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마무리
“왜?”
왕이범은 그다지 격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서인하와 오래 알아온 왕이범이었다. 서인하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틈틈이 계속 의견을 밀어붙였던 거고.
다만 거절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좋은 기회야.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고. 지금 내 위치니까 자네를 본부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거지. 알잖아, 이 방송 업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거.”
이사진 내에서 신호현 이사의 입지가 조금 흔들리고, 그 덕에 왕이범의 발언력이 세진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똑같은 일이 왕이범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권력이란 늘 이동하는 법이고 때로는 무수한 숙청의 바람을 동반하기도 하니까.
신호현에 비해 똑바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왕이범이긴 해도, 작은 트집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내가 힘이 있을 때 최대한 자네를 밀어 주고 싶어. 이전에 했던 말, 적격이라는 말도 결코 그냥 한 말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고, 그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그런데 왜.”
“이유는…….”
서인하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긴 했지만 마땅히 결론이 내려지진 않았다.
“사실 저도 정확하게 설명을 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니, 설명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이유가 정확해질 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오늘 거절한 것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아니요, 그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본부장 자리를 거절함에 있어서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뿐.
“…….”
왕이범은 다소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 서인하도 죄송스러운 마음이라 그저 그가 이야기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래. 알았다.”
그다지 납득하지 않은 투로 왕이범이 이야기했다.
“이유를 듣고 싶은데 지금 말할 수 없다면, 다음에는 말해 준다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인하야.”
왕이범의 말투가 변했다.
“네, 선배.”
“이사이고 국장이고 하는 그런 딱딱한 자리 때문에 내가 너를 아끼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
“그럼요. 선배가 현역 시절부터 저한테 해 주신 게 얼만데요.”
서인하의 말투도, 태도도 변했다. 모시고 있는 이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한솥밥을 먹어 온 선배를 대하는 자세로.
“네가 생각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 정해지면 이야기해라.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언제든 도울 테니까.”
“감사합니다. 꼭 말씀드릴게요.”
“그래. 기다리마.”
왕이범이 일어나자 서인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범이 다가와 서인하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냥 어깨만 두들겨 주곤 뒤돌아섰다.
많은 감정이 담긴 그 행동에 서인하는 평소보다 깊게 묵례를 하고 이사실을 나왔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저런 분이 위에 있어 줘서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 고마운 분의 제안을 거절해야 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서인하는 차라리 홀가분했다.
본부장 자리를 거절한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적어도 서인하의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다만 시기와 계획, 절차의 복잡함 때문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왕이범도 눈치채고,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일 수도 있었다. 오래 봐 온 왕이범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 죄송합니다.”
다만, 왕이범에게 또 고민을 안겨 주었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한 번 문을 향해 스스로 묵례를 했다.
* * *
방수정 PD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정말이지 빠르게 돌았다.
[배우류준혁: 방PD님이 들어오셨다던데 정말이야?]
[엑시트최효명: 우리 다 가고 회식 자리에 오셨다면서요?]
내가 알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벌써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 나한테 메시지를 던져 왔다.
[그렇지 않아도 출연진들과 인사를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배우류준혁: 연락처는 그대로래? 연락이나 해보게]
[당분간 한국에 계신다고 하셨으니까 연락 받으실 거예요]
효명이보다는 확실히 준혁이 형님이 방수정 PD와 연이 많았다. 그렇게 그가 조용해진 틈을 타서, 효명이가 개인톡으로 말을 걸어왔다.
[엑시트최효명: 형님이 좀 서운해하시더라고요. 회식 때 왔는데 왜 자기들 있을 때 안 불렀냐고]
[촬영 중이었잖아. 얼굴 찍히는 건 아직 별로라고 하셨대]
나도 회식이 끝나갈 즈음에야 들은 이야기라서, 미리 알려 줄 수가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엑시트최효명: 형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뭐]
[엑시트최효명: 잘 지내신대요? 미국에서 공부하신다던데 (갸웃)]
[잘 지내시는 것 같더라. 당잠사 다시 만들어진 거 뿌듯해하셨어. 그게 또 권 선배니까]
방수정 PD와 권민헌 선배의 관계는 이미 방송 업계 전체로 퍼진 상태.
<당잠사> 시즌5를 이렇게 잘 되살려 놨으니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 방수정 PD가 회식 자리에 나타나서 직접 <당잠사>의 ‘인계’를 공식 선언했다는 이야기도 퍼져서…… 아니, 사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퍼뜨려서, ‘방수정 PD의 후계자’의 이름값도 올라갔다.
[엑시트최효명: 시즌6는 아마 내년이겠죠? 그사이에 앨범 내고 활동하면 되겠네]
[앨범 나와? 싱글 말고?]
[엑시트최효명: 정규 앨범 낼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메시지를 읽는 도중에 돌연 전화가 걸려왔다. 효명이였다.
나는 주변 눈치를 봤다가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뭐야, 갑자기 왜 전화야.”
“메시지로 쓰기에는 좀 민감해서요.”
중요한 이야긴가.
“형, 저 재계약 마쳤어요. 다른 멤버들도 전부.”
“아, 그래? 잘했다. 축하해.”
“그리고 내년부터 또 월드투어를 돌 것 같아요.”
“헐…… 또 월드투어?”
엑시트 전원의 재계약보다 그 소식이 더 놀라웠다.
아니, 해외에서도 반응이 정말 핫한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 투어를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내년부터 또 해외를 나가?
나도 내 일처럼 기뻤다.
“야, 축하해. 진짜 축하해. 월드투어면 몇 달 동안 또 해외에서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요. 아직 얼마나 나가 있을지 확정은 안 났는데, 내년 봄쯤부터 시작해서 가을까지는 해외를 계속 다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권 PD님한테 잘 말해 주세요. 시즌6 일정 빨리 좀 결정해 달라고.”
그 와중에도 <당잠사>를 걱정해 주다니.
“이렇게 세계급으로 커가는 아이돌께서 우리의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야.”
“히히. 그럼 선처 좀 해 주십쇼. 시즌6 나 빼고 갈 거 아니죠?”
그건 메인 PD님의 뜻이겠지만. 나는 웃으면서 꼭 전달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좋은 성장을 해 가는 이들은 효명이뿐만이 아니었다.
『커버계 미투버 ‘아온’ 데뷔 앨범, 첫 주 3만 장 판매고 기록!』
『‘아온’ 데뷔 앨범, 음원 차트 줄 세우기!』
아온은 스캔들 기사를 이겨 낸 후, 꽃길만 걸었다. 무엇보다 데뷔 앨범이 성공한 게 좋은 한 수였다.
효명이가 만들어 준 ‘블루스카이’와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이 1, 2위를 시간마다 바꿔 가는, 사실상 독주 체제.
그 앨범 중에서도 호평을 받은 것은, 이제 남자친구임이 공표된 보우건이 피처링한 곡이었다.
―이 곡 만들다가 눈 맞았음ㅇㅇ 내가 봄ㅇㅇ
―킹리적 갓심 인정합니다
힙합풍의 달달한 러브송인데, 내용도 썸을 타는 남녀 간의 밀당을 노래하는 가사였다.
노래 자체도 좋았고, 결과적으로 어린 10대, 20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각종 커버계 BJ들에 의해 커버가 되었다.
“커버계에서 시작해서, 이제 본인 노래가 커버가 되는 위치로 왔네. 대단해, 아온 씨도.”
민희의 평가를 팀원 모두가 공감했다.
<언더커버 싱어>와 <당잠사>라는 두 번의 예능을 겪으면서 그녀에게 이끌린 상황이라, 모두가 그녀의 성공을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덤으로 보우건도 곧 데뷔 싱글이 나온다고 했으니, 그쪽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 백종현도 새 드라마가 곧바로 결정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하니, <당잠사> 팀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는 모두가 즐거운 소식에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사무실 정리를 하는 중에 문을 두드리고 나타난 인물이 있었다.
“오늘 마지막이라며?”
방수정 PD였다.
그녀는 캐리어 같은 것을 끌고 들어왔다.
권민헌 선배가 벌떡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응. 4시간 뒤에 출국. 가기 전에 서 선배 인사하러 왔다가 오늘 사무실 뺀다길래 들렀어. 어휴, 정리한 거 맞아?”
열심히 청소와 정리 중이었기 때문에 어지럽기는 사실 더 어지러웠다.
“금방 치울 겁니다.”
“사무실은 쓰고 나서 깨끗하게 돌려줘야 하는 법이야. 알지?”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는 선생처럼 그렇게 말한 뒤, 방수정 PD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당잠사> 시즌5를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해 줘서 고마워. 고생했고, 다음 시즌도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히…… 돌아가세요. 건강하시고요.”
“응. 수고해, 다들.”
방수정 PD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권민헌 선배를 향해 인사한 뒤,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여긴 순간, 그녀는 싱긋 웃고선 문을 닫았다. 난 한참을 그 문을 보고 서 있었다.
“야, 뭐해. 빨리 챙겨.”
“아, 예. 선배.”
박주영 선배가 정신을 일깨워 줘서 나도 급히 정리로 돌아왔다. 마지막 방수정 PD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도 금방 잊고.
모두가 짐을 챙긴 뒤에는, 박주영 선배가 나서서 권민헌 선배를 재촉했다.
“한마디 하시죠, 선배.”
“뭐? 아까 방 PD님이 해 주고 가셨잖아. 그거면 되지 않아?”
“에이, 마지막 날인데, 그동안 이끌어 주신 메인 PD님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아?”
박주영 선배가 그렇게 분위기를 이끌어 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한마디 하시죠!”
“아이고, 팔 빠지겠습니다!”
나와, 꽤 능청스러워진 오지환이 거들자 작가진도 나서서 보챘다.
권민헌 선배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그나마 차분한 눈길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이젠 지워져서 벽 쪽으로 밀어 둔 화이트보드를 한차례 보고,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입봉한다고 이리저리 고생도 많이 시키고, 믿음직하지 못한 짓도 많이 한 것 같은데, 다들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워. 시즌6도 이왕이면 너희랑 같이 만들고 싶다. 그러니까…… 몸 건강히 지내자. 다들.”
“예!”
“하하하! 또 봅시다!”
너무나 정석적인 인사에 우린 다들 웃어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선배다운 마무리 인사였다.
* * *
이번 <당잠사>는 보너스 휴가를 받지 못했다. 그 대신, 서인하 국장의 전권으로 팀원들에게 하루 특별 연차가 주어졌다.
목요일까지 모든 마무리를 하고 5팀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금요일에는 오전 늦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으로 오르기 직전인 11시.
<당잠사> 막판에 놀란 일들이 터져서 그런지 어째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늦잠 자고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제야 좀 실감이 되었다.
“……밥이나 먹자.”
찬물로 샤워를 한 다음, 아점을 만들기 시작했을 즈음에 폰에 몇 개의 푸시가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민희작가: 일어났음?]
[이민희작가: 권 피디님 기사 떴으니까 봐봐]
[이민희작가: 너만 안 봄]
민희였다.
기사? 무슨 기사?
멍한 머리를 몇 번 움직여서야, 최종화 전에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 것을 기억해 냈다.
민준기 기자가 아는 기자를 소개해 줬는데, 권민헌 선배에게 연결하자 <당잠사>에 관한 특별 칼럼 같은 형식으로 기사가 작성될 예정이라고 했었다.
그 기사 공개가 오늘이었던가?
단톡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구은경 작가가 공유한 주소가 있었다.
“별다른 내용 있나…….”
하고 들어가서 확인한 내용에, 나는 두뇌에 조금 남아 있던 잠기운이 휙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당잠사’가 이렇게 훌륭하게 부활하리라고는 업계인도, 시청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힘든 일을 권민헌 PD가 이렇게 해냈다.
분명 방송사 안팎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당잠사’를 다시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을 한 걸까.
[권민헌 PD] “사실 ‘당잠사’를 다시 만들자고 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다른 이가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