼켰다.
그는 연거푸 세 잔을 부어 마시고선 나를 다시 보았다.
“넌 뭔데…… 나를 그렇게 믿냐.”
“선배니까요. 제가 항상 도움받았던, 항상 저를 도와주셨던 선배 아닙니까.”
“고작 그런 걸로? 내가 프로그램 말아먹으면 어떡하려고? 제대로 굴릴 확률보다 말아먹을 확률이 더 크지 않냐?”
확률.
넘길 수 없는 그 단어에 잠깐 얼굴이 굳었다.
그래, 이 시점에 확률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인생에 도움을 주었던 AGD 앱이, 지금은 사용이 불가능하다.
AGD 앱이 있다면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을까. 선배라면 잘할 거라고. 실패할 가능성 따위 없다고.
……아니, 그래선 안 된다.
AGD 앱이 없더라도, 확률 보기로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지금은 그래야 했다.
“괜찮습니다, 선배. 선배라면 할 수 있어요.”
“이 새끼…….”
내가 재차 그렇게 이야기하자, 박주영 선배의 얼굴에 몇 차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다시 빈잔을 채우려 하자, 나는 병을 빼앗아 따랐다. 그리고 내 잔도 들어 가져갔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잖습니까. 선배는 충분히 준비된 거고, 그래서 온 겁니다. 잡으세요, 선배.”
“…….”
내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너 하나만 약속해라.”
“말씀하시죠.”
“아직 결정한 건 아니지만, 전에 한 약속 안 잊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입봉한다면 제가 서브 하겠다고 한 거 말이죠.”
“그래, 그거. 너도 다음 기획 준비 중이니 억지는 안 쓰마. 내가 자리 잡을 때까지만 서브 맡아 줘. 그건 약속해 줄 수 있냐.”
“물론이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복선을 회수하듯 분명 그것은 내가 해야 할 몫이었다.
짠-
드디어 잔을 부딪히고, 원샷으로 소주를 넘긴 박주영 선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볼게, 고맙다.”
“별말씀을요.”
금요일.
박주영 선배는 아침부터 묘하게 긴장한 얼굴로 출근을 하더니, 정민우 팀장이 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민우 팀장의 전화로 나 또한 회의실로 불려 갔다.
“강 PD 지금 기획하는 거 있다지 않았어?”
박주영 선배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가타부타 그렇게 물어서, 나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진행하면 됩니다.”
“프로그램 자리 잡을 때까지라고 해도…… 몇 개월은 걸릴 텐데? 정말 괜찮겠어?”
이 일로 다시 양해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그건 나의 몫이다.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 참, 징한 놈이라니까.”
정민우 팀장은 두통이 온다는 듯 잠시 이마를 주무르다가, 맞은편의 박주영 선배를 보았다.
그는 단단한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후우, 박 PD. 좋은 후배를 뒀다, 정말.”
“건방진 후배죠. 후배 주제에 선배 걱정하고 있잖습니까.”
“그래, 강범람 어디 가겠어.”
정민우 팀장이 테이블을 탁탁 두들기고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좋다. <달리는 도시인>, 한번 가 보자. 박 PD는 서 국장님 컨펌 떨어지면 바로 제작 기획 들어가고, 강 PD는 그걸 도우면서…… 다음 기획도 빈틈없이 준비해. 알았어?”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민우 팀장이 서인하 국장실로 사라진 지 30분 후, 정식으로 5팀으로 지시가 떨어졌다.
<달리는 도시인> 메인 PD 박주영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