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실검 1위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민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마음이 복잡할 거라는 짐작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마주 봤을 때는 아까보다 좀 더 홀가분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응. 다음 술 한잔, 꼭 기대해야겠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언제든 그날 전까진 나도 더는 서로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
내가 전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는다.
역시 작가 짬밥은 무시하면 안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까 파스타 집에서의 무거운 공기는 어느새 훌쩍 날아가 버렸다. 보다 자연스럽고 편해졌다. 마치 내가 그녀의 감정에 대해 둔감했었던 때처럼. 아, 그건 내 잘못이구나…….
아무튼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걸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느낌이 달랐다.
그렇게 역에 도착해서 나는 그녀를 배웅해 주었다.
“월요일에 봅시다.”
“그럽시다.”
에스컬레이터 위로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본 다음 나도 고개를 돌렸다.
홀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다 픽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난 이유는 민희가 왜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냐는 것 때문이었다.
솔직히 생각하면 같이 일하면서 이틀 안 씻은 모습도, 사흘 머리 안 감은 모습도 서로 다 보인 상황이었다. 그 정도 사이에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희야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게 생긴 데다 시원시원한 성격이고 전형적인 인싸인데, 나는 내가 생각해도 100% 아싸다. 무뚝뚝하고, 딱히 정감 있게 챙겨 준 적도 없고. 더욱이 AGD 앱을 활용하면서 회사에서의 이미지는 나댄다는 식으로 잡혔던 것도 같은데…….
뭐, 민희 같은 미인이 좋아해 주면 그 자체로 영광인 거다.
일단은 내 마음에 좀 더 확신을 갖도록 잘 정리하자.
그리고, 나도 그날 전까진 민희를 보다 편하게 대하도록 노력해야지.
그래도 복잡한 마음을 다 버리긴 힘들어서, 결국 집 앞 편의점에서 할인 맥주를 사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 * *
연차 하루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주말 동안에는 조용하겠거니 했다.
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못했다.
[엑시트최효명: 형 기사 또 떴던데요]
[엑시트최효명: 실검에도 들고. 대단한 인기셔 정말]
아침에 효명이가 보내온 메시지에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정말로 실시간 검색어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1위 수사 발표
2위 당잠사
.
.
9위 강대한
10위 권민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검색어 변동 표를 찾아서 보았다. 심야부터 오전까지 10위권 안팎으로 왔다 갔다 거리고 있었다.
[엑시트최효명: 멤버들 SNS에 한번 올릴까요? 바로 1위 가능할 듯?]
[하지 마. 하면 죽인다. 진짜 죽일 거야.]
[엑시트최효명: ㅋㅋㅋㅋㅋㅋㅋㅋ]
[엑시트최효명: ㅋㅋㅋㅋㅋㅋ(이건 허민이)]
그때까지는 그렇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오후쯤 되어서 오랜만에 친구들이나 볼까 하고 외출 준비를 하려는데 다시 메시지가 날아왔다.
[권민헌선배: 실검 1위 축하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시 포털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니, 정말이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예능 PD 강대한, 그 이유는?』
『강대한 NBS 예능 PD가 1위를 한 이유를 알아보자!』
내가 모르는 사이 두어 시간 정도 1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웬 기사와 분석 블로그 글까지 떠 있었다.
“또 뭔 일이야…….”
무슨 기사라도 추가로 떴나 하고 봤더니, 아니었다.
[야! 하지 말랬지!]
[엑시트최효명: 저 별말 안 했어요. 진짜임 (넙죽)]
[엑시트최효명: 라방 중에 팬들이 물어봐서 잘 모르겠다고 했을 뿐이라고요]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 정말 오랜만에 엑시트의 채널을 찾아 들어갔다.
두 시간 전쯤까지 방송한 영상이 등록되어 있었다.
쭉쭉 돌려서 찾아보다 보니, 후반 정도에 문제의 장면이 찍혀 있었다.
『“어, 그럼 질문 좀 받아 볼게요. 어…… 아, ‘당잠사’요? 시즌6라. 그러게요, 저희 외삼촌께서는 아마…….”
“뭐야, 대한이 형이 시즌6 찍재?”
“메인 PD님은 권민헌 PD님이잖아. 대한이 형은 시즌6 말도 안 꺼냈어. 계획은 있다는데 아직 정확한 일정은 나온 건 아니라서요. 잘 모르겠네요. 혹시 제안이 오면 알려 드릴게요!”』
정말 그런 내용뿐이었다.
그렇지만 기사에 실린 글은 이랬다.
『……아이돌들에 이어 예능 프로그램마저 심폐소생한 강대한 PD가 ‘당잠사’ 다음 시즌에 대해서 기약을 주지 않는 상황에, 그가 참여를 할지 여부에 대해 네티즌들은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아니…… 의견이 왜 분분한 거야…….”
방수정 PD의 후계자는 내가 아니라 권민헌 선배고, <당잠사>도 엄연히 권민헌 선배의 작품인데.
왜 나를 걸고넘어지는 거야…….
[선배, 죄송합니다]
[권민헌선배: 뭐가?]
[선배 프로그램인데 왜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몰리는지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폰을 보고 오체투지하는 기분으로 사과했다.
[권민헌선배: 난 또 뭐라고]
[권민헌선배: 사과할 필요 없어. 네가 사과할 일도 아니고.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할 일이야]
[권민헌선배: 그러니까 넌 그냥 솔직하게 기뻐하기만 하면 돼]
아니, 사실 솔직하게 기쁘지도 않은데…….
PD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인기를 얻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그저 지금은 권민헌 선배에 대한 미안함이 앞서서, 반복해서 사과만 할 뿐이었다.
선배도 거듭 괜찮다고 말해 주고는, 주말 잘 보내라는 말로 정리했다.
어느 모로 보나 착한 선배의 모습이라, 난 그저 또 죄송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과 만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신 뒤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이제 내 이름은 완전히 내려갔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 화제성을…… 빨리 지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수는,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럴 때 네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AGD 앱아.”
스마트폰을 꺼내 앱 아이콘을 아무리 터치해도, 서버라도 터진 듯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눈앞을 수놓던 메시지도 사라진 지 하루 만에 매우 생활이 낯설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내가 내릴 선택이 옳은 것인지, 틀렸다면 어떻게 해야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그 전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해지는 것이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지만, 어쩐지 그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참, 이런 걸 보면 내가 어느새 이렇게 AGD 앱에 의지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해 반성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했다.
어쨌든 이렇게 챙겨 주는 선배를 위해서, 나는 무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야겠지.”
AGD 앱이 있어도 어차피 결정은 모두 내 몫이었다.
결론은 이미 내렸고, 그것이 어긋나지 않게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 * *
일요일을 보낸 뒤, 월요일이 되었다.
사무실로 올라갔을 때, 예능국 게시판에 커다랗게 인사발령 공지가 떠 있었다.
PD 몇 명이 모여 있는데, 그중에 낯익은 박주영 선배도 있었다.
“선배, 뭐 나왔어요?”
“어, 왔냐. 이것 봐.”
선배가 가리키는 곳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고 솔직하게 감동했다.
“정말로 밀어붙이셨네요.”
“서 국장님이 또 한다면 하시는 분이지.”
『예능 1팀장 권민헌』
현준영의 공석을, 권민헌 선배가 정말로 메우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축하드립니다, 선배!”
“축하드려요, 권 PD님!”
“잘했다, 권 PD!”
뒤에서 들려오는 인사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권민헌 선배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인사를 해대서 게시판 앞까지 오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선배, 축하드립니다.”
박주영 선배와 내가 진심을 담아 인사하자, 그는 쑥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다 너희들 덕분이야.”
“저희가 한 게 있나요.”
“<당잠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팀장을 달았겠어? 정말 고맙다.”
박주영 선배와 나에게 각자 악수를 하고서, 그는 국장실로 들어갔다.
“1팀도 이제 좀 안정되겠네.”
“그래도 너무 빠른 승진 아닌가?”
“현준영이 없어졌으니까. 빠르긴 해도 뭐, 1팀 그동안 붙잡고 있던 공도 있고.”
PD들이 흩어지면서 하는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준영이 해고 당한 뒤, 팀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음에도 1팀이 그 기간 동안 버텨 낸 것은 권민헌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하던 모든 프로그램이 정지되었음에도 팀이 와해되지 않은 건 온전히 그의 공이었다.
거기다 <당잠사>도 훌륭하게 부활시켰으니, 서인하 국장도 밀어붙일 명분은 충분히 있었으리라.
그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박주영 선배와 함께 순수한 기쁨을 느끼면서 우리 자리로 돌아갔다.
어쨌든 홀가분하고 간만에 뿌듯한 월요일이었다.
점심 정도가 되어서 권민헌 선배가 각 팀을 돌며 인사를 했다. 정민우 팀장에게도 와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이고, 권 팀장. 같은 팀장끼리 뭐 이리 고개를 숙여대. 그러지 않아도 돼. 그리고 1팀인데 뭐 누추한 5팀까지 오고 그래.”
장난스런 정민우 팀장의 대꾸에 권민헌 선배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래. 우리 애들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알지?”
“하하, 네. 그렇지 않아도 같이 점심이라도 먹고 싶은데, 데려가도 될까요?”
박주영 선배와 나를 가리키며 권민헌 선배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어휴, 1팀장님 분부대로 해야지. 5팀장이 권한이 있나.”
정민우 팀장이 저렇게 후배 놀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어쨌든 그건 100% 농담이었고, 우린 권민헌 선배가 인사를 끝마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같이 따라나섰다.
단골 국밥집으로 가서 뜨끈한 국밥들을 시켜 두고서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고맙다 하는 인사를 나눈 뒤 권민헌 선배가 이야기했다.
“국장님이 <당잠사> 시즌6 일정을 못 박아 주셨어. 내년 초에 방영하는 걸로 스케줄 잡고, 기획 들어가라고 일러 주셨어.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의 의향을 좀 묻고 싶은데.”
“전 괜찮습니다.”
박주영 선배가 먼저 대답했다.
“주영이 넌 입봉하라는 말 없어?”
“정 팀장님이 넌지시 준비 잘해 두라는 식으로만 이야기하셨는데, 아마 내년 초는 지나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시즌6까지만 같이 좀 부탁해.”
“그럼요. 당연하죠.”
박주영 선배의 대답을 들은 권민헌 선배가 나를 돌아보았다.
“대한이 넌 어때?”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어제부터 생각하고 있던 대답을 꺼냈다.
“죄송해요. 저는…… 시즌6 같이 못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