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유종의 미
보우건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내 입장에서는 정당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보우건에겐 아쉬운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좋은 회사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93%’라는 확률을 만났으니, 나로선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우건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거였다.
“일단 제안서를 한번 보세요.”
나는 제안서를 열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계약서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매니지먼트 제안서 정도로, 훑어본 바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어? 여기, OMG인가요?”
“예, 맞습니다.”
“헐! 정말요?!”
제안서 앞에 큼지막하게 회사명이 적혀 있음에도 되묻는다.
뭐랄까,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놀란 것 같은데.
인디 레이블이라고 해서 조사를 해 봤는데, 단순하게 작은 회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나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유명 래퍼가 만든 레이블로, 설립 이유가 언더그라운드의 실력자들을 발굴할 목적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 보우건에게 러브콜을 보낸다는 것은, 그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
“제가 여기 레이블 정말 좋아하거든요.”
역시. 놀란 것 같더니 그런 이유였구나.
“그랬습니까?”
“소속 아티스트들 특유의 스타일을 지켜 주면서도 정말 비트를 잘 찍어 줘요. 이 정도로 아티스트의 개성을 살려 주는 곳도 또 없을걸요. 가면 무조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하이지랑은 좀 다른 느낌이죠.”
와, 지금껏 대화 나눈 중에 제일 들떠 보이는데.
하긴, 대화의 주제가 자기 구역으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잘 알고 계시니 이야기는 빠르겠네요.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리면,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AGD 앱까지 검증한 곳이니 나로서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장본인인 보우건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
나는 혹시나 선을 넘는 강요처럼 보일까 싶어, 보다 신중하려고 힘썼다.
“지금 바로…… 답해야 할까요?”
제안서를 살핀 다음 보우건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뇨, 계약은 충분히 고민해 보셔야죠. 저야 한 다리 건너 부탁 받은 꼴이니 저한테 득이고 실이 될 것도 없습니다. 편하게 결정해 보세요.”
“……예.”
보우건도 신중히 답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그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마음의 짐도 덜었겠다.
“자, 그럼. 당장 우리 일 이야기를 해 볼까요?”
* * *
보우건의 미팅 결과. OMG 검토 중. <뮤직스케치> 무대 확정.
만족스러운 결과였고, 이제 다음은 아온이었다.
<언더커버 싱어>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한다면 우승자인 아온이었다.
원래 커버계 BJ일 때도 실력 면으로는 원탑 찍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아무래도 부족했다.
<언더커버 싱어>는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확실히 보충해 줬다. 그 결과 블라하이의 독주를 막아서고 1위를 탈환하는 기적을 선보이기도 했다.
<언더커버 싱어> 최종 우승 이후에는 온갖 곳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자고 싶어요!”
회의실에서 만난 그녀는 대뜸 그렇게 소리쳤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안 나가는 건데! 아이고!”
옆에서 남만덕 매니저가 얼굴을 손으로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에 늘어졌던 아온이 확 고개를 쳐들었다.
“참, PD님. 저 <전동시> 나가요! 만덕이 오빠랑!”
“와, 정말요?”
<전지적 동반자 시점>은 스타와 매니저의 일상을 그리는 관찰 예능으로, 심야 시간에 방영됨에도 불구하고 10%를 넘나드는 시청률의 인기 방송이었다.
그동안 배우, 가수 등등 많이 출연하긴 했지만 BJ 계열은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
“BJ로는 최초겠네요?”
“네!”
“축하드립니다, 남 매니저님.”
“하하. 쑥스럽습니다. 저는 여전히 낯부끄러운데, 아온이가 꼭 하자고 하네요.”
“오빠도 장가가야 할 거 아냐? 이 기회에 얼굴 좀 팔고 장가 보내야지!”
“야, 방송이랑 장가랑 무슨 상관이야.”
“놔두면 안 생기잖아!”
안 생길 사람은 어차피 안 생기는 건데…….
인생의 진리를 모르는 아온은 남만덕 매니저랑 또 남매처럼 티격태격했다.
내가 <전동시> PD라면 이 두 사람의 남매 케미를 무조건 밀어붙일 것 같다.
확률을 안 봐도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갈 테니까.
한동안 그렇게 근황을 물은 다음, <뮤직스케치> 스케줄을 협의했다. 미리 이야기를 전해 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협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촬영일은 확정인데, 무대 콘셉트에 따라서 시간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만 추후에 다시 논의하면 될 것 같네요.”
“에이, 무대 콘셉트가 뭐가 있겠어요. 저는 ‘겨울비’만 제대로 부르면 돼요!”
<뮤직스케치> 무대는 최종 경연에서 사용된 오리지널 곡을 중심으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아온은 최종 경연 무대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열심히 준비해 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실력이야 내가 애당초 걱정할 수준이 아니니까, 속 편하게 기다려도 될 것 같았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건 또 다름이 아니라…….”
이런 스케줄 협의라면 남만덕 매니저에게 따로 전화 통화만 해도 된다. 하지만 얼굴을 보고 할 이야기가 있었다.
“아온의 데뷔 앨범 말입니다. 일정은 대략 정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음반사랑 이야기해서 스케줄은 어느 정도 확정했습니다.”
“곡은 정해졌나요?”
“아니요, 일단 지금 라인업을 짜 보고 있습니다.”
“아직 확정한 게 아니면…… 부탁드릴 게 있는데. 그 앨범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어서요.”
“예?”
남만덕 매니저가 아온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아온의 입이 먼저 벌어졌다.
“헉! 설마! 아니죠?!”
“맞습니다. 효명이가 곡을 쓰고 싶다네요.”
“우와! 우와! 우와아아!”
아온이 벌떡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서, 남만덕 매니저가 다시 힘겹게 앉혀야 했다.
“타이틀 결정!”
“야야, 그거 그렇게 정하는 거 아니야, 인마.”
“몰라! 내가 부를 건데 뭐 어때! 아무튼 결정!”
또 두 사람이 요란하게 티격태격해 대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다가, 소강상태가 되고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
“지난번 ‘겨울비’ 무대를 보고 나서 막 이것저것 악상이 떠올랐다고, 저한테 부탁하고 오라고 매일 난리예요. 이렇게 좋아해 주실 줄 알았으면 진즉에 허락받았다고 뻥을 쳐 볼 걸 그랬네요.”
“물론이죠! 명리더 곡인데 소녀가 어찌 거부를 하겠어요.”
아온은 여전히 흥분해서 무슨 말투를 쓰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남만덕 매니저는 프로다웠다.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겨울비’도 음원 성적이 좋았으니, 다시 곡을 받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곡만 좋다면야 얼마든지 타이틀로 삼아도 될 것 같고요.”
“무슨 소리야, 오빠. 무조건 타이틀이라니까?”
“넌 좀 가만히 있어. 혹시 어떤 곡인지는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웃으며 스마트폰을 슬그머니 꺼냈다.
“직접 들어 보시죠.”
“예?”
“그렇지 않아도 통화 한번 시켜 달라고 하더라고요.”
내 말에, 아온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아니, 사람 눈이 저렇게까지 커질 수 있나?
금발의 머리가 쭈뼛 서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로 놀란 눈치였다.
“토, 통화요? 여기서? 지금?!”
“이야기 잘되면 통화 한번 시켜 달라고, 직접 들려주겠다고 조금 전부터 대기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베를린에서요?!”
여태까지 치고받고 했던 왈가닥 같은 모습은 어디 갔는지 영락없이 수줍은 소녀였다.
아, 이 텐션엔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아……. 나는 애써 참으며 영상 통화를 걸었다. 대기하고 있었기에 금방 연결됐다.
“안녕하세요, 최효명입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인연’ 엄청 좋아해요!’
효명이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아온이 벌떡 일어나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만덕 매니저가 다시 황급히 그녀를 끌어 앉힌 다음에, 고개를 내밀어 인사했다.
“매니저 남만덕이라고 합니다. 독일이시라고요?”
“예, 내일 공연이라서요.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시간 뺏어서 죄송하네요.”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인사치레가 그렇게 몇 번 오간 뒤, 효명이가 다시 말했다.
“이렇게 통화가 되었다는 건 곡을 써도 된다는 거죠?”
“물론이죠! 타이틀로 할게요!”
“야, 좀 앉아 있어 봐. 저희는 영광이지만, 플래티넘하고 이야기를 해 봐야 하지 않을지…….”
“물론이죠. 그럼 궁금하실 텐데 곡부터 들려 드릴게요.”
작은 화면 안에서 효명이는 기타를 가지고 왔다. 그 모습에 아온이 다시 흥분하는 걸 남만덕 매니저가 진정시킨 뒤, 효명이는 몇 곡을 샘플로 연주했다.
연주가 흘러나오자 아온도 매우 진지하게 곡을 들었다.
독일에서 날아오는 전파에 음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 저음질을 뚫고서도 좋은 곡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들려 드리는 이유가…… 제대로 가이드 녹음도 못했거든요. 제가 해외 체류 중이라…… 맘에 드신다면 한국 돌아가자마자 제대로 가이드 따서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정하면 되나요? 세 곡 중에?”
“예. 선택해 주세요.”
아온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금세 곡 하나를 골랐다.
‘겨울비’와는 사뭇 다른, 아주 밝은 풍의 곡이었다.
“저랑 의견이 같네요. 저도 이 곡이 아온 님이랑 가장 맞을 것 같았어요.”
“의견이 통했네요! 오빠는 어때?”
“나야 뭐, 두 사람이 정했는데 따로 붙일 말이 없네.”
“그럼 그 곡으로 타이틀 결정!”
“야야, 그건 아니지.”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 효명이도 화면 안에서 웃었다.
“돌아가자마자 가이드 따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는 회사에서 정식으로 연락이 갈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끝난 이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아온이 묘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내가 명리더한테 두 번이나 곡을 받다니……. 이게 다 강 PD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벌떡 일어나 인사하는 그녀에게 내가 손사래를 쳤다.
“제가 한 게 뭐 있겠어요. 아온 님 덕분에 프로그램이 잘되었는데요.”
“그래도요. 제가 망설일 때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있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텐션 높은 모습이 아니었다. 여느 때보다 진지하고 올곧은 눈빛으로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저도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도움은 내가 받은 것 같은데. 방송적으로나, 이들은 모르겠지만 주진혜 과장 건이나.
하지만 두 사람을 무안하게 할 수는 없어서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마지막까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 * *
『‘언더커버 싱어’ 스페셜 시청률 8.5%, 유종의 미』
『NBS-M 시청률의 새 역사를 쓴 ‘언더커버 싱어’ 인기 비결 전격 분석』
『‘언더커버 싱어’ 우승자 아온의 ‘겨울비’ 음원 차트 올킬!』
『커버계 미투버 아온 정식 데뷔 결정! 타이틀곡은…… 엑시트 최효명 작곡?!』
최종 11화가 된 스페셜화가 방영된 이후, <언더커버 싱어>는 완전히 끝났다. 그것도 최고의 결과로.
마지막 화 시청률은 8%대까지 올라갔다.
무려 NBS-M 개국 이후 처음 밟아 보는 수치였다.
반향은 방송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나타났다.
공식 스트리밍 사이트에서의 스트리밍, 다운로드 회수가 신기록을 세웠고, 주요 동영상 플랫폼의 인기 순위에서도 무대 클립 영상들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송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나도 재방송만 틀면 3% 시청률이 넘어가서, 우리 팀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인 줄 아냐, 강 PD.”
포상 회식 자리. 소주를 벌써 몇 번이나 원샷한 서인하 국장은 반쯤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출 확정될 것 같아.”
“예? 수출요?”
“그래. 벌써 줄 서 있는 나라가 일곱 곳이래. 미국에다 스페인에다 영국에다, 아주 난리가 아니라더다!”
최근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각광 받으면서,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 포맷을 수출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다.
<마스크싱어> 같은 경우에는 이미 미국에서 현지화 방영되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고, 몇몇 개의 사례가 더 있었다.
그렇지만, 방송 끝나자마자 수출 확정 이야기까지 도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빨리 결정되는 건가요?”
“그러니까 이사진이 신이 난 거지. 몇 년씩 걸리는 일인데, 이게 지금 몇 달 만에 성사되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현준영이 있었으면 이 좋은 것들을 전부 날릴 뻔했다고, 술기운을 빌려 그때를 투덜거리기 시작한 서인하 국장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언더커버 싱어>가 해외에 수출되다니. 그 부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이 컸는데 이제 확정 직전까지 와 있는 거다.
이 기회에 수출 확정이 될 확률이라도 봐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툭.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강 PD.”
익숙한 얼굴이 인사를 하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 선배! 어서 오세요.”
권민헌 PD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