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왕이범 이사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에게 한껏 폭탄을 안겨 준 이후, 나는 내 자리에서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 자리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
띠리리―
깊게 숨을 들이쉰 후에 수화기를 들었다.
“예, 예능5팀 강대한입니다.”
“왕이범 이사실입니다.”
“예?”
나는 반사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최종 결정권자가 왕이범 이사일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다.
이거…… 무슨 상황일까.
그 와중에 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대한 PD님, 왕이범 이사님께서 이사실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그 사무적인 말에 왠지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간신히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다시금 깊게 숨을 내쉬고선 스마트폰과 자료를 챙겼다.
놓친 게 있으려나. 없겠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지원부에 다녀온 박주영 선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원부는 한번 가면 너무 오래 걸린다니까? 대한아, 밥 먹으러 가자. 지환이도.”
5팀 사무실에 있는 전체를 끌어들이려는 그에게 웃어 주었다.
“저, 좀 올라가 봐야 해서.”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자, 선배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위? 위가 어디야.”
“왕이범 이사실이요.”
“뭐?”
1초 뒤에 오지환도 이쪽을 휙 쳐다보았다.
“이사실에? 왜? 너 뭐 잘못했냐? 야, 안 그래도 지원부 갔다가 이야길 들었는데.”
“네?”
“지금 이사실에 국장님이랑 팀장님이 가 있는데,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더라. 너 진짜 뭐 잘못했냐?”
박주영 선배가 다다다 하고 쏟아붓는 것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큰 소리가 났다고……?
안 그래도 긴장을 잔뜩 했는데, 침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나는 무조건 <당잠사>를 론칭하고 싶었다.
오직 그 마음뿐이었기에 애써 박주영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일단 저도 올라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다녀올 테니까 식사하러 가세요.”
“어어, 그래. 갔다 오면 꼭 첫 번째도 말해 줘야 한다! 몸 사리고, 뭐 꾸짖으면 그냥 싹싹 빌고 와.”
그러면서 어깨를 두드려 준다.
괜히 고마워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후…… 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사실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언젠가는 올라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코 며칠 전만 해도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분명 심각할 거라고 예상할 만한 상황에서 올라갈 줄은.
9회말 2사 만루, 상대 팀의 역전 끝내기 찬스를 저지하고자 마운드에 오르는 마무리 투수도 이 정도로 떨릴까?
이윽고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사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왕이범 이사실 앞에 다다랐다. 단아한 모습의 비서 앞에 고개를 내밀자, 나를 알아본 비서가 내선 스피커를 통해 이사실에 전달했다.
“강대한 PD 도착했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극히 건조했다. 끔찍한 기분을 추스르며,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이사실 문에 대고 노크를 한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강대한입니다.”
“그래, 어서 와. 우리 방송사의 스타 PD를 이렇게 다 보게 되는군.”
왕이범 이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를 상석으로 두고 양쪽에는 이미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이 있었다.
그들에게 눈인사를 한 다음, 소파에 자리했다.
“이사 된 몸으로서 그동안 인사 한번 한 적 없고. 미안하네.”
농담처럼 뱉은 말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그가 다음 말을 꺼냈다.
“혹시 차 필요해?”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거두절미하고 묻지.”
왕이범 이사가 나를 새로이 쳐다보았다. 서인하 국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날카로움을 담은 눈빛이었다.
서인하 국장을 막내 PD 시절부터 키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게감이 정말 대단했다.
그래도, 그 눈빛에 압박을 느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당잠사>를 하고 싶다고. 맞지?”
“예, 맞습니다.”
“<당잠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 프로그램인지 모르지 않을 테고.”
‘맞나?’가 아니고, ‘않을 테지?’가 아니었다.
굳이 내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처럼 비쳤다.
“네, 결코 가벼이 생각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왕이범 이사는 끝말을 길게 늘어트리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많은 설명을 해야 할 거야. 주말 예능을 맡으라는 지시도, 내가 한 거거든.”
모르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자네한테 좋은 기회이기도 했는데, <당잠사> 때문에 거절했다……. 내 입장에선 달가울 게 없는 소리지 않겠나?”
갈수록 부정적인 상황이었다.
여기서 더 듣고 있다가는 제대로 된 한마디도 못한 채 쫓겨날 것 같았다.
나는 땀이 날 것 같은 손을 바지에 슥 훔치고는, 가지고 올라간 자료를 그에게 내밀었다.
“<당잠사> 시즌5의 초안입니다.”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의 시선이 한 번에 나에게 모였다.
“호오.”
왕이범 이사가 그런 소리를 내고서, 기획안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보며 나는 용기내서 말했다.
“어디까지나 초안이기에 제 의견대로만 작성한 내용입니다. 제작 진행에 따라서 달라질 순 있겠지만, 포인트는 확실히 잡았습니다. 원점으로의 회귀입니다.”
“원점으로의 회귀라.”
“예.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출연진들이 잘 모르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겪는 일들을 꾸미지 않은 날것 그대로 시청자에게 전달한 부분이 호평을 받은 예능입니다.”
시즌1, 시즌2에서 가장 좋은 평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하지만 시즌3에서 현준영 PD가 맡으면서 여행 예능에 게임 예능 요소가 진하게 들어갔고, 시즌4에서는 완전히 게임 예능처럼 변모해 버려 시청자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당잠사> 고유의 매력을 포기한 탓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메인 PD 현준영의 실력 부족일 수도 있으나, 그 점은 여기서는 짚지 않았다.
“고유의 매력을 포기했다라.”
“시즌3를 겪은 후 모든 제작진이 바뀌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같은 타이틀을 달았으면서도 연속성이라고는 여행 컨셉밖에 없는 다른 예능을 만들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리얼 여행 예능의 맛을 살려야 했는데, 시즌4는 그러지 못했다. 나도 방송 체크를 했지만, 대부분 미션으로 점철되어 여행지의 풍경조차 제대로 분량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출연진 간의 케미나 무리한 일정 등등 이야기할 건 많지만, 어차피 그런 부분을 모를 분들이 아니었다.
“자네도 그 사태를 만든 원인이 아닌가?”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이범 이사가 푹 찌르고 들어왔다. 다시 긴장했지만, 이젠 물러날 곳이 없어서 쥐어짜듯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당잠사>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몰렸다는 생각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용기를 내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84%]
왕이범 이사가 쥐고 있는 초안 위에는 나만 볼 수 있는 숫자가 있었다.
‘왕이범 이사에게 <당잠사> 제작 건을 컨펌받을 수 있는’ 확률이다.
그 확률은 지금, 초안의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상승하고 있었다.
[89%]
왕이범 이사가 초안을 전부 넘겨본 직후, 확률이 다시 상승했다.
나는 그래서 확률을 깎아먹지 않으려는 중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잠사>를 다시 만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팀원을 아끼고 챙겨 주다가 떠났던 사람을 위해 노력할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방수정 PD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긴장한 데다 감정이 쏟아져 그녀를 언급했다.
그 뒤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자세로 왕이범 이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은 한참 뒤에나 떨어졌다.
“그래. 그런 마음이란 말이지.”
그가 툭 말을 내뱉고서는, 초안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를 보았지만 쉽게 감정을 읽기는 힘들었다.
확률도 ‘89%’. 여전했다.
“알았어. 잘 들었네. 일단 나가 봐.”
“……예, 감사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래도,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후련함이 있었다.
나머지는…… 왕이범 이사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 * *
“별명이 뭐라 그랬지?”
강대한이 나간 이후로도 한참 말이 없던 왕이범이 그렇게 툭 내뱉어서, 서인하는 잠시 무슨 질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답한 것은 정민우였다.
“여러 가지 있습니다. 강범람이다, 강요물이다, 밖에서는 아이돌 심폐소생협회장이다, 그렇게 불리고 있죠.”
“예능 PD가 그렇게 별명을 가지기도 힘든데, 재밌는 친구군.”
왕이범이 나간 흔적을 쫓듯 문을 쳐다보았다.
“강요물, 요물이라. 그건 서 국장이 붙인 별명이었지?”
“예, 맞습니다.”
“별명 한번 잘 붙였군.”
서인하와 정민우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서인하가 물었다.
“그 말씀은…….”
“정말 요물 같은 친구야. 내가 좋아할 걸 알고 이 초안을 가져온 것 같은데, 그래 놓고 마지막에는 감정을 건드리고 갔단 말이지.”
방수정은 왕이범과 서인하에게는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다.
방송사 내에서도 알아줄 만큼 고집 세고 독단적이기도 했던 사람. 그 스타일에 반발은 많았지만, 실력 하나만은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서인하가 방수정을 아꼈듯, 왕이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의 퇴사를 막지 못한 데 대한, 결국 그녀가 스스로 <당잠사>를 놓게 만든 데 대한 죄책감은 둘에게 존재했다.
일정을 무리하게 당기는 결정을 막을 수만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결과가 없었을 것이기에.
정민우는 두 사람의 그런 심정을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었다.
“감히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정민우도 말했다.
“<당잠사>를 부활시킨다면…… 만약 누군가에게 그 작업을 맡겨야 한다면…… 강 PD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이사님. NBS에서 <당잠사>가 다시 방송되는 것,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서인하도 덧붙였다. 흔치 않게 아주 흥분한 표정에, 왕이범이 뜻하지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참, 이 친구들이. 왜 답지 않게 흥분하고 그래?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순간, 베테랑 중에서도 알아주는 베테랑 두 명이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왕이범으로선 농담이었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잔뼈 굵은 PD 둘을 이렇게 구워삶다니. 정말 요물이 우리 방송사에 살고 있었구먼.”
왕이범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지시했다.
“<당잠사> 시즌5, 만들어 봐. 이 초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