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87화 (87/200)

87화 부활

일단 마음을 비우고, 박주영 선배와 오지환과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박주영 선배는 계속 뭔 일이냐며 궁금해했지만, 아직 내 선에서 말해 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죄송하다고만 말했다.

무언가 확정되기 전에 섣불리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냥 나쁜 일이 터진 건 아니라고만 말해 줬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슬쩍 정민우 팀장 자리를 봤지만, 여전히 비어 있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설마 ‘89%’을 깨고 실패할까 싶었다.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하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AGD 앱에 새로운 푸시가 와 있었다.

[‘왕이범 이사의 <당잠사> 시즌 5 제작 컨펌 확률’의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눈을 크게 떴다. ‘100%’ 확률. 그렇다는 것은…….

“어, 가, 강 PD님. 박 선배님이 커피를…….”

“책상에 둬.”

오지환이 박주영 선배가 사 보낸 커피를 나에게 들고 오다가, 벌떡 일어난 나를 마주하고는 당황했다. 나는 내 책상을 가리키며 대충 말을 던지고는 부리나케 스마트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정 팀장님, 강대한입니다.”

전화를 걸자마자 정민우 팀장이 투덜거렸다.

“야, 강 PD. 밥 좀 먹자. 너는 이미 먹었을 거 아냐. 난 이제 숟가락 들었어.”

“죄송합니다! 참을 수 없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컨펌 났나요?”

“죄송하다면서 물을 건 결국 묻네. 예? 아, 네. 있어 봐, 국장님이 바꿔 달라시네.”

그러더니 곧 서인하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지금 밥 먹고 올라갈 거니까, 1팀 가서 민헌이 끌고 국장실로 올라와. 한…… 30분 뒤에.”

“예! 알겠습니다!”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컨펌이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입봉작을 맡으란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도 짜릿한 희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싸!”

복도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뭐야?’ 하는 식으로 쳐다봐서 금세 무안해지고 말았다.

그래, 좋아하긴 아직 이르다. 이 일은 절대 나 혼자서 기뻐하고 끝낼 일이 아니니까.

정신을 다잡은 나는 서둘러 예능1팀으로 향했다.

권민헌 PD는 자리에 없었다. 물어보니 옆 별관 스튜디오로 지원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

하지만, 바쁜지 통화 연결에 실패했다.

할 수 없지.

30분이라서 시간이야 충분히 있지만 어쩐지 그냥 기다리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별관으로 향했다.

<뮤직스케치> 녹화가 진행되는 A스튜디오가 아닌, 그보다 조금 작은 B스튜디오에서는 특별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예능국은 아니고 드라마국 쪽 촬영으로 알고 있는데, 1팀에서 몇 명의 PD가 지원을 나갔다고 한다.

권민헌 PD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배님!”

“어, 어어? 강 PD? 웬일이야. 휴가 아니었나?”

무대 도구 하나를 들고 뛰어가던 그를 붙잡았다.

“오늘 복귀했습니다. 그것보다, 서 국장님이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나를?”

“예. 30분…… 이제 20분 정도 남았습니다.”

나는 간단히 자초지종만 설명했다. 물론 <당잠사> 이야기는 빼고.

“식사하고 올라오신다고, 그때 맞춰서 권 선배님 데리고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데?”

“글쎄요.”

일단 시치미를 뗐다. 왠지 서프라이즈를 해 주고 싶었다.

권민헌 PD는 딱히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나도 가서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기다릴래? 아니면 내가 올라가서 3팀에 들르고.”

“3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에게 일단 알릴 건 알린 뒤 나도 3팀으로 돌아왔다. 커피를 빨고 있던 박주영 선배가 어디 갔다 왔냐고, 혼자 왜 이리 바쁘냐고 타박을 해 댔다.

나도 기뻤다. 먼저 3팀으로 올라온 목적은 선배 때문이었으니까.

드디어 의미심장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좋은 소식 하나 전달될 겁니다.”

“좋은 소식? 뭔데?”

“비밀입니다.”

국장실 들어가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 일단 그렇게만 던져 주었다.

박주영 선배가 ‘뒤질래?’ 하면서 계속해서 옆구리를 찔러 대는데, 귀찮기보단 웃음이 계속 비죽비죽 나왔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현준영하고 대면해도 덕담을 잔뜩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달리는 통에 권민헌 PD가 3팀에 나타났다.

“어, 선배! 웬일이십니까.”

“그래, 주영아. 오랜만이다.”

박주영 선배가 일어나서 인사를 건네는데, 그에게 손인사를 하면서 권민헌 PD가 나를 보았다.

“전화도 걸었었더라, 너. 못 받아서 미안하다.”

“아뇨, 그러실 수도 있죠.”

“그래, 이제 들어가면 되나?”

“예. 좀 전에 돌아오셨어요.”

마침 10분 전쯤에 사무실로 돌아온 정민우 팀장도 다시 국장실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권민헌 PD와 움직이려고 일어서자 박주영 선배가 잔뜩 나를 노려보았다.

입 모양으로 ‘야, 대체 무슨 일인데?’ 하고 묻는다.

나는 씨익 웃으며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쉿’이라고 했다.

“하…… 저 미친…….”

결국 욕을 먹었지만, 모른 척 지나쳐 국장실 앞에 섰다.

똑똑.

“국장님, 권민헌입니다.”

“그래, 민헌아. 들어와.”

안으로 들어가자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이미 정민우 팀장과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

“부르셨다고요.”

“일단 앉아 봐.”

권민헌 PD가 정민우 팀장 옆에 앉고, 나는 서인하 국장 옆에 앉았다. 둘씩 마주 보는 형국에, 권민헌 PD만이 유일하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지금 지원 나가 있던가?”

“예. 드라마 쪽 돕고 있습니다.”

“아, 지원 나가 있던 게 거기였어? <악마가 천사를 만났을 때>?”

이번 분기 우리 NBS의 기대작인 드라마로, 배경이 연예계다 보니 많은 부분을 방송국 안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공연 장면 촬영도 여러 번 있어서, 그때마다 각 팀에서 지원이 나가고 있었다.

“저희 팀에 지원 요청 왔었는데 아무래도 바빴던 때다 보니…… 제가 권민헌 PD한테 부탁했습니다.”

정민우 팀장의 설명에 서인하 국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그래도 인력 남는 데가 1팀 정도지.”

그 말은 꽤 뼈가 아픈 말이었다. 현준영 팀장이 사라지면서, 1팀에서 진행되고 있던 많은 기획이 스톱되었기 때문이다.

팀장 자리가 공석이다 보니 생긴 문제였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팀장이 누가 될지, 혹은 다른 데서 데려올지에 관한 소문들이 떠오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라, 내가 예상하던 내용과는 조금 서두가 다른 것 같은데……. 이사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오갔던 거지?

“민헌아. 아니, 권 PD.”

편하게 부르려 하던 서인하 국장이 말투를 바꾸었다. 진지한 업무 이야기를 하려 할 때의 그의 버릇이었다.

“예, 국장님.”

“몇 년차지, 이제?”

“다음 달이면 8년차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이 참 빨라. 그치?”

“그러게 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서인하 국장이 정민우 팀장과 나를 힐끔 보았다.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지시라면 지시인데, 권 PD의 의향을 일단 먼저 묻고 싶어.”

“예, 말씀하십시오.”

“그동안 못했던 입봉을 해야 할 것 같지 않나?”

“…….”

권민헌 PD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권민헌 PD는 진즉 입봉했어야 할 인물이었다. 능력적으로나 후배를 챙기는 면으로서나 부족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입봉을 할 타이밍에 방수정 밑으로 더 배우고 싶다고 자진해서 들어갔고, 다시 입봉할 타이밍이 왔을 때는 현준영이 끌고 가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그 장본인이 사고로 사라졌고, 팀 자체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수습하느라 입봉이고 뭐고 할 때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1팀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갈 타이밍이고, 위에서도 팀장 인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야.”

“……예.”

“그런데 나는 다른 누구보다 그냥 권 PD한테 팀장을 맡기면 어떨까 싶단 말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사실에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낄 부분이 아니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최소한 입봉은 해야 해. 제작 경험이 있어야 이사진에도 이빨이 통할 거거든.”

“예.”

“입봉, 하고 싶지?”

권민헌 PD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입봉에 대한 열망이 없는 PD가 어디 있을까.

“좋아. 입봉해서 제대로 한 건 하자고. 그럼 팀장 자리까지 이사님을 푸시해 볼 테니까.”

이 또한 실현만 된다면 파격적인 인선이다.

권민헌 PD보다 상황을 좀 더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미 왕이범 이사와 이야기가 된 부분이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것도.

“하지만 조건이라면 조건이 있어. 입봉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이야기가 더 중요해.”

“예, 말씀하세요.”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시즌5, 맡아서 해 봐.”

“……예?”

권민헌 PD의 반응은 한 박자 느렸다.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끄덕거리고 있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잠사> 말입니까?”

“그래. 권 PD가 맡는다면 <당잠사>를 새로 만들어도 된다고 왕 이사님에게 허락받았어.”

권민헌 PD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동공이 헤엄친다는 설명이 너무나 잘 맞았다.

뭐라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눈을 껌뻑거리다가,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고, 정민우 팀장과 나를 쳐다봤다가, 다시 서인하 국장을 보았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지. 입봉 이야기도, 팀장 이야기도, <당잠사> 이야기도.”

서인하 국장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대충 눈치챘지? 입봉작으로 <당잠사> 시즌5를 만들어서, 그것을 성공시켜. 그게 목표야. 여기 이 자리에 정 팀장이 있는 것도, 강 PD가 있는 것도 그래서야.”

“그게 무슨…….”

“권 PD한테 <당잠사>를 맡긴다면 그만한 팀을 꾸려 줘야지. <당잠사>가 부활하는 건데, 예전 제작진을 모아 줘야지 않겠어? 방 PD야 없지만, <당잠사>가 수정이 혼자 만들었던 건 아니잖아? 정 팀장이 거기 협조할 거고.”

“아, 강 PD와…… 주영이도겠군요.”

“맞아. 여기 강 PD와 박주영 PD도 그 팀에 합류시킬 거야. 작가진도 웬만하면 그대로 합류하게 해 줄 거고. 부서 개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야. 그만큼 기대가 크단 것만 알아 줘.”

“그게 가능한 건가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단…… 역시 현실적으로 전부 모으는 건 힘들 거야.”

“그래도 최대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게.”

정민우 팀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일단 그러한 사소한 걱정들은 다 집어치우고, 가장 중요한 건 하나야.”

서인하 국장이 손가락을 들어 권민헌 PD를 가리켰다.

“수정이가 권 PD를 잘 가르쳤을 거라 믿어. 권 PD도 옆에서 잘 배웠을 거라고 믿고. 어때. 이미 출발 준비는 마쳤어. <당잠사>를 한번 잘 운전해 보지 않겠어?”

나도 그렇지만, 권민헌 PD에게 <당잠사>는 많은 의미를 담은 프로그램일 것이다.

시즌1부터, 방수정 PD 밑에서 배우겠다고 굳이 찾아 들어가서 만든 프로그램이니까.

“…….”

침묵이 조금 길어졌지만, 우리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윽고.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을 가져, 이 사람아.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니까 맡기는 거야.”

“예. 감사한 말씀이지만, 걱정은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던 권민헌 PD가 고개를 들었다.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잘 만들어 내겠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서인하 국장이 씨익 웃고서 정민우 팀장과 나를 쳐다보았다. 흐뭇함이 듬뿍 담긴 미소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 나도 아침에는 몰랐어.”

“예?”

“그런 게 있어.”

서인하 국장이 나를 보며 눈짓하는 것을 봤는지, 권민헌 PD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 팀 구성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권민헌 PD와 국장실을 나섰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권민헌 PD가 서인하 국장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는 것에서, 그다운 진지함이 엿보였다.

“다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국장실을 나와 나도 그렇게 인사를 했는데, 권민헌 PD가 주변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얼떨결에 아무도 없는 휴게실로 밀어 넣어졌는데,

“너지?”

“예?”

“<당잠사> 말이야. 대한이 네가 서 국장님한테 제안한 거 아냐?”

뜨끔했지만 바로 철판을 깔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아까 불려 가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랬던 것치고는 너무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듣고 있던데? 서 국장님도 계속 너를 확인했었고.”

아놔. 그랬나?

나는 뻔뻔한 얼굴을 풀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전 회식 때 오랜만에 <당잠사> 멤버들끼리 모인 것이 너무 좋아서, 프로그램이 사라진 게 너무 아쉬워서 건의를 드렸습니다.”

“그게 왕 이사님한테 올라간 거고?”

“……그랬었나 봅니다.”

내가 불려 갔었단 것까지 말하면 판을 다 짜 놓은 것처럼 보일까 봐, 일부러 말을 아꼈다.

“나를 메인으로 앉히자는 것도 네 의견이야?”

“방 PD님이 안 계시면, 메인에 어울리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후우…… 내가 참, 까마득한 후배한테 놀아났단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그럴 마음으로 국장님께 제안드린 건…….”

내 사과에, 짐짓 화내는 표정이었던 권민헌 PD가 피식 웃었다.

“화내는 거 아니야.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긴 건 맞으니까. 그게 강 PD 네 덕분이라고 하니 기분이 좀 복잡하긴 한데…… 그래도 기회는 기회지.”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잘해 보자고.”

“……예, 대장.”

<당잠사> 부활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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