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89화 (89/200)

89화 0%의 확률

AGD 앱을 만난 이후로 난생처음 보는 확률이었다.

눈을 몇 번 끔뻑인 다음, 다시 보았지만 그렇다고 확률이 변하진 않았다.

[0%]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낮은 확률은, 현준영이 <언더커버 싱어> 팀에 지원 나왔을 때 본 ‘10%’였다.

그때도 90%의 부족 확률을 이겨 내고 어떻게든 방송을 성공시켰는데, 이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확률이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 아닌가?

내 깨달음을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0% 확률을 달성하였습니다.]

[다방면으로 확률 상승 여부를 분석합니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다행히, ‘0%’가 뜬 것은 AGD 앱조차 당황스러운 건지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려 했다.

나는 허공만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 걸린다고 했으니, 지난 ‘오늘의 꿀팁’만큼의 시간은 아마 소요가…….

[확률 상승 여부에 대한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메시지가 연속으로 나타났다.

[확률 상승 가능성이 없습니다.]

[확률 보기가 종료됩니다.]

스륵―

허공의 숫자가 은근슬쩍 녹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애써 유수현 작가의 이름을 써 넣은 초안뿐이었다.

“…….”

난 할 말을 잃었다.

그 후, 몇 번이나 유수현 작가의 합류 가능성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AGD 앱의 메시지는 동일했다.

[확률 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확률 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나중에는 메시지에서 아주 조금 짜증스러움이 느껴졌다.

[이전에 사용한 내역은 확률 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적당히 하라는 시스템의 기분이 느껴져 확률 보기 사용은 중지했다.

그럼 정말로 유수현 작가가 <당잠사> 시즌5에 합류할 가능성이 1%도 없단 말인가?

처음으로 AGD 앱을 불신하고 부정하고 싶었다.

우리 그때 좋았잖아…… 라고 새벽 3시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구남친이 된 기분으로 권민헌 PD의 응답을 기다렸다.

* * *

[박주영선배: 카감님도 확보. 일정은 언제든 말만 하라시네.]

[이민희작가: 역시 호탕하신 분이라니까. 근데 작가진은 아마 도채린 작가까지만 가능할 듯해요.]

[권민헌PD: 다들 고생했어]

우리는 <당잠사> 시즌5를 위한 단톡방을 파고, 거기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권민헌 PD는 지원 업무를 전부 정리하고 1팀 사무실로 돌아왔다.

박주영 선배와 나는 5팀 사무실에서 1팀으로 자주 얼굴을 내비치면서 제작 준비를 이어 나갔다.

그러는 중에 셋이서 구내식당에 갔는데, 사내에 쫙 퍼진 소문을 듣고 몇몇 선배들이 다가왔다.

“야, 너희 <당잠사> 다시 한다며?”

딱히 소문을 막진 않았기에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기획만 해 보고 있어요.”

같이 밥을 먹던 권민헌 PD가 웃으면서 말하고, 이야기를 들은 PD들이 힘내라고 응원을 해 주고 자리를 떠났다.

전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경력이 다르니 권민헌 PD가 알고 있는 PD들도 층이 다양했다.

예능도, 드라마도, 교양도. 심지어 보도 쪽에서도 아는 체를 해 왔다.

쑥스러운 듯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렇게 봐?”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닙니다. 아시는 분이 많다 싶어서요.”

“구내식당이잖아. 당연하지.”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나만큼 연차 좀 쌓이면 이 정도는 다 알고 지내.”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인맥이 넓은 건 권민헌 PD의 사람 좋음도 한몫하지 않을까.

이런 점은 확실히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박주영 선배가 뒤통수를 툭 때렸다.

“어딜 권 선배한테 연차로 비비려고. 우리 예능국에서도, 발 넓은 걸로 따지면 선배 이길 PD가 많은 줄 알아?”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방 PD님 따라다니다 보니 얼굴 익힌 사람이 많은 것뿐이야.”

은은하게 웃으면서 밥을 먹는 권민헌 PD의 반응에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뭐랄까, 전부터 좀 느끼긴 했지만, 소극적인 건지 조용한 건지 모를 사람인 건 확실하다. 아직 박주영 선배만큼 친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 선배. 기획안은 잘 되십니까?”

잠깐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박주영 선배가 물었다.

“그럭저럭. 강 PD가 초안을 잘 짜놔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저는 딱히…….”

“이 녀석이 기획서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죠. 그걸로 팀장님이랑 국장님을 얼마나 낚았는지. 그냥 이 녀석한테 맡기세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시 끼어든 박주영 선배가 나에게 큰 짐을 던졌다.

“그건 메인 PD님이 하실 일…….”

“그럴까?”

권민헌 PD도 혹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초안은 제가 짰다고 해도, 이 프로그램은 선배 건데요. 저는 잡일이나 하겠습니다.”

“잡일이라니. 그럴 수는 없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권민헌 PD가 박주영 선배와 묘하게 눈을 맞추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나도 덩달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강 PD가 서브를 맡아 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예? 제가요?”

나는 뜨악해서 다시 그를 보았다.

서인하 국장에게 보고할 때도 서브든 뭐든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은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절대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박주영 선배는 합류할 거고, 그렇다면 서브는 그의 역할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그런데 선배가 보는 눈앞에서 권민헌 PD가 서브를 나에게 제안하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다.

“제가 어떻게 그럽니까. 서브는 여기 주영 선배가 해야 어울립니다. 연차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래서야.”

“예?”

박주영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이미 둘 사이에는 합의가 된 듯한 분위기였다.

“강 PD 너는 3년차에 입봉을 했지. 그건 분명히 대단한 일이지만, PD로서 밟고 가야 할 계단을 뛰어넘은 거기도 해. 서브 일도 한번 해 봐야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또 박주영 선배를 두고 월권을 하라니.

“거기다, 발안자는 강 PD잖아. 누구도 <당잠사>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 발 벗고 나선 사람이니까, 서브로서 나를 도와줘.”

권민헌 PD는 조용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눈빛이었다. 이런 눈빛을 어디선가 봤는데.

아, 그때다. 현준영과의 마지막 회식에서 분연히 일어났을 때. 그때의 눈빛.

“에이, 선배. 뭘 그리 설명하시고 그래요. 그냥 시키시라니까.”

박주영 선배가 웃음기를 담아 이야기하며 숟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냥 시켜도 불만 없을걸요.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 놈이 이 녀석인데.”

“선배, 저를 대체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주제넘음의 아이콘, 강범람으로 보지. 그래서, 싫다고?”

“……선배는 괜찮습니까?”

나는 박주영 선배의 눈치를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더커버 싱어> 때처럼, 또다시 하극상처럼 되는 것이다.

“나? 나야 네가 서브로서 고생해 주면 좋지. 나는 편집 처리하면서 너의 고생을 즐겨 주마.”

선배는 낄낄대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해. <당잠사> 시즌5의 판을 벌인 놈이 너잖아. 너도 책임을 져야 해.”

괜찮을까.

<언더커버 싱어>로 입봉할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 압박감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서브, 하겠습니다.”

“그래야 강범람이지.”

박주영 선배는 건배를 권하듯 물잔을 가져왔다. 나는 피식 웃고서 내 잔을 들었고, 권민헌 PD도 물잔을 내밀고 말했다.

“잘 부탁해, 강 서브.”

“예, 메인 PD님.”

구내식당에서 도원결의가 맺어졌다.

* * *

<당잠사> 시즌5를 위한 연출진과 작가진이 어느 정도 꾸려진 상태에서, 드디어 약속된 날이 왔다.

권민헌은 자리를 일찍 정리하고 유수현 작가를 만나러 갔다.

바로 어제 귀국한 유수현 작가는 그쪽 메인 PD와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연락을 해 왔다.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기를 20분.

약속 시간보다 늦게 유수현이 카페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오랜만에 뵙네요, 유 작가님.”

“그러게 말이야. 같은 방송국에서 일해도 이렇게 보기가 힘들다니까?”

유수현은 여전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아줌마 같은 인상인데, 그럼에도 많은 예능 작품을 만들어온 기백 같은 것이 절로 느껴졌다.

“아이스커피로 시켰는데 괜찮을까요?”

“그럼. 땡큐.”

정말 목이 말랐는지 유수현은 빨대를 내려놓고 꿀꺽꿀꺽 입을 대고 삼켰다. 그 호쾌한 행동에 권민헌 PD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크으. 이게 맥주여야 하는데.”

“……많이 힘드셨습니까?”

“응? 아니아니, 그런 건 아니고.”

유수현은 다 비어 버린 커피 잔을 내려놓고서 활기차게 웃었다.

“오늘도 메인이랑 싸우고 오긴 했는데, 그래도 뭐 재밌게 하자고 싸우는 거라 힘들진 않아. 차라리 옛날에 수정이랑 싸울 때가 더 힘들었지.”

방수정의 이름이 언급되자 권민헌도 작게 웃어 보였다.

그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지만, 유수현에게는 골치 아픈 친구에 가까운 존재가 방수정이다.

방수정이 몇 번이나 독선적으로 나가려는 것을 옆에서 뜯어말린 것이 유수현.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다.

“방 PD님은 잘 지내십니까?”

“수정이? 그러게, 요즘은 뭐 하고 지내는지 몰라. 미국에 간 이후로는 띄엄띄엄 메시지가 올 뿐이라서.”

“공부하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정확히는 못 들었는데, 그쪽에서 커리큘럼이 잘 나온 게 있다나 봐. 공부하는 거 좋아하니까 잘하고 있겠지 뭐.”

정말 친구라는 티가 팍팍 나는 어조였다.

권민헌은 빈 커피 잔을 가리키며 하나 더 시켜 드릴까요 물었고, 유수현은 손을 내젓더니 말했다.

“커피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 바로 들어가 봐야 해.”

“바쁘실 테니까, 알겠습니다. 혹시 결정은 하셨습니까?”

“응.”

유수현은 단호하게 웃었다.

“안 해.”

권민헌은 끄응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 반응에 유수현이 도리어 갸웃했다.

“뭐야, 안 놀라네? 내가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 아냐?”

“예,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한 사람이 있다는 건가?”

권민헌은 휴우 하고 깊게 숨을 내쉰 뒤,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호오, 강대한이 그랬단 말이야? 내가 합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예. 왜냐고 물었더니, 그냥 감이 그렇다고 하던데요.”

“감이라. 참 신기한 애란 말이야. 감이 그렇게 좋으면 사기 아닌가? 때려치우고 돗자리 깔아야 하는 거 아냐?”

한참 너스레를 떠는 유수현을 보다가 권민헌은 진지하게 물었다.

“왜 거절하시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유수현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었다가 말했다.

“내가 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야…… 방 PD님이 시작한 프로그램이니까요.”

“그래, 나는 그래서 거절하는 거야.”

“예?”

권민헌이 놀라서 본 유수현의 얼굴에는 한 단어도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수정이가 결국 내려놓고 간 프로그램을, 수정이도 없는 그 프로그램을 내가 다시 만들어도 될까.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지.”

“…….”

“수정이의 유산이다 뭐다 하잖아. 그런데 유산이라는 건, 결국 들춰봐야 문제만 생기는 경우가 세상에는 더 많은 거 알지?”

“문제 만들지 않을 겁니다.”

권민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번 무너진 <당잠사>를 다시 제대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유산이겠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 프로그램이 될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새로운 생명이 어울리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봐.”

유수현이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덧붙였다.

“그게 나는 아냐.”

“…….”

그 말투가 너무 무거워서 권민헌은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입을 열어 보려고 하는데 유수현이 다시 말했다.

“아, 그렇다고 <당잠사>를 다시 만든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야. 방송사를 위해서도, 수정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분명히 좋은 시도야. 단지 나는 합류하지 않고 싶다는 거야.”

“……도저히 안 되시는 겁니까?”

“응. 지금 하는 일도 있고, 나 없어도 <당잠사>는 잘 만들 수 있을 거야.”

유수현은 엄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보다 몇 년이나 경력이 적은 권민헌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프로그램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야지. 정통성이야 너 있고, 주영이 있고, 대한이도 있고. 그럼 되는 거 아냐? 작가 쪽도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그럼 됐잖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그런 말이었다.

예전 팀이 다시 모이는 것도 좋지만, 결국 이전과 완전히 같은 팀을 이룰 수는 없다.

<당잠사> 시즌5라고 해도 새 프로그램이고, 결국 새 팀이 이끌어가는 것.

유수현은 그렇기에, 후배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후우…… 작가님이 없으면 많이 힘들 것 같은데요.”

“에이, 이 아줌마가 뭐라고. 나보다는 너희랑 손발이 더 잘 맞는 사람에게 메인 맡겨. 사람 없는 것도 아니잖아.”

“좋은 의견 있으시면, 듣겠습니다.”

“뻔하잖아. 얼마 전에 메인 작가로 입봉하지 않았나?”

유수현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권민헌은 금방 알아챘다. 그의 표정을 읽고 유수현은 다시 어머니처럼 웃었다.

“나는…… 새로운 <당잠사>가 나오는 걸 즐겁게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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