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폭풍전야
쾅!
서인하는 회의실의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럼에도, 문 닫기 직전에 본 신호현 이사의 여유로운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것이 또 서인하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이봐, 서 국장.”
분노의 걸음으로 떠나려 하는데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면서 따라 나온 자가 있었다.
흰머리가 희끗한 왕이범 이사였다. 그는 예능 PD 출신으로, 서인하를 제작부장, 예능국장 자리까지 이끌어준 스승 같은 존재였다.
그의 익숙한 목소리에 서인하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 국장, 자네가 참아. 이번 한 번만.”
이사실이 즐비한 이 층에는 복도에 다니는 사람도 없다. 조용한 복도에서 서인하는 그래도 이성을 챙겨 나지막하게 일렀다.
“제가 안 참으면 방법이 있습니까, 선배님?”
“그건…….”
“현준영 팀장을 <언더커버 싱어> 팀에 지원 보내라고요? <당잠사> 팀 해체까지 하게 만든 장본인을, 해체한 팀에서 부렸던 PD 밑으로?”
<언더커버 싱어> 팀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적인 스타트를 기록하면서 광고 문의도 계속 늘고 있으니 지원이 못 나갈 이유도 없었다.
내부에서 찾다가 안 되면 외주라도 붙이려고 이미 예정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정 중 어디에도 현준영의 이름은 없었다.
오늘까지는.
답답해하는 것은 사실 왕이범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제자처럼 키운 PD인 서인하를 누구보다 아낀 그였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상 이것은 파워게임이다.
이사진 안에서 신호현의 파워는 결코 작지 않았고, 경력도 나이도 지분도 적은 왕이범에게는 서인하를 챙겨 줄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만 그러니까 좀 익스큐즈 하자. 설마 현준영이 거기 가서도 또 예전처럼 망나니처럼 날뛰겠어? 저도 이번 프로그램 실패한 이유를 알겠지.”
<언더커버 싱어>가 편성된 시간대를 원래 차지하고 있던 여행 예능이 바로 현준영의 작품이었다.
음악과 여행을 섞어 유명 노래가 탄생한 지역을 여행한다는 콘셉트였는데, 방영을 털고 나니 심각했다.
이도 저도 아니라는 평을 들었다. 시청률도, 화제성도, 전문가들의 기사도, 모두 현준영의 실패를 노래했다.
“그래서 더 불안한 겁니다. 아직도 자기가 잘못한 건 없다고 하잖습니까.”
서인하가 예능국장으로 있지만, 현준영을 컨트롤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핑계 대곤 있지만 바로 저 신호현의 위력이 크다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 그렇다는 건 나도 알아. 그치만 경연은 현준영도 잘하는 거잖아. 타사에서 만들었던 오디션 프로그램도 결국 시즌제로 안착시켰고. 이사진에서도 그 부분에서는 안심하고 있다고.”
사실 현준영의 주특기는 대결 구도를 만들 수 있는 예능이다. 그 주특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포맷이 경연이고.
이사진의 판단이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후우, 모르겠습니다. 고민할 시간 좀 주세요.”
“많은 시간을 줄 수도 없어.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 알았지?”
왕이범은 미안하다는 듯 서인하의 어깨를 툭툭 치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서인하는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 욕을 담고 돌아섰다.
“이 더러운 방송계. 내가 때려치워야지, 진짜.”
사무실까지 내려가는 길이 너무나 무겁고 멀었다.
* * *
서인하 국장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현준영 팀장의 지원을 이야기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이미 확정 사실이라는 듯.
“정 팀장이랑 이야기도 해 보고 다른 수를 써 보려고도 했는데, 미안하다. 잘 안 됐어.”
그 어조에서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지원을 거부할 권리 같은 것은 없음을.
그 거부권은 서인하 국장도, 정민우 팀장도 행사할 수 없단 사실을.
어느 선에서부터 나온 이야기일까. 팀장도 아니고 국장이 이 정도면 그 위의 이사진 정도일 텐데…….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나가려 하는 것을 막았다. 일단 당장 들이닥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언제부터입니까?”
“3차 경연 촬영이 언제지?”
“다음 주 화요일입니다.”
“그래, 아마 그럼 월요일부터 갈 거야. 이번 주까지는 후처리 중이라고 했으니.”
3차 경연 직전이라. 타이밍도 참.
“스태프롤에는 4차부터 넣어도 될 거야. 그 정도는 협의해 놨어.”
정민우 팀장이 급히 덧붙이는 말에, 왠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팀에 공유하고…… 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아무튼, 미안하다, 강 PD.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서인하 국장은 거듭 사과했다. 국장으로서 일개 PD에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텐데,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열심히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기만 했다.
문을 나서고, 안에서 두 사람이 다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뒤로하고, 서둘러 민희와 박주영 선배를 호출했다.
[1층 카페로. 빨리.]
[박주영선배: 뭐야, 뭔데. 일단 지금 내려감.]
[이민희작가: 나 5분쯤 더 걸려. 작가들이랑 이야기 중이야.]
[그래. 끝나면 바로 와.]
내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선배도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있었다.
그와 카페 구석에 자리 잡은 다음 곧 민희도 나타났다.
두 사람에게 가감 없이 내가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뭐? 현준영이?”
“미친 거 아냐?”
두 사람의 반응도 다를 바는 없었다. 같이 <당잠사> 때 굴렀으니 마음이 다를 리가 없는 것이다.
“못 바꿔? 어떻게 안 된대?”
“안 된대. 확정이야.”
“무슨 지원을 달라니까 짐을 얹어 주고 있어. 서 국장이나 정 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그분들도 어떻게 안 되나 봅니다, 선배.”
“그걸 어떻게 해 주는 게 상사 아냐?”
박주영 선배는 상사 둘에 대한 불평을 쏟아냈지만, 나도 내심 동의하고 싶은 부분이었기에 말리진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선배도 결국 해결 방법은 없음을 인정하고 커피를 소주처럼 원샷했다.
“젠장, 잘 풀리고 있다 했는데 산이 생기네. 또 신 이사 때문이겠지.”
“신 이사요?”
“신호현 이사 말이야. 현준영 팀장 데리고 온 장본인. 그전 회사에서부터 연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모르는 너희들이 이상한 거지. 소문 다 돌았는데.”
가십이라고 생각하고 흘려들었던 이야기들이 돌고 돌아 이렇게 영향을 주는 경우를 뜻하는 단어가 없을까.
있다면 그 단어라도 때리고 싶은데.
“후우…… 일단 어떻게 바꿀 수는 없는 일이란 말이지?”
“맞아. 그래서 두 사람한테 먼저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 팀의 서브PD와 메인 작가.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 사람과는, 팀원들에게 말하기 전에 상담을 해야 했다.
“대책이 필요해.”
“일단은…… 월요일부터 나온다고 치면은 3차 경연부터 다 참가하겠군. 일단 편집은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무대는…….”
현준영 팀장이 지원을 와서 아무 짓도 하지 않으리라고는, 여기 모인 세 명은 결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3차 경연 무대에는 참견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준비를 마쳐 놓자고 합의했다.
“밑에 애들은…… 현준영이 이것저것 지시할 가능성이 있으니 어떤 일이든 우리한테 컨펌받고 진행하라고 하고……”
“카감님들한테도 일단 먼저 알려 놓고…….”
한 사람이 지원 나오는 것에 대해서 너무 과하게 반응하나 싶기도 하지만, 모자람보다 과함이 낫다는 상황이었다.
일단 좀 더 이야기를 나눠 의견을 합치한 다음, 우린 팀원들에게도 공유하기 위해 일어섰다.
카페를 나서는 박주영 선배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 아까 감이 안 좋다고 하고 뛰어나갔었지. 그게 이 일이었던 거냐?”
“……그러게요. 그런가 봅니다.”
“뭐야, 그래서 갑자기 정 팀장님 만난다고 하고 간 거야?”
선배에게 내 부재의 이유를 들었을 민희도 놀라워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촉새라니까.”
선배가 혀를 내둘렀지만 난 쓴웃음만 지었다. 칭찬임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 * *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경연 무대 준비를 점검하면서, 주말이 지나갔다.
4화 편집을 100%로 마치고, 방영까지 끝내고, 시청률이 다시금 6.5%로 상승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9%]
시청률이 올라가자, 그 시청률을 유지할 수 있는 확률은 도리어 떨어졌다.
여러 대책을 세워 봤자 이 시청률을 유지할 가능성이 9%밖에 안 된다는 확률이었다.
이쯤 되면 호기심이 동할 정도다. 아니, 대체 남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이길래 이러나?
현준영의 존재감이 이 정도라니.
4화 편집본 완성을 위한 확률을 달성하고 돌아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서 답답할 따름이었다.
월요일에 출근하여 화이트보드를 노려보고 있자니, 뒤이어 출근한 박주영 선배가 다가왔다.
“야, 화이트보드를 노려본다고 뭔 수가 나냐.”
그래, 그 말은 맞다.
나는 후우 한숨을 진득하게 쉬고는 그를 보았다.
“현준영 팀장에게 연락 왔었습니다. 오늘 점심부터 오면 되냐고.”
“그냥 별관으로 바로 오라고 하지 왜.”
“그럴까요? 그럼 조금이라도 덜 볼 테니 그 편이 낫겠네요.”
오후부터 경연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라 무대팀까지 전부 모일 예정이다.
차라리 그때가 낫겠지. 나는 현준영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3시까지 별관 스튜디오로 와 주시면 됩니다.]
[현준영팀장: ㅇㅇ]
짤막한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다시 한숨이 나왔지만, 참고 확률 보기를 취소했다.
3차 경연 무대 완성을 위한 확률 보기로 옮겨가자,
[68%]
3차 경연용 스크립트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스크립트 완성 시점에 70%를 넘어가는 확률을 기록했었는데, 이번에는 68%라는 참으로 애매한 수치였다.
“에휴.”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와중에 오전 시간은 훌쩍 사라졌다.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다음에 별관으로 들어갔다.
이제 결전의 시간인가.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어, 강 PD. 왔어? 이건 전에 그대로 세우면 되지?”
“스피커 두 개 추가된 건 이쪽에 설치할게.”
무대 감독, 음향 감독, 미술 감독 등등.
먼저 도착하여 작업을 시작한 이들이, 앞서 설치되어 있던 다른 무대 세팅을 걷어내고 <언더커버 싱어>의 무대 작업에 돌입했다.
우리도 빨리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먼저 도착해 작업에 착수해 있는 것은 모두가 이 방송을 아끼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바쁘게 경연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3시가 되자,
“저, 강 PD님. 현 팀장님 오셨습니다.”
오지환이 바쁘게 뛰어와서 입구 쪽을 가리켰다. 나는 스크립트를 체크하면서 촬영팀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는 감독들과 악수를 하면서 관객석의 계단을 내려오던 현준영 팀장이 때마침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현 팀장님.”
다가가 인사를 하자, 그가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래, 강 PD. 오랜만에 같이 일해 보겠네요.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연출진 인사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리고 뭐부터 해야 하지?”
나는 오지환에게 눈짓했다.
“여기는 오지환 PD입니다. 이 친구가 설명해 줄 겁니다. 인사하시고 나면 무대 세팅 맡아 주십시오.”
“알았어요. 이게 스크립트인가?”
오지환이 타이밍 좋게 현준영 팀장용으로 뽑아 온 스크립트를 넘겨주고서 그를 밖으로 안내했다.
오지환에게 큰일을 시킨 것 같은 기분이지만, 이건 그가 먼저 나서서 맡겠다고 한 일이었다.
한 번도 현준영 팀장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하니, 차라리 안면 없는 PD가 낫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안내와 소개를 맡겼다.
“현 팀장이 정말 오긴 왔구만.”
근처에 있던 촬영팀장이, 현준영 팀장이 사라지자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 그러고 보니…… 팀장님도 현 팀장님이랑 트러블 있으셨죠.”
<당잠사> 시즌4를 찍던 시절, 현준영 팀장은 지원팀들과도 여러 트러블이 있었다. 우리 촬영팀장님도 그중 하나였다.
“나야 뭐, 별일은 아니었고. 하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괜찮겠어, 강 PD?”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뭐, 저분도 조용하다고 하시니, 또 경연 쪽은 전문이실 테니,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고?”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별일 없으면 되지.”
촬영팀장은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하고 내 등을 몇 번 두드려 주고 떠났다.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현준영 팀장에게 무대 세팅을 맡기고 나자 나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의외로 시킨 일을 조용히 해냈다. 가끔 우리가 준비해 둔 스크립트와 실제 무대가 맞지 않아서 어긋나는 경우에도, 나한테 일단 확인을 받고 진행했다.
여러 경연을 만들어 본 경험이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우리가 진행한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세팅이 완료되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진행된 경연 준비 끝에, 간단한 음향 리허설까지 진행하자 내일 무대를 위한 사전 작업은 대략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별일 없이 지나갔네.”
“다행이야.”
박주영 선배와 민희도 조금은 긴장을 푼 얼굴이었다.
“내일 리허설 시간에 다 맞춰 오겠다고 연락 왔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알았어. 내일 봅시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팀원들과 인사를 한 뒤 별관을 빠져나가기 전에 현준영 팀장이 다가왔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팀장님도, 첫날에 아직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야 뭐, 늘 했던 일이니까. 경연 준비를 오랜만에 하니 그리운 기분도 들고 그렇네요.”
그는 빙긋이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난 잠깐 그것을 내려다봤다가 악수를 했다.
“아침에 봅시다.”
“예.”
그는 그렇게 인사하고,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인사를 하고서 떠났다.
정말로, 우려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아무 일도 없이 첫날이 지나갔다.
마치 폭풍전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