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옛 팀
“……방 PD님!”
그녀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으셨나. 유수현 작가와 미팅을 했던 권민헌 선배가 돌아와서는, 귀국하려면 얼마 더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 줬었는데.
그런 혼란을 담은 눈으로, 우리는 모두가 이 사건을 가장 잘 알 사람을 쳐다보았다.
서인하 국장은 역시나 여유로운 얼굴로 호프를 가리켰다.
“안 들어갈 거야? 2차 해야지, 2차.”
그가 들어가서 방수정 PD와 인사를 하고 옆에 앉자, 가게 안쪽에서 손을 닦으며 유수현 작가가 나타났다.
“다들 왔네? 자자, 앉아, 앉아.”
유수현 작가까지 모이자, 모두가 서둘러 방수정 PD를 둘러싸고 자리를 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귀국하신 겁니까?”
“유 작가님이라도 먼저 말씀을 해 주셨으면……!”
작가진이 질문을 쏟아붓는 와중에, 권민헌 선배를 비롯한 연출진도 모두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방수정 PD는 그런 우리를 둘러보다가 짐짓 엄한 표정을 해 보였다.
“뭐야, 퇴사했다고 이제 선배도 뭐도 아니라 이거야? 인사 안 해?”
“안녕하셨습니까!”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주영 선배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자, 나도 술기운을 빌려 냉큼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방수정 PD가 폭소를 터뜨렸다.
“주영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한이 너도 많이 뻔뻔해졌구나. 하긴, 입봉 PD가 좀 달라지기도 하고 해야지. 안 그래?”
“어…… 보셨습니까?”
“그럼, 봤지. 가만 둬도 알아서 체크했을 텐데, 누가 너희 소식을 좀 전해 줘야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린 방수정 PD의 시선 끝에는, 점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주문하는 서인하 국장이 앉아 있었다.
시선이 모인 것을 눈치챈 그가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연락해야지 뭘 어째. 쟤가 먼저 연락할 스타일은 아니잖아. 안부도 물을 겸, 저가 버리고 간 애들 잘 살고 있다고 알려 준 거지 뭐.”
“버리고 가다뇨.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지나친 건 그렇게 다 버리고 떠난 너지.”
서인하 국장과 방수정 PD는 상하 관계였던 전보다 지금이 더 끈끈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계속 그렇게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이 괜히 깊은 여운을 주었다.
그 감동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권민헌 선배인 듯했다.
그는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수정 PD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방수정 PD는 그런 그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그, 그게 아니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어서요. 방 PD님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 몰라서…….”
“내가 죽었어? 언젠간 봤겠지. 근데 얼굴 보면 너한테 꼭 해 줄 말이 있었어, 민헌아.”
“예. 말씀하세요.”
방수정 PD의 표정이 돌변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너희 멋대로 <당잠사>를 만들어? 감히 내 프로그램을?”
“…….”
“…….”
테이블 위에 적막이 흘렀다. 전세를 냈기에 호프집 안에 우리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분위기를, 다른 손님이 있었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했을까.
권민헌 선배가 얼어붙은 채 뭐라고 이야기도 못하던 찰나,
“맥주 나왔습니다.”
점원이 눈치 없이 그 적막을 깨고 맥주를 가지고 왔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면서 팀원들이 그 맥주를 각자의 자리에 올려 두는 사이, 방수정 PD는 권민헌 선배를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서인하 국장도, 유수현 작가도 나서지 않는 바로 그때.
“잘 만들었으니 봐줄게.”
방수정 PD가 씨익 웃으면서 잔을 권민헌 선배에게 내밀었다.
그제야 그녀가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고, 권 선배의 얼굴이 티가 나게 녹아내렸다.
“아, 아아, 아아…… 방 PD님. 정말…….”
“왜, 놀랐어?”
“놀라죠, 그럼…… 어휴.”
몇 번이나 심장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한 다음에야 권민헌 선배도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분위기가 풀리고, 그제야 모두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 제자 가지고 놀리는 스승이 어디 있냐?”
“제자고 후계자고,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거든요. 언론에서 멋대로 갖다붙인 거지.”
“원래 누구누구의 후계자는 그런 식으로 정해지는 거야.”
서인하 국장은 뿌듯하다는 듯 낄낄 웃은 뒤에 벌떡 일어났다.
“자자, 주목.”
빈잔을 숟가락으로 두들여 제작진의 시선을 전부 모은 다음,
“아까는 출연진도 다 있어서 말 못 했고, 지금 알리겠습니다. 권민헌 PD는 특히 귀를 열고 들어.”
“어, 예.”
권민헌 선배가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당잠사>가 6%를 넘을 수 있을까?”
9화, 최종 10화가 남은 상황.
하지만 사실 팀 내부에서 6%는 아슬아슬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래, 사실상 애매하지.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예, 그렇습니다.”
“우리 첫 목표가 몇 프로였지?”
“6%였습니다. 시즌4의 두 배.”
이사진이 원한 결과였지만, 처음부터 쉽진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당잠사>의 대들보인 방수정 PD도 아닐뿐더러, 시즌4라는 똥도 치워야 하고.
5% 후반대의 여기까지 끌어올린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사진에서는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화제성을 얻어서 그렇게 지원을 해 줬건만 성과를 제대로 내지도 못한 거니까.
“그래, 그 목표는 다음 시즌으로 이루자.”
그러니 다음 시즌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응? 뭐라고?
“시즌6, 만들 수 있습니까?”
내가 묻기도 전에 권민헌 선배가 벌떡 일어섰다.
서인하 국장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오늘 시즌6, 제작 오더 내려왔다. 이사님이 괜히 회식 자리까지 왔겠어? 이 카드까지 주고?”
권민헌 선배에게 갔던 왕이범 이사의 개인 카드는 서인하 국장이 갖고 있었다.
그 카드의 의미가, 친절히 회식 자리에 왕림한 의미가 그런 거였다.
그 와중에도 방수정 PD나 유수현 작가는 전혀 놀라지 않고 있었다. 아마 상황을 봐서는 이미 서인하 국장에게 귀띔을 들은 것 같았다.
서인하 국장이 아직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있는 권민헌 선배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권 PD. 다음 시즌도 준비 잘해 봐.”
“그래, 민헌아. <당잠사>는 이제 네 브랜드야. 잘 부탁해.”
서인하 국장에 이어 방수정 PD까지 그렇게 잔을 올리자, 권민헌 선배가 굳은 얼굴로 둘을 쳐다보았다.
쳐다보더니,
“어, 운다. 선배, 울어요?”
박주영 선배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고, 민희가 티슈를 왕창 뽑아서 그에게 넘겼다.
“흑…… 큭…… 아, 안 울어…….”
“울잖아요, 선배.”
권민헌 선배의 눈에서 정말이지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쩐지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잠사>라는 큰 브랜드의 메인 PD가 되고, 우리 팀원들이 아무리 열심히 받쳐 줬다고 하더라도 권민헌 선배가 속으로 얼마나 맘고생을 했을까.
애초에 그런 말을 잘 하는 성격도 아니고, 안으로 쌓아 두는 스타일인 게 분명한데.
저 눈물은, 지금 바로 이 순간 그 모든 감정이 녹아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 눈물을 흘려서 방수정 PD가 웃고, 서인하 국장이 구박을 한 다음에야 권민헌 선배가 벌게진 눈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자, 자, 잘하겠습, 니다…….”
“그래그래, 잘해 보자고.”
“잘해 봐.”
서인하 국장이 잔을 부딪히고, 방수정 PD와도 건배를 한 다음, 권민헌 선배는 원샷을 하고서 벌떡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까?”
“수정이 얘가 신입 시절에 많이 울렸어.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닌가 보네.”
내 물음에 서인하 국장이 낄낄대며 대답했다가 방수정 PD의 눈길을 받고 잠잠해졌다. 역시나, 내 주변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제가 한번 가 보겠습니다.”
박주영 선배가 일어나서 쫓아 나갔다. 나도 같이 가려고 했다가, 서인하 국장이 손을 들어 말렸다.
“주영이한테 맡겨. 그래도 너 오기 전까지 민헌이랑 가장 많이 붙어 다녔던 앤데. 잘 알 거야.”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방수정 PD가 내 앞으로 옮겨 왔다.
“너였다며? <당잠사> 다시 만들자고 기안한 사람.”
“들으셨습니까?”
“듣고서 역시나 한 거지.”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가 잔을 내밀어 오자, 나는 일단 건배를 하고서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방수정 PD의 얼굴은 확실히 예전보다 조금 편해 보였다.
원래는 바늘 하나가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빡빡한 분위기를 풍겼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뭐랄까,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현준영을 따라다니다가 강남에서 만났을 때의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당잠사>를 다시 만든다는 이야기를 수현이한테 들었을 때, 어쩐지 네가 나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너라면 왠지 그럴 거라고 여겼거든. 그다음에 서 선배한테 전화가 와서 회식에 부르길래 물었더니, 맞다고 하시더라고.”
“어디도 말씀 안 하실 것 같이 구시더니, 다 이야기하고 다니시네요.”
저쪽에 앉아 있는 서인하 국장을 슬쩍 노려봐 주었지만,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카메라 감독이랑 술을 마셨다.
“맘에 드는 후배를 키우는 데는 전혀 주저함이 없는 분이시거든, 저분이.”
“설마요…….”
“회사 안 다니는 나도 알겠던데. 여기저기서 너에 대한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리고.”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뒷머리만 긁었다. 방수정 PD가 들었을 이야기가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굳이 묻기에는 부끄러웠다.
“다, 네가 내 기대보다 더 잘하고 있다는 거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되묻지 않고, 빈 그녀의 잔의 맥주를 따랐다.
“강남에서 봤을 때 내가 한 이야기 생각나?”
“……관행에 대해서 말씀하신 거요?”
“그래, 그거. 현준영은 그 관행을 휘두르다가 결국 바닥까지 침몰한 거지만, 사실 이 바닥에는 여전히 그런 일이 많아. 너도 이젠 어느 정도 알 거야.”
그 말대로였다. 약 2년 동안 얻은 경험치 중에는, 이 방송 업계의 더러운 면을 통해 쌓은 것도 많았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제작자들의 환경이 얼마나 좌지우지되고 있는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 관행들을 개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만, 여전히 현준영 같은 작자들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커 나가는 게 PD라고는 하지만, 사실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긴 하지. 내가 그때 차마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것도, 어차피 네가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어.”
“예……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주로, 현준영 PD님 덕분이지만요.”
“이젠 PD도 아니지, 그 작자는. 속 시원하긴 하더라. 나하고 라이벌이다 뭐다 비교할 때부터 맘에 안 들었거든.”
실력 면에서는 서로 강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됨됨이 차원에서 둘의 관계는 거의 사람과 지푸라기 정도 아닐까.
방수정 PD의 말에 나는 무언의 동의를 하면서 잔을 부딪쳤다.
“아무튼, 강대한. 너는 내 예상보다 훨씬 잘 컸어. 앞으로도 더 잘 클 거야. 그러니까…… 더러운 것 보더라도, 지금처럼만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해. 그럼 더 잘될 거야.”
“감사…… 합니다.”
문득 깨달았다.
권민헌 선배의 스승인 방수정 PD.
본인들이 스승과 제자라고 지칭하진 않지만, 모두가 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가 두 사람 사이에는 쌓여 있다.
그런데, 난 아니다. 역사라고 하기엔 방수정 PD와 부딪힌 날들이 길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다.
나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서인하 국장도, 정민우 팀장도 있긴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스승이라.
나한테 스승은 방수정 PD…… 아닐까.
철없고 겁없던 1년차의 패기만 높던 신입에게, 이런저런 생각을 스스로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준 사람이니까.
AGD 앱이 날 단숨에 성공시켰다지만, 내 첫해를 방수정 PD 밑에서 보내지 못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저, 방 PD님.”
“왜.”
“연락드려도 됩니까?”
지금껏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물음도 큰 용기였다.
“나 연하는 취향 아닌데?”
“…….”
그 용기를 무참히 잘라 버리셨다.
“농담이야.”
방수정 PD는 호쾌하게 맥주를 다 비우더니, 내 잔도 눈짓했다. 나도 응답하듯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생맥주 두 잔을 새로 주문하면서, 방수정 PD가 말했다.
“내 번호 안 바뀌었어.”
“……옙.”
그 잔을 또 다시 한 번에 비우고, 또 비웠다.
옆에서 박주영 선배가 너 왜 그래 하면서 옆구리를 찔러댔지만 모르는 척하고 계속 술을 마셨다.
곧 권민헌 선배도 돌아오고, 그와도 술을 나누고, 박주영 선배에게도 억지로 술을 먹이고.
즐거운 회식 자리였다.
* * *
『<시청률is>‘당잠사’ 베트남 편 최종 통합시청률 5.9%!』
『‘당잠사’ 순간 최종화 최고 시청률 6.5%! 스페셜 편도 기대 폭발!』
『훌륭하게 부활한 ‘당잠사’ 다음 시즌은 언제?』
최종 10화가 방영되는 날, 서인하는 권민헌을 통해서 특별 편성된 11화 스페셜화 편집이 완료됐고, 편성부로 넘어갔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 보고를 받고 나서, 서인하는 10화 최종 시청률에 대한 자료까지 들고 왕이범을 찾았다.
보고서를 넘겨본 뒤 왕이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처음에 좀 걱정하긴 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잘해 줬어. 다음 시즌도 그대로 가면 되겠군.”
“출연진도 제작진도, 일정 확인을 잘해 두겠습니다.”
“그래.”
보고서를 내려놓은 왕이범이 서인하를 물끄러미 보았다. 서인하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보던 그들 사이의 대립을 깬 것은 왕이범이 먼저였다.
“그래……. 이제 결론을 내렸겠구나 싶긴 한데. 어때?”
“예. 내렸습니다.”
“오래 걸렸군. 들어 보지.”
서인하는 짧게 숨을 내쉰 뒤, 말했다.
“본부장 자리, 거절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