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옛 인연들
“오, 권 PD. 왔어?”
권민헌 PD를 회식 자리에 부른 장본인은 서인하 국장이었다. 이미 그는 벌게진 얼굴이어서, 그를 보자마자 권민헌 PD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국장님, 회식 시작한 지 1시간밖에 안 된 거 아닌가요? 대체 얼마나 드신 겁니까?”
“별로 안 마셨어! 그리고, 오늘같이 좋은 날에는 마셔야지! 안 그러냐, 정 팀장아?”
“그렇죠! 그 말대로입니다!”
정민우 팀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분명 회식은 같이 시작했는데 왜 이 두 사람만 몇 시간째 퍼 마신 것 같을까?
“권 PD, 일단 술 받아. 늦게 왔으니 후래삼배. 알지?”
“저, 그러다 죽습니다.”
권민헌 PD는 술이 그렇게 센 편이 아니다. 그래서 회식 때에도 늘 조절하면서 마시는데, 그래도 끝까지 자리에 남아서 뒷정리까지 하는 모범생이었다.
거절할 생각은 아닌지, 그가 정민우 팀장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자자, 권 PD도 왔으니까 또 한잔 하자! 모두 잔 들어!”
서인하 국장이 신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이 빈 사람들이 서둘러 잔을 채웠다.
“오늘 마시고 죽자!”
“죽자!”
“건배!”
“건배!”
서인하 국장의 선창과 함께 모두 잔을 들이켜는 동안, 민희가 좌중을 둘러보고 웃어 보였다.
“죽으면 안 됩니다! 아시죠? 저희 내일도 할 일 많아요?”
제작 뒷정리가 완전히 끝나는 건 내일 금요일이다. 그런 의미를 담고 민희가 눈을 부라리자, 신나게 잔을 따르고 있던 감독들이 쿨럭쿨럭 기침해 대며 눈치를 보았다.
“민희야, 뭘 그리 보채냐. 정리 좀 며칠 더 걸려도 돼. 괜찮아. 내가 허락한다니까?”
서인하 국장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민희가 웃으며 받아쳤다.
“아직 <뮤직스케치> 무대 쪽 일이 남았는데, 그것도 더 걸려도 될까요?”
“야! 너희들! 적당히 마셔!”
승자는 민희였다.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권민헌 PD에게 잔을 따라 주었다.
“권 PD님 오랜만이에요.”
“어어, 그래. 이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선배, 제 잔도 받으십쇼.”
“고맙다, 주영아.”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 그리고 연차 높은 감독들은 그들끼리 놀게 놔두고, 우리는 왕년 <당잠사>팀끼리 의기투합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요새 1팀 시끄럽죠?”
박주영 선배의 물음에 권민헌 PD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렇지 뭐……. 그래도 팀장님이 처리해 주던 일들이 있는데, 그 위치가 사라지니까 팀 전체가 고생하는 중이야.”
“선배가 특히 더 고생이시겠죠. 팀장 대리신데.”
“나야 뭐, 다른 PD들이 잘해 줘서 그럭저럭하고 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조 속에 피곤함이 엿보였다.
서인하 국장이 오늘 그를 이 자리에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권민헌 PD는 현준영 팀장에 의해 1팀으로 끌려간 거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끌려간 이후로는 현준영 팀장의 여행 예능을 같이 만드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해서, 조금이라도 숨 돌릴 구석을 주려고 부른 거였다.
과거 친했던 <당잠사> 팀을 만나서 술이라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라는 배려인 것이다.
저쪽 한구석에 모인 아재들 사이에서 평소 같지 않게 하이텐션으로 소리치고 웃고 있는 서인하 국장이지만, 자기 역할만은 어느 순간에라도 챙긴다. 정말이지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저분들은 왜 저리 기분이 좋대? 특히 국장님 말야.”
“<언더커버 싱어>가 수출 확정이 날 것 같다던데, 그것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아요.”
“오, 그래? 축하해, 대한아. 아니지. 입봉도 했는데 강 PD라 해야지.”
“아니에요, 선배. 아무렇게나 불러 주십쇼. 그리고 감사합니다.”
권민헌 PD가 잔을 가져와서, 나도 잔을 마주쳤다.
“내 밑에서 분명 이것저것 가르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우리 예능국의 대들보가 되셨네.”
“강들보시네, 강들보. 아니, 강대뽀 어때요?”
“푸하하! 강대뽀 좋네, 민희야!”
권민헌 PD의 말에 민희와 박주영 선배가 또 건수 잡았다고 놀려댔다. 나는 둘을 노려봐 준 다음에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3년차에 입봉하고, 그 프로그램이 시청률 신기록을 세우고, 수출까지 눈앞에 두고…… 그게 흔한 일인가? 그 정도면 대들보라고 불러도 되지 뭘.”
칭찬을 해 주고 있는데 막상 듣는 입장에선 뭔가 뜨뜻미지근했다.
차분한 어조 뒤로 묘한 착잡함이 느껴진달까. 내가 잘못 감지한 걸까.
사실 권민헌 PD는 현준영 팀장의 서브를 뛰느라 입봉 시기를 놓쳤다. 그전에 있었던 기회도 방수정 PD 사단으로서 남느라 미뤘던 거고.
나도 사람이다 보니 막상 이런 현장에 있게 되면 불편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박주영 선배가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자연히 화제가 넘어간 것이.
“진짜 저희 이렇게 모인 거 정말 오랜만 아닙니까? 1년은 넘은 것 같은데. 어라, 구 작가는 어디 갔어?”
“아, 심부름 좀 보냈어요. 저기 오네요.”
“앗! 권 PD님! 언제 오셨어요!”
<당잠사> 팀의 막내 작가였던 구은경 작가도 돌아와서 권민헌 PD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우리는 예전을 떠올리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조금 가라앉으려 했던 내 기분도 어느새 회복되고, 분위기는 파할 때까지 화기애애했다.
우연히 주변을 보다가 서인하 국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재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이쪽을 살피며 눈웃음 지어 주었다.
나중에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며, 나는 이 자리를 즐겼다.
* * *
회식 다음 날도 정리는 이어지고, 동시에 <뮤직스케치> 무대 준비도 진행됐다.
<뮤직스케치>는 이제 라이브 생방송에서 녹화 방송으로 바뀌었는데, 그만큼 좀 더 무대에 공을 들일 수 있었다.
무대 기획의 중심은 물론 <뮤직스케치> 팀에서 진행하는 것이지만, 관계자인 나도 기획에서 완전히 빠질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기획 회의에 참여해서 최적의 확률이 보이도록 이끈 결과.
『‘추희열의 뮤직스케치’의 ‘언더커버 싱어’ 특집, 대호평의 물결!』
『‘뮤직스케치’ 시청률 5.6%로 반등!』
『‘언더커버 싱어’의 가수들,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다』
전문 기사들과 인터넷의 반응들이 뜨겁게 되돌아왔다.
노력한 만큼, 고생한 만큼 반응이 돌아왔을 때 무엇보다 보람이 느껴지는 법이라, 우리 <언더커버 싱어> 팀은 해산 전에 정말 큰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몇 달이 훌쩍 지나가네, 정말.”
“가을쯤에 시작했는데 어느새 해가 지나고 봄이 다 되어 가다니.”
“나이도 먹고 말야.”
“같이 늙어 가는 주제에 입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안 배웠어?”
민희와 화이트보드를 지우면서 그런 잡담을 나누는 동안, 박주영 선배가 돌아왔다.
같이 돌아온 오지환이 상자 가득히 짐을 안고 있었다.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
“어…….”
오지환은 대답을 못 하고 박주영 선배를 힐끔거렸다.
“내 짐이야. 편집실에서 몇 달 살았더니 이렇게 짐이 많더라.”
그 짐을 오지환에게 들게 해 놓고서 그는 뻔뻔하게 웃어젖혔다. 난 가만히 오지환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고생했어. 지난 몇 달도, 그 짐도.”
“가, 감사합니다.”
“빨리 던져 두고 오 PD 개인 짐부터 정리해. 정리되는 대로 먼저 올라가도 되니까.”
오지환은 상대적으로 짐이 적었다. 재빨리 정리하고, 먼저 떠난 작가들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에 민희, 박주영 선배와 셋이 남았다.
맨 처음 <언더커버 싱어>를 만들기 위해 내가 꾸렸던 팀이었다.
“휴가는 다들 뭐 할 거야?”
“전 일단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 갈 거예요. 휴가 동안 찾지 말아 주세요.”
“대한이 넌?”
“첫날에 인터뷰 몇 개 하고, 본가에 가고. 효명이가 공연 보러 오라고 해서 그거 갈 거고. 그 외에는 집에서 숨만 쉴 겁니다.”
“재미없는 놈 같으니. 휴가의 절반이 일 아니냐?”
“선배는요?”
“밀린 방송 봐야지. 술 좀 마시고.”
“재미없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대꾸에 박주영 선배는 피식 웃고서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이 뭔가 하고 내려다봤다가 그를 다시 보았다.
“악수하자고요?”
“뻘쭘하게 하지 말고 빨리 잡아, 인마.”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선배가 휙휙 내 손을 흔들더니 말했다.
“나한테 같이하자고 해 줘서 고맙다. 정말 좋은 경험이 됐어. 여러 가지로.”
“저야말로 많이 도움받았습니다, 선배. 시즌2 하게 되면 그때도 도와주실 거죠?”
“다른 사람하고 하려고 했냐?”
그는 낄낄 웃음을 남기고서,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마저 화이트보드를 지우려고 돌아서자, 민희가 괴상한 표정을 짓고 보고 있었다.
“왜. 뭐.”
“아니, 그냥 명리더랑 사귀는 걸로 하면 안 될까 싶어서. 방금 그 그림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가 않네.”
오한이 드는 듯 어깨를 한차례 부르르 떤 민희도 자신의 짐을 챙겨 들었다.
“다음 기획 떠오르면 꼭 먼저 말하기야. 알았지?”
“그래, 너도.”
박주영 선배보다 더 쿨하게, 그녀는 그렇게 사무실을 나섰다.
난 화이트보드를 전부 지우고, 벽에다 밀어 놓은 뒤, 내 짐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에는 깔끔한 아크릴지로 출력해 다시 붙인 현판이 있었다.
『언더커버 싱어 팀 사무실』
첫 입봉작.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비적이지만, 제작을 진행하면서 얻은 경험들은 더욱 값진 것들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 겪었던 사건들. 풀어간 과정.
이 모두가 이제 내 재산이 될 테지. 그 기반을 열심히 다지고 또 다져야 나는 내가 목표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심장으로 훅 들어온 뭉클한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나는 현판을 뜯어서 가방에 챙겼다.
집에 붙여놓을 첫 번째 현판을.
* * *
<언더커버 싱어> 팀이 해산하고, 모두가 휴가를 떠났지만, 방송국 전체가 휴식기간인 건 아니었다.
서인하 부장은 오늘도 미어터지는 전화에 골머리가 썩을 지경이었다.
“아이고, 김 기자. 인터뷰에 관해서는…… 알잖아. 내가 장담은 못해.”
평소에도 기자들 전화야 매번 받는다지만, <언더커버 싱어>가 터진 이후로는 그 빈도가 훨씬 더 높아졌다.
“서 국장님, 그래도 약속해 주셔야죠. 꼭 저희한테 인터뷰 주셔야 해요?”
“그것참. 그걸 내가 어떻게 정하나, 이 사람아. 우리 강 PD가 정하는 거지.”
“전에는 해 주셨잖습니까.”
“그땐 그때고, 지금은 강 PD도 그런 사이즈가 아니잖아.”
“말이라도 잘해 주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휴가 돌아오면 내가 말 잘해 줄게.”
그런 식의 통화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어졌다.
예능국장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이 정도인데, 본인에게는 얼마나 콘택트가 있었을까. 한차례 상담도 받았으니 분명 꽤 많은 숫자였을 것이다.
강대한이라는 이름값은 이미 뉴비 수준을 과하게 넘어선 감이 있었다.
3년차 예능 PD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서인하도 다른 회사에 있었더라면, 사장아들, 회장친구아들쯤 되는 놈으로 치부했을 거였다. 방송국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스타 PD라고 인식했겠지.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강대한이 걸어온 길을 분명히 알고 있는 만큼, 그 능력과 이름값을 가장 인정하고 있는 것도 서인하였다.
“요물도 이런 요물이 없지, 정말.”
<언더커버 싱어>의 성공으로 방송사 내에서 강대한이라는 브랜드는 더욱 단단해졌다.
본인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 여파는 서인하에게까지 미쳤다.
서인하는 시간을 확인하고, 서둘러 왕이범 이사실로 올라갔다.
“전화 통화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기자들 전화 많이 오지?”
“요 며칠 전화통에 불이 나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래. 조금이라도 강대한 PD를 파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생이야.”
서인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데에서 벌써 눈독을 들인답니까?”
“이제 겨우 3년차 PD가 그만큼 성적을 올려놨잖아. 스타성도 이미 있겠다, 실력도 있겠다, 그렇지만 몸값은 쌀 거고. 눈독 들일 만하지.”
방송계에도 헤드헌팅은 성행한다. 강대한에게서 아직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는 없지만, 딜을 걸 곳이 많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관리 잘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면에서야 서 국장이 잘할 테니 딱히 걱정은 안 해.”
왕이범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를 오래 봐 온 서인하는 그 웃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준영의 투표 조작 건으로 이사진 내에서도 서열 변동이 생겼다.
신호현 이사의 입지가 여지없이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꼬리 자르기를 했다지만, 타격을 아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줄어든 입지만큼 왕이범 이사의 입지는 올라갔다.
직속 예능국장이 키운 PD가 프로그램을 성공시켰으니, 선구안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 웃음은 그 모든 과정의 흡족함을 담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서 국장.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는지 대충 눈치채고 있을 거야.”
출근 시간에 전화가 와서 호출을 받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얼마 전부터 꾸준히 왕이범이 귀띔을 해 준 바도 있었고.
“내가 보기에는 적격인 사람이 지금 따로 없어. 마땅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쓰고 싶은데, 현재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겠나. 외부에서 사람을 들일 수도 없고.”
“과찬이십니다.”
“나만이 아니고, 다른 이사진도 마찬가지 평가들이야. 이게 다 서 국장이 잘 살아왔다는 증거지. 아주 이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잔뜩 뜸을 들인 뒤 왕이범은 말했다.
“본부장, 생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