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휴가를 보내는 법
왕이범이 서인하에게 제안한 것은, ‘미디어콘텐츠개발전략기획본부’의 본부장으로의 승진이었다.
이름도 긴 이 부서가 회의에 거론된 건 벌써 지난 부서 개편 때의 일이었다.
당연히 서인하도 모르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부서 개편이 이루어진 지 아직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타이밍이건만.
상황이 이렇다면 올해 안에 추진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미디어콘텐츠개발전략기획본부’라니, 이름이 참 기네요. 명함에 담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건 본부장 달고 알아서 고쳐. 누가 시비를 걸겠어?”
왕이범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현역 PD 시절부터 서인하가 자주 봐오던 웃음이었다.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그럼 안 즐겁나? 내가 자네를 밑에 두고 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이렇게 본부장 자리를 제안하고 있고. 세월 참 빠르고, 우스워. 그치?”
“빠른 건 맞는데 우스울 건 없을 것 같네요.”
서인하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그만큼 친한 사이라서 솔직하게 내비치는 것인데, 왕이범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아해했다.
“제안하면 분명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로인가 본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암튼 본부장이라고 다를 건 없어. 그냥 지금 예능하는 거에 드라마든 인터넷이든 추가되는 것뿐이지. 막말로 제작부장이랑 다를 게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물론 그의 말대로 서인하는 제작부장 시절에도 드라마, 예능 등을 총괄했다.
그러나 본부장 자리는 고작 제작부장이랑 같을 수가 없다. 올라선 자리가 다른 만큼 다루는 스케일이 달라질 것이고, 회사 내부의 PD만이 아니라 자회사, 계열사로 있는 외부 제작사들까지 움직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사급의 파워를 가지게 되는 것이나 진배없다.
“내부만이 아니라 자회사들까지 컨트롤하게 될 거잖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좋은 기회라고 하는 거야. 그만한 스케일을 이끌어갈 사람이 따로 있겠어? 나는 자네밖에 안 떠올라. 드라마 PD고 예능 PD고, 그만한 경력과 성과를 쌓은 사람이 달리 있겠어?”
물론 왜 없을까. NBS 개국 이래 무수히 많은 베테랑들을 스카웃했다. 애초에 서인하만 한 베테랑이 또 없다면 NBS는 벌써 문을 닫았을 거다.
그렇지만 왕이범은 그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서인하를 밀어 주기 위해서.
“과하게 평가해 주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제안은……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아직 시간은 있죠?”
“시간이야 있지만…… 영 소극적인 거 같군. 따로 조건이 있으면 말해 봐. 100%는 아니더라도 80% 정도는 내가 힘써 볼게.”
“조건 같은 건 아직 생각 안 해 봤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
“좀…….”
서인하는 뭔가 말하려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은 혼자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너무 고민되면 SOS 보낼 테니 술이나 사 주십시오.”
“뭐…… 그래. 자네 연락이라면 언제든 기다리지. 그래도 긍정적인 답변을 주면 고맙겠어.”
“예.”
서인하는 인사를 하고 왕이범 이사실을 나왔다. 문이 닫힐 때까지 왕이범이 쳐다보고 있어서, 히죽 미소는 지어 주었다.
그러나 문을 닫는 순간 그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비서의 인사를 대충 묵례로 받고 나오면서 서인하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본부장이라…….”
분명 좋은 기회였다.
NBS라는 굴지의 방송국 안에서 요직 중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왕이범 이사의 말대로, 본부장이 되면 방송국에서 개발하는 드라마, 예능, 교양을 통틀어 모든 콘텐츠에 대한 권한이 주어질 것이다.
그야말로 무소불위. 당장 얼마 전이었다면 분명 그 제안에 가슴이 뛰었으리라.
하지만 정작 지금은 묘하게 마음이 식어 있었다.
본부장 자리라고 해 봐야 결국은 고급스러운 머슴일 뿐이다.
방송국의 탑이 아니고, 전권을 준다 한들 무시할 수 없는 데다 모셔야 할 존재들이 그 위에 있을 것이다.
“후우…… 모르겠네.”
이 복잡한 심정은 쉬이 정리될 것 같진 않았다. 인사치레였지만, 정말 왕이범에게 술이나 한잔 얻어 마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인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거참, 인터뷰는 암만 해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처음 보는 기자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게 쑥스러워서 나도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휴가 중에 이렇게 인터뷰 요청 드려서 참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차라리 휴가 기간이 편해요.”
휴가가 아니었다면 인터뷰를 할 시간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4차 경연부터는 정말 잠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바쁘게 보냈었고, 방송 이외의 것에 정신을 할애할 짬도 없었다.
방송이 끝나고 현판을 뗄 때까지는 줄곧 그 상태였다. 그러니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도 응답할 겨를이 없던 것이다.
휴가 첫날.
오늘은 오전부터 3건의 인터뷰를 소화했다.
이번이 마지막.
빠르게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인터뷰 자리였다.
“현준영 팀장 건으로는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앞에 있는 민준기 기자는, 이번 현준영 팀장 투표 조작 건을 단독 보도한 곳의 기자였다.
인터뷰 요청이 수도 없이 들어와서 서인하 국장에게 잠깐 상담을 요청했었다. 그가 찍어 준 요청 언론사 중에 낯익은 이름이 보여 다시 묻자, 그는 맞다고 긍정해 주었었다.
“서 국장님께서 민 기자님 인터뷰는 꼭 받으라고 말씀 주시더라고요. 저도 방송에 도움받은 거나 마찬가지라서, 이렇게 만나면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에이, 제가 한 기사도 아닌걸요. 저희 팀장님 단독이시라. 감사해하시더라는 말씀은 전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신.”
“네.”
“다음에 혹시 필요하실 때 저 찾아 주시면 열심히 응답해 보겠습니다.”
그는 먼저 인사를 나누며 내민 명함을 톡톡 두들겨 보였다.
기자와의 커넥션이 이런 식으로 생겨나는 건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난 이젠 제법 어색하지 않은 업무용 미소를 지었다.
……익숙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를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넵.”
따라온 사진 기자가 몇 장의 콘셉트 사진을 찍고서, 민준기 기자의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 오늘 소화한 인터뷰 중 가장 길었다.
하지만 앞서 했던 인터뷰들보다 편했다. 민준기 기자의 화술이 좋아서였다. 물론 내가 앵무새인지 앵무새가 나인지 모를 고정 질문들은 여전히 힘들었다.
바로 이런 질문들이다.
“<언더커버 싱어>를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가 있을까요?”
앵무새가 될 타이밍이군.
“어디 하나 꼽기 힘들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힘들었는데…… 이런 말씀 드리면 기사로 쓰실 거죠?”
“하하하, 녹취만 해 두겠습니다, 녹취만.”
어쨌든 하다 보면 는다고, 1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녹취용 녹음기를 끈 다음, 마지막 사진을 찍고 나서 민준기 기자가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전 최근에 예능계가 너무 굳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요?”
“사실상 TV의 힘이 약해지는 때 아니겠습니까. 인터넷콘텐츠…… 1인 미디어다 뭐다 하면서 점점 시청자들이 TV에서 멀어지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TV 방송은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래도 예능 쪽 기자다 보니 그런 의미에서 예능이 더 걱정되기도 하고요. 사실 드라마나 교양 같은 경우는 여전히 TV의 장점이 있으니까요.”
그 의견에는 나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가 분명 있었다.
매번 기획 때마다 고민하는 부분이니까.
“그런 와중에 강 PD님의 활약상을 보니, 뭐랄까, 아직 그래도 우리 예능계가 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행기 많이 태워 주시네요.”
어, 이런 농담도 할 수 있네. 이제…….
어쨌든 민준기 기자의 말은 이어졌다.
“하하, 기자로서의 감입니다. 앞으로도 강 PD님은 이 예능계에서 굵직한 흐름을 만들어 주셨음 합니다. 기대하고 있거든요.”
들어도 들어도 ‘내가 너 띄워 줄 테니까 잘 들어?’ 하는 식의 대화는 힘들었다.
다만, 녹음기를 끄고 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인터뷰와는 별개로 정말 민준기 기자의 본심일 것이다.
그런데도 쑥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어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한번 식사나 같이 하시죠. 이 근처 좋은 식당에서요.”
민준기 기자는 그렇게 인사를 해 주고서 떠났다. 나야말로 그냥 식사도 같이 할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서야 본격적으로 휴가가 시작됐다.
하지만 집돌이가 휴가라고 행선지가 딱히 있진 않았다. 오늘 갈 곳은 본가.
본가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잔칫상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 말리고는 오랜만에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외식을 하러 나갔다.
“아이고, 월급 받는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엄마, 저 요새 보너스 많이 받아요. 제가 방송국에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동안 어머니가 몇 번 이야기하셨던 참치 집으로 갔더니, 막상 식사는 가타부타 말이 없으시던 아버지가 더 잘하셨다.
아버지랑 술도 나누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랑 붙어서 NBS 드라마를 보면서 이것저것 뒷이야기를 해 드리며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바꾼 채널에서 <언더커버 싱어>가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저기, 저 아이 참하더라.”
그렇게 어머니가 가리킨 사람이 바로 아온이었다.
노란 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발라드에 맞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마지막 무대였는데, 어머니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예? 참하다니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하고, 어머니가 깎아 주신 과일을 한입 물고 물었다.
“그, 뭐라고 하니. 요새 아이들이 카메라 들고 찍는 거 있잖니.”
“브이로그요?”
“그래, 브이 뭐시기 그거. 네 방송 보고 몇 개 찾아 봤거든. 보니까 참한 아가씨더라. 방송 만들면서 혹시 썸 탈 일은 없었니?”
뭐지, 우리 어머니 인싸셨나?
브이로그라면 미튜브나 포털을 봤다는 소린데, 거기다 썸이라니. 나는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가 겨우 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이 차가 얼만데.”
“요즘 세상에 나이 차가 무슨 소용이래니. 미성년만 아니면 됐지.”
“여편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뒤에서 신문을 보는 척하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찔러 들어왔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굳이 저 애가 꼭 좋다는 건 아니고. 네가 너무 일만 하는 것 같아서 그래. 좋은 나이에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연애요…… 네, 그러게요. 해야죠.”
내 마지막 연애는 대학교 때였다.
입사 이후로는 그 흔하다는 썸조차 없어서, 아마도 몸 안의 연애 세포가 메마른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엄마는 네가 좋다면 다 좋으니, 데려오기나 하렴.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
“그럼요. 결혼해야죠.”
“그래. 손주까지는 아직 안 바랄 테니 며느리나 좀 만들어 와.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응?”
아까 용돈 드린 게 다 그 일만 한 덕분인데요…….
아버지가 뒤에서 헛기침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을 보니, 괜히 머쓱해졌다.
“노력해 볼게요.”
본가에서의 하룻밤은 어정쩡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 * *
휴가 둘째 날.
그동안 일 때문에 개인 업무를 볼 게 잔뜩 밀려 있었다.
혹시나 하는 사태를 위해 여권 갱신을 해 놓고, 운전 면허증도 갱신하고, 은행 업무도 보고.
“잔고 많이 모였는데 어디 투자할 생각은 없으세요?”
통장을 정리해 준 은행직원이 그렇게 물어왔는데, 슬쩍 웃기만 했다.
투자라면…… 사실 AGD 앱이라는 치트키가 있으니,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데다 AGD 앱을 쓰고 싶진 않았다.
뭣보다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곤 해도 고이득을 노리려면 내가 투자를 공부해야 한다.
그만큼 내 본직에 소홀해질 것이다.
현준영을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내 본업을 배우기에도 벅차다.
물론 돈 벌고 성공하는 빠른 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꼭 옳은 길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냉정하게 몸을 돌려 은행을 나왔다.
[엑시트최효명: 내일 괜찮죠?]
때마침 나오는 길에 그렇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답장을 치려고 하다가, 시간을 보고 그냥 전화를 했다.
“어라, 일하는 중 아니에요?”
“나 휴가랬잖냐.”
“아, 맞다. 그래서 내가 초대한 거죠?”
“정신이 없구나. 너는 언제 귀국했냐.”
“나 어제 귀국했잖아요. 지금 어느 나라에 영혼을 두고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엑시트의 해외 투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국내 팬들의 너무 거센 요청이 있어서, 원래라면 쉬는 주간이었던 이번 주에 국내 공연이 특별히 추가되었다.
효명이는 잘되었다고 그곳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리고.
“김 팀장님이 내일 너 볼 수 있는 거냐고 좋아하더라.”
“하하하. 그렇게 큰 팬이 와 주시니 내일 공연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효명이는 김유미 팀장도 잊지 않고 같이 와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휴가 전에 김유미 팀장에게 연락했고,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해 주었다.
“아 참, 맞아. 그리고 오늘 연락받았는데요.”
“어.”
“민희 누나도 온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