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당장의 캐스팅
물론 그 많은 인물을 일일이 대입하진 않았다.
팀원들이 전부 모여앉아, 태블릿과 종이 서류를 보면서 일차로 걸러내고, 이차로 이전 출연진과의 비교를 통해 걸러내고, 삼차로 현재의 확정 출연진과의 케미를 분석하면서 걸러냈다.
그렇게 남은 것이 12명의 인물.
남녀가 골고루 섞여 있긴 하지만 이 중에서 일단 남자 출연진부터 골라내기로 했다.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한 명씩 이름을 기획안에 써 넣었다.
[90%]
[87%]
[91%]
.
.
차례대로 전부 이름을 써 넣은 뒤, 최종적으로 가장 높은 확률의 이름을 확인했다.
『백종현』
설명을 보니 이제 데뷔한 지 2년 정도 되는 신인 배우였다. 타사 드라마에 몇 번 조연으로 출연을 했는데, 최근 연애 버라이어티에 몇 번 얼굴을 보이면서 주가가 상승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백종현은 어떻습니까?”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 나도 흐름을 타 그렇게 말을 꺼냈다.
“백종현? 아, <러브트러블>에 나온 애 말이죠?”
구은경 작가의 말에 도채린 작가가 태블릿을 움직여서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얼마 전 끝난 연애 예능인데요, 여기서 나와서 괜찮게 인기를 끌었어요. 여기, 이 장면에 여자들이 껌뻑 넘어갔다던데요.”
새침하게 말하지만 도채린 작가의 표정도 풀려 있었다.
그녀가 찾아낸 영상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3분 정도 되는 클립 영상이었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게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하는 거라면, 타고난 꾼인걸.”
민희가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 정도야?”
“만약 본능적인 거라면 살면서 몇 명의 여자를 자기도 모르게 꼬셔왔는지 모르겠는데?”
동의를 구하듯 작가들을 보자, 그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여우짓인데. 남자들도 이런 여우짓을 하거든.”
영상 속에서는 자연스레 상대 여자에게 미소를 짓거나, 터치를 하거나, 의미심장한 말을 하거나 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대로 방송되었다는 말은 연출이거나 리얼이거나, 결국 둘 중 하나였다.
“<러브트러블>은 대본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그래서 때론 너무 리얼한 연애관이 그려져서 욕도 먹고.”
“아, 나도 한번 본 것 같은데. 남자 하나가 여자 둘 두고 바람을 피웠다가 걸린 게 이거지?”
박주영 선배도 덧붙이자, 그 방송에 대한 신뢰는 들었다. 하지만 백종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와는 다른 문제였다.
AGD 앱이 선택한 거라면 분명 괜찮은 캐스팅이라는 말일 텐데…… 선뜻 밀고 나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지금 있는 멤버 중에서는 가장 페이스도 말끔하고 신선한 것 같은데. 저 행동이 연기인지 진짜인지는 만나 보면 알겠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권민헌 선배였다.
그는 프로필을 더 훑어본 뒤에 민희에게 넘겼다.
“일단 1순위로 한번 컨택해 봐. 판단은 민희한테 맡길게.”
“네, 알았어요.”
내가 망설일 필요도 없이 그렇게 스무스하게 지나가 버렸다. 내 제안이었기에 나는 슬그머니 권 선배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곧장 이야기를 바꿨다.
“문제는 나머지 여자 출연진이야. 아이돌 애 중에서도 마땅한 애가 없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다 너무 얌전한 이미지들이에요. 신선한 페이스는 몇 명 있긴 해도…….”
“지금 여성 출연진 중에 밝은 이미지가 없어서, 이왕이면 쾌활하고 밝은 성격의 걸그룹이면 좋겠는데…….”
박주영 선배가 다시 프로필을 뒤적이는 사이, 나는 기획안을 다시 만졌다.
일단 백종현을 추가하고, 여성 후보군을 한 명씩 리스트에 올려봤지만…….
“대한아, 어때?”
때마침 권 선배가 다시 물어와서, 나는 기획안 위의 숫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딱 눈에 차는 사람은 없습니다.”
[94%]
누굴 조합하더라도 그 이상 넘어가는 확률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적어도 ‘95%’는 넘어야 밀어붙일 확신이 생길 텐데, 이렇게 되니 백종현이라는 선택도 영 꺼림칙했다.
차라리, 12명의 후보군 중 가능한 경우의 수를 전부 대입해 볼까 하고 생각하던 중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프로필 더 들어올 테니 기다려 보자.”
권민헌 선배는 그렇게 깔끔하게 결정하고는 회의를 끝마쳤다.
“……?”
난 묘한 기분을 느끼며 일어서야 했다.
* * *
추가로 프로필이 더 들어오고, 각종 회사에서 문의 전화가 오면서, <당잠사> 제작은 점차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언론을 움직여 본 효과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도 나왔다. 회사 내에서 다소 부정적이던 의견들마저 싹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선배, PPL은 이쪽으로 가 보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렇게 해.”
협찬과 광고가 더 붙어서 제작비가 불어나자, 여행지에서의 환경을 좀 더 욕심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분은 편집하고, 여기를 좀 더 붙여서 늘리자.”
“그럼 앞부분이랑 다소 겹칠 것 같은데, 차라리 여기 녹화본을 교차 편집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네. 그렇게 해.”
사전 촬영분을 손보기 위한 편집실 배정도 한결 더 쉬워졌다.
다 좋은데.
“……선배.”
편집실에 앉아서 나는 박주영 선배를 불렀다.
“왜. 졸리냐? 졸리면 퇴근해. 나는 좀 더 보고 갈 테니까.”
컵라면을 먹으면서 마우스를 만지고 있던 박주영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요즘 권민헌 선배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뭐가?”
“제 말을 너무 잘 들어주십니다.”
박주영 선배가 인상을 쓰며 나를 돌아보았다.
“뭐래. 권 선배는 원래 다른 사람 말 잘 들어줘. 남의 말 잘 안 듣는 방수정 PD님 밑에서 배운 사람답지 않게.”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저도 그건 아는데. 뭐랄까, 최근 들어서 제가 제시하는 의견을 너무 오케이를 잘해 주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떠올려 보니, 인터뷰가 성공한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서브로서 보조를 하고 있는 입장인데, 내 의견을 너무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준다는 것 같달까.
“난 또 뭐라고.”
박주영 선배가 피식 웃었다.
“그만큼 너를 믿는다는 거겠지. 이렇게 너랑 붙어서 일해 본 거는 처음이잖아. 말로만 들었던 걸 옆에서 겪으니까, 신뢰가 생긴 거 아니겠냐.”
“……그런 걸까요.”
“아니면 뭐겠어. 권 선배라고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닌데, 까마득한 후배 말을 그렇게 잘 들어주는 이유가 따로 있겠냐.”
하긴 그렇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고 있는 거라면, 결코 나쁜 일도 아니고.
“음. 쑥스럽네요.”
“나도 부끄럽다, 인마. 작업 방해되니까 썩 꺼져.”
“옙.”
권민헌 선배와 이렇게 붙어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는 것은 나인데, 그런 사람이 나를 신뢰해 준다니.
“……<당잠사> 하길 잘한 것 같다.”
비록 AGD 앱은 가지 말라고 한 길이지만, 이 길이 맞는 길임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백종현과 미팅을 하고 온 민희는 흐뭇해하는 얼굴이었다.
“좋은 의미로 꾼이더라고요, 걔는. 누구씨랑 다르게.”
저 누구씨가 역시 나인가…….
민희와는 아직 따로 이야기할 만한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한번 시간을 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더욱 미루는 건 서로 힘들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대화가 이어졌다.
“나도 지인들 통해서 알아봤는데, 평소 생활부터 그렇다더라.”
“방송에 나온 모습이 꾸민 게 아니라 진짜라는 거죠.”
“헐렁한 면도 있고, 괜찮을 것 같아.”
권민헌 선배가 아는 루트로 얻어온 정보까지 합쳐져서, <당잠사> 시즌5의 일곱 번째 출연진이 정해졌다.
기획안에 이름이 오른 뒤, 나는 권민헌 선배와 함께 서인하 국장에게 보고를 하러 갔다.
“한 명만 남았네. 후보군은 있어?”
“현재 고르고 있습니다.”
“쉽지 않지?”
“각오는 했지만, 그렇네요.”
“그래, 입봉이란 게 쉽지가 않아. 거기다 온 방송 업계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 그럴 거야.”
서인하 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나 보면 분명 해서 잘했다고 할 날이 올 거니까, 좀 더 힘내봐. 물론 얼마 안 남았으니 그것만 주의하고.”
이게 격려인지 압박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두 개 다겠지.
우리는 주의하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국장실을 나섰다.
“……프로필 좀 더 뒤지자.”
“예. 저도 주변에 닥치는 대로 알아보겠습니다.”
사무실로 내려가서, 우리는 다시 8번째 마지막 출연진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백종현이 정해진 이상, 나머지 한 명의 톱니바퀴만 맞으면 된다.
[93%]
현재 캐스팅의 완성 확률이다.
최적의 캐스팅을 찾고 있지만, 들어오는 프로필들을 아무리 대입해도 95%를 넘어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이들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일까.
“오디션을 보는 건 어떨까요. 간단한 미팅이라도요.”
“면접까지는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러자.”
결국 괜찮다는 판단이 드는 후보군을 만나서 면접을 보았다.
역사에 남는 대역작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까탈스럽게 보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94%]
AGD 앱은 고작해서 1% 정도만 왔다 갔다 했다.
“까탈스러운 앱 같으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노려보고 있던 앱을 얼른 주머니에 넣고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길에 내려주시면 됩니다.”
“집 여기 아니지 않아? 좀 더 걸어 들어가야 할 텐데.”
“머리도 좀 식힐 겸 걸어가려고요.”
“뭐, 그래.”
면접을 다녀오는 길에 권민헌 선배의 차를 얻어탔다. 그는 굳이 먼 길을 돌아서 나를 집까지 태워 주는 배려를 해 주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잘 쉬어.”
그가 손을 흔들고, 차를 출발시켜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브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메인이라니. 이런 메인 밑에서라면 평생 일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헛생각을 하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집으로 향했다.
아직 밤공기가 찬 때였다. 하지만 찬 바람이 도움이 되었다.
복잡했던 머리가 밤바람과 음악 소리에 조금씩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템을 쓸까.”
최적의 캐스팅을 위해 필요한 부족 확률.
6%의 그 확률을 찾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역시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힘든 단계까지 온 듯했다.
사실 이번 <당잠사> 시즌5 제작에 있어서는, 아이템까지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확률 보기는 상황에 따라 발현되는 면이 크지만, 아이템 사용은 어디까지나 내 의지다.
포인트만 있다면, 내 의지대로 확률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내 프로그램이 아니란 말이지…….”
난 어디까지나 서브 PD. 메인은 권민헌 선배다.
발안은 했지만 그가 메인인 이상, 내가 아이템까지 써서 길을 만들어 내는 건 어쩐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막내 PD일 때는 내 능력을 보이고 싶어서라도 아이템을 썼다. 건방져 보일 수도 있으나, 옳은 방향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옳다는 확신 자체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그래도 쓸까.”
그럼에도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은, 아이템을 쓰면 이 막다른 길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 방법을 줄 테니까.
“…….”
문득 길을 멈춰 섰다.
내가 언제 이렇게 AGD 앱에 기대게 된 것일까.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를 앱에, 정체도 모를 앱에 의지하게 된 것일까.
애초에 이 앱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어떻게 내 폰에 깔린 거지?
원초적인 고민들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서둘러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당장의 캐스팅이지.”
때마침 분위기를 전환하듯 이어폰의 음악이 바뀌었다.
최근 즐겨 듣고 있는, 아온의 ‘블루스카이’였다.
하늘이 쾌청한 날처럼 시원시원한 곡은 그저 듣고만 있어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팀원들도 다들 즐겨 들어서, 나중에 방송에서 배경 음악으로 써먹자고 이야기를 나눌 정도…….
“응? 아니, 잠깐만.”
다시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든 생각에, 좌절감마저 들었다. 너무 멍청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밝고 쾌활한 성격의 걸그룹…… 걸그룹은 아니지만,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