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85화 (85/200)

85화 호랑이 새끼

맨 처음 이 생각을 한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종방 회식을 할 때였다.

서인하 국장이 권민헌 PD를 회식에 초대했고, 오랜만에 <당잠사> 팀이 모인 바로 그날.

우리는 어쩐지 못 다한 <당잠사> 회식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권민헌 PD는 처음에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당잠사> 때는 농담도 잘 받아 주고, 선배들한테 한 소리 들으면 위로도 해 주고. 참 좋은 선배가 그런 모습이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다들 모여서 술잔을 나누며 떠들자, 곧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모이니 좋네.”

“방수정 PD님이나 유수현 작가님도 부를까요? 지금 연락 드리면 나오시려나?”

“방 PD님은 지금 국내에 없어요. 작가님도 지방에 있고.”

“바쁘시네. 우리 이 기회에 <당잠사>팀 모임이나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볼까요?”

그런 식의 대화가 오가다 회식을 마무리하며 헤어질 때였다.

정민우 팀장이 거하게 취한 서인하 국장을 부축하는 모습을 뒤에서 배웅하다가, 권민헌 PD가 저만치 떨어져서 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 보게 됐다.

“오늘 많이 드셨죠? 평소보다 많이 드시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조금 마시긴 했는데, 괜찮아.”

“술이 많이 느셨나 보네요, 선배.”

“대한이 너도 술 좀 늘었더라. 주영이 때문이지?”

난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권민헌 PD도 같이 웃고선 다시 그 아련한 눈빛으로 일행을 보았다.

박주영 선배가 민희에게 장난을 걸고, 민희가 그것에 대들고, 옆에서 작가들이 깔깔대고.

“……좋네.”

권민헌 PD는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의 그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참 짙었다.

“다음에 방송이나 같이 하자.”

“예.”

기약 없는 인사였다.

하지만 그 일은 계속해서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 생각은 계속해서 덩치를 부풀렸고, 결국 잠들기 직전에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시즌5 제작 초안』

『주말 예능 <달리는 도시인> 프로젝트 기획안』

휴가 첫날, 본가에서 지낸 밤에 나는 두 가지 기획서 초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다음 방송 기획으로 어떤 것이 맞을지, 어떤 것이 높은 성공을 할 수 있을지 확률을 보았다.

AGD 앱은 명확한 답을 알려 주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시즌5 제작 초안』[52%]

『주말 예능 <달리는 도시인> 프로젝트 기획안』[78%]

절반의 확률과 80%에 근접한 확률.

고민도 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78%’의 주말 예능을 성공해야 했다.

하지만 내 솔직한 감정으로는 그 확률을 부정하고 싶었다.

AGD 앱이 아무리 확실한 수치를 보여 준다고 한들, 그걸 따를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나인 것이다.

확률이 높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는 AGD 앱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좋은 길만 걸어왔다지만…….

“껍데기뿐인 성공이…… 중요한 건 아냐.”

확률을 따라 성공 가도를 달린들 AGD 앱 없이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면, 그걸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래서 껍데기뿐인 성공만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휴가 첫날에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효명이의 질문에도 확률 없이 솔직한 내 감정으로만 말을 꺼냈던 것이다.

물론…… <당잠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결국 꺼내지도 못했지만.

* * *

“뭐? <당잠사>?”

그 말에 서인하 국장은 다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여러 번 놀라시네.

물론 정민우 팀장도 놀란 눈치였다. 그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말할 줄 나도 몰랐으니까.

그 회식 날에 권민헌 PD가 받았을 어떤 위안은, 나도 올곧이 느낀 것이었다.

“야, 아니, 잠깐만. 뭐라고?”

정민우 팀장이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되물었다.

“<당잠사>요. NBS의 대표 예능이지 않습니까. 현준영 팀장이 시즌4를 망치면서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렇게 두면 안 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이 부활시킬 수 있는 적기이지 않을까 싶고요.”

<당잠사> 부활에 대한 여론은 계속 있었다.

현준영 팀장이 말아먹고 투표 조작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방수정 PD를 주축으로 한 오리지널 팀의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는 지금도 꾸준했다.

“비록 방수정 PD님이 안 계시니 오리지널 팀이 전부 모일 순 없지만, 다행히 그때의 제작진 대부분이 모일 여건은 되지 않습니까.”

“야, 그래. 그건 그렇지만.”

정민우 팀장이 다소 혼란한 표정으로 서인하 국장을 보았다.

서인하 국장은 그에 비해 매우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선뜻 넘겨짚기도 힘들었다.

우선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기로 했다.

“권민헌 PD를 회식에서 만난 이후로 줄곧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잠사>를 다시 하고 싶다고. 그때의 멤버들과 함께 다시 일하고 싶다고. 제 예능 경험의 원천은 <당잠사>입니다. 지금도 시청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거기에 응답하는 것도 PD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맘은 알겠어.”

잠자코 듣고 있던 서인하 국장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래서, 네가 메인으로서 <당잠사>를 하겠다고?”

“아뇨. 전 안 됩니다. <당잠사>를 부활시키려는데, 제가 메인으로 서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메인으로 설 것도 아니다? 너…… 설마 민헌이 이야기냐?”

“권 PD?”

나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서브 서겠습니다. 아니, 서브가 아니어도 됩니다. 권민헌 PD님을 메인으로 세우고, 그때의 제작진을 열심히 끌어모아서, <당잠사>를 원래의 스타일대로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더할 수 없는 진심을 담아서 서인하 국장을 쳐다보았다.

“하게 해 주십시오, 국장님.”

“…….”

서인하 국장은 침묵했다. 정민우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하고 나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시키시는 프로그램 뭐든 맡겠습니다. 이것만 허락만 해 주십시오.”

“……내가 허락한다고 될 문제가 아냐, 이 일은.”

서인하 국장이 사무실 밖을 쳐다보듯 힐끔거린 뒤 말했다.

“네 말대로 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권민헌 PD의 의견이지. 다른 팀원들의 의견도 그렇고.”

“실상 권민헌 PD를 비롯한 당시 제작진이 지금 이리저리 다른 팀으로 분산되어 있기도 합니다.”

정민우 팀장의 현실적인 문제 지적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계속 입을 놀려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이 두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이어야 결론이 날 문제였다.

물론 최종 결정권자는 내게 주말 예능을 권해 준 분이겠지만.

한참 침묵하던 서인하 국장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이 망할 놈이, 또 상사를 고민하게 만든단 말이지.”

“……그, 죄송합니다.”

“됐어. 일단 나가 봐. 한 번에 결정 내릴 수 없는 일이란 걸 모르진 않을 거 아냐.”

“……네.”

더할 수 없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에, 국장실을 나섰다.

자리로 돌아오자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박주영 선배가 낮게 물어왔다.

“뭐야, 국장실 들어갔었어? 왜?”

“……음, 그냥, 휴가 잘 다녀왔냐고 물어보셔서요. 대답해 드리고 왔습니다.”

“뭘 그런 걸 굳이 국장실로 불러서 물어? 진짜야?”

그럼 진짜죠, 하는 대꾸를 해 주고 나서 국장실을 힐끔했다.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 제발 그 둘에게 진심이 통했어야 하는데.

* * *

“저거저거. 아주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강대한이 나가자마자 서인하가 한숨과 함께 내던진 말이었다. 정민우는 이 말에 웃어도 되나 생각하면서 그를 보았다.

“저렇게 키운 건 서 국장 아니십니까.”

“그래, 나지. 내가 아주 미쳤지.”

주말 예능, 웬만한 예능 PD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타이틀이다.

주말 예능만 제대로 만들면 PD로서의 주가가 올라갈 뿐만 아니라, 단숨에 스타성도 얻을 수 있다.

과거 그렇게 스타 PD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인하도, 왕이범 이사도 모두 주말 예능 경험자들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박차 버린 강대한은, 거기서 한술을 더 떴다. <당잠사> 부활이라니.

“아, 술 당기는데. 정 팀장, 나가서 낮술이나 한잔할까?”

“싫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 오후부터 내리 미팅 달려야 해요.”

“내가 알아서 조절해 줄게, 그 정도는.”

“추희열하고도 약속 있는데, 그것도요?”

“잘 다녀와.”

농담 따먹듯 이야기를 한 뒤, 서인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러다 어조가 바뀐다.

“기특하기도 하네. 요물이라더니, 확실히 요물은 요물이야. 언제 저렇게 머리가 커졌지.”

“그러게요. 자기 선배를 먼저 나서서 챙길 줄 알고.”

이제 고작 3년차에, 성공했다고 한들 이제야 입봉 프로그램 하나 있는 예능 PD가, 한 방송사의 국장과 팀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솔직히…… 들으면서 좀, 설레긴 했어.”

서인하가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면서 이야기했다.

“<당잠사> 부활이라니. 현준영이 나가떨어지면서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건데.”

“저도 그렇습니다. <당잠사>를 이야기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수정이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화를 낼까, 기뻐할까?”

“제가 잘 모르긴 하지만, 방 PD 성격이면 대번에 쳐들어와서 소리치지 않을까요? 자기 프로그램 남한테 맡겼다고.”

“그랬으면 현준영 대신 자기가 했어야지. 회사 때려치우지 말고.”

서인하의 눈빛이 아련함이 끼었다. 사실상 경영진의 무리한 요구였긴 했지만,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줄은 몰랐던 방수정이 부쩍 그리웠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정민우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서인하는 추억으로 빠질 뻔한 정신을 되돌린 뒤 그를 보았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사이즈가 아냐. 정할 수 있는 사람한테 내던져야지.”

“왕이범 이사님께 보고하시려고요?”

“어차피 주말 예능 걷어찼다고 이야기해야 하니,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미쳤냐고 하겠지. 어쩌면 건수 잡아서 나더러 본부장 자리 도장 찍으라고 할지도 몰라.”

왕이범도 한창때는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아마 지금처럼 점잖아야 하는 입장이랄지라도 대번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근데 국장님은 어떠십니까?”

“뭐가.”

“설렌다고 하셨잖아요. <당잠사> 부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민우의 진지한 물음에 서인하의 눈빛이 다시 아련해졌다. 과거의 어딘가를 더듬는 눈으로, 그가 히죽 웃었다.

“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긴 하지.”

그것이 솔직한 서인하의 마음이었다.

좀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런 잔잔한 마음에 강대한이 바위를 던져 놓고 간 것이다.

돌멩이였어도 파문이 끊이지 않았을 텐데, 놈이 던진 건 바윗덩이였다. 물이 아예 흘러넘치다 못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본부장 자리 말이야.”

“왜 갑자기 이야기가 거기로 가십니까.”

“대한이 말을 들으니, 내가 왜 그걸 고민하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어.”

서인하는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고선 소파에 몸을 묻고,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덧붙였다.

“위에서 시키든 말든, 저렇게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 애가 있잖아. 고작 3년차 주제에 말이야. 그런데 난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단 말이지.”

“예? 아니, 잠깐, 국장님. 설마…….”

“어허, 앞서 나가지 마.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거절하기로 맘먹었다는 건 아니니까.”

정민우가 눈에 띠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국장님이 출세하셔야 저도 이끌어 주실 거 아닙니까.”

“라인 만들어서 월급이나 타 가는 도둑놈도 아니면서, 말은.”

맘 맞는 정민우를 서인하도 진심으로 아꼈고, 그 마음을 정민우도 알고 있었다.

“뭐, 그건 그거고.”

서인하가 분연히 일어섰다.

“올라가십니까?”

“그래. 너도 가자.”

“예? 제가요? 왜요?”

“왜긴 왜야. 너희 팀 일이잖아? 강대한, 5팀 아냐?”

“어, 어어…….”

치사하다고 외치는 정민우를 끌고 서인하는 이사실로 올라갔다.

왕이범을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10분 정도 밖에서 대기하다가, 비서의 알림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밖에서 업무를 보던 비서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사내 메신저를 타고 방송사 안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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