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63화 (63/200)

63화 팀장의 할 일

그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 말을 잃어야 했다.

“……팀장님, 팀장님이 그렇게 나서지 않으셔도…….”

“아니, 내가 나서야지.”

“당시에 캐스팅을 캔슬한 장본인은 아니잖습니까.”

“장본인은 메인 PD겠지. 하지만 어쨌든 그 방송의 PD로 일했고, 그쪽 회사에 소식을 알렸던 것도 나야. 그때 봤던 익숙한 이름이 기획안에 실려 있으니 아온도 망설이는 거겠지. 그러니 이건 내가 나서는 게 맞아.”

그가 굳은 얼굴에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새 맨날 잔소리만 했지? 오랜만에 팀장다운 일 좀 하게 해 줘.”

“……팀장님.”

“어서.”

빨리 연락하라는 듯, 턱짓으로 내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그러려고 꺼내 둔 게 아니었는데.

손을 뻗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팀장이 부하의 방송을 위해 사과를 하겠다니. 그 광경을 보는 게 맞는 것일까.

이 일이 되레 아온의 트라우마를 파헤치는 일이 되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정민우 팀장의 눈빛은 어두울지언정 흐트러짐이 없었다.

팀장으로서 이 선택이 맞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팀장의 행동을 내가 거부해서는 안 되었다. 나도 결심하고 스마트폰을 집었다.

[85%]

그 순간, 확률이 바뀌었다. 이 선택이 맞다고 알려 주듯.

“전화하고 약속 잡겠습니다.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그쪽 일정에 맞춰야지. 회사로 직접 가겠다고 해.”

“예.”

전화하고 알려 달라고 하고, 정민우 팀장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회의실에서 남만덕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금방 전화를 받진 않았다. 신호가 오래 걸리고, 끊고 다시 걸어야 할까, 메시지를 남길까 하던 시점에서야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남만덕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묘하게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강대한입니다.”

“예.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출연 건이라면 아직 아온이랑…….”

“그 일도 있습니다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죄송하게도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이야기했다.

“무슨 용건이신가요?”

그의 대꾸에 조금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정민우…… PD님이라고 아십니까?”

“물론이죠. 기획안에서 이름을 봤습니다.”

“아온 님이 출연에 대해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팀장님 때문입니까?”

“…….”

어디까지나 정민우 팀장과 나의 예상일 뿐.

우리가 생각하는 이유가 맞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전파 너머의 정적이 조금 길어졌으나, 결국 대답은 돌아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정말이었구나. 알았다고 해서 딱히 안심이 된다거나 하진 않았다.

“보고 중에…… 정민우 팀장님께서 기억을 해내셨습니다. UBC에서 일하시던 시절에 있으셨던 일을요.”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남만덕 매니저도 알겠다는 듯 끄응 하고 깊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면 기획 자체는 저희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방송이 될 것 같고, 아온이도 흥미 있어 하고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그 팀장님의 이름을 보고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온 님에게 알리지 않으신 거군요.”

“예. 그건 제 판단이었습니다. 지난 번 미팅 때 강 PD님 돌아가신 이후로, 아온이한테 혼도 났습니다. 왜 자기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말하지 않은 이유를 꺼내니 본인도 납득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완벽히 거절하지 않은 이유가 있단 소리다.

거기에 걸어 보자.

“정민우 팀장님이 사과하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정 팀장님이요? 물론 아온이 입장에서야 그분도 원망하고 있지만, 실상 그때는 그분이 메인 PD도 아니셨을 텐데요.”

“하지만,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가능하다면 아온 님 본인을 만나 직접 사과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조는 조심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만덕 매니저의, 아온의 몫이니까.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전화라서 그런지 그 시간이 더 길었다.

다만, 결론만은 원하던 바였다.

“……알았습니다. 말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용건을 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젠 다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 * *

그날 저녁에, 아온 채널에 새 동영상이 등록되었다는 알림이 떠 찾아 들어갔다.

그녀의 채널은 보통 커버 영상이 주류고, 2주일에 한 번 정도 브이로그가 올라온다.

오늘의 새 동영상은 커버 영상.

유명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주제곡을 본인의 스타일대로 어레인지한 커버였다.

원곡은 배우가 직접 부른, 청아하면서도 힘 있는 보컬이 인기인데, 아온의 허스키한 록 보컬이 노래의 새로운 매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역시 잘 부르네.”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나는 출연진이다.

이런 목소리로 걸그룹을 하려고 했다니. 차라리 그냥 솔로로 데뷔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진즉에 했을 것 같은데.

“데뷔라…….”

방송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단체 콘서트 형식의 마지막 무대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정식 데뷔에 대한 지원도 넣으면 어떨까.

경연이니까 역시 우승자에 대한 특전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내일 가서 팀장님에게 말해 봐야겠다.

기록을 위해서 책상 구석에서 충전 중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는데, 끝난 줄 알았던 영상이 아직 뒤가 남아 있었다. 화면이 전환되면서 아온이 카메라에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온둥이 여러분! 아온입니다! 영상 끝난 줄 아셨죠? 오늘은 여러분께 알려 드릴 사항이 있어서요!”』

파하하, 하고 웃은 뒤 그녀가 책상 위에 덮어 두었던 종이를 들어 보여 주었다.

『“얼마 전부터 말씀드리긴 했는데, 이번 주말에! 일본 무대에 오르게 되었어요! 이거, 포스터 보이시죠? 이 쟁쟁한 라인업 사이에, 저 아온이 서게 되었습니다! 자, 박수!”』

화면 너머에서 박수를 유도하는 아온의 동작과 함께 기계적인 박수 소리가 깔렸다.

『“준비를 위해서 전 내일 바로 출국을 할 거예요. 이번에도 브이로그 마구마구 찍어 올 테니까, 다들 기대해 주세요!”』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녀가 손을 흔들고, 영상이 끝났다.

나는 시계를 보고 달력을 보고, 헉 하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내일 출국해서 주말……?”

그럼 아온을 만나는 건 아무리 빨라도 다음 주일 거다.

다음 주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소린데? 이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남만덕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 남 매니저님.”

“늦은 저녁에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일 때문인데, 혹시…… 내일 어떻습니까?”

“내일요?”

“일본에서 행사가 잡혀 있어 내일 저녁에 출국해야 합니다. 내일이 아니면 다음 주밖에 없는데, 그렇게 시간 끄는 건 서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담담한 어조라서 도리어 진정성이 느껴졌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될 부분일까?

하지만 내 입장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정민우 팀장에게 확인을 해 봐야 했다.

“제가 지금 바로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퇴근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은 다음 정민우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 <뮤직스케치> 일로 바쁜 그라서, 한 번에 받진 않았다.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일단 받을 때까지 계속 걸었다.

네 번 정도 걸었을 때야,

“……야, 지금 녹화 중이야. 뭔데?”

정민우 팀장이 짐짓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뮤직스케치> 선녹화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만큼 급했습니다.”

“뭐야, 아온 건이야?”

네, 하고 답한 뒤에 남만덕 매니저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출국이라고? 이렇게 급하게? 정말이야?”

“아온 채널에도 오늘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출국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미안한 건 이쪽인데 의심하면 안 되겠지. 알았어, 내일 점심에 약속 잡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쩌겠어.”

바쁜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은 정민우 팀장도 마찬가지. 나는 괜히 죄송스러워졌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 때문에…….”

“너 때문은 무슨.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휑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남만덕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 약속을 잡았다.

“내일 뵙겠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점심 지난 시간에 약속을 잡은 후에 메시지로 정민우 팀장에게 보고했다.

[85%]

간신히 확률을 좀 더 올릴 수 있었다.

* * *

긴장한 정민우 팀장은 의외로 얼굴에서 티가 났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나도 절로 긴장이 되었다.

남만덕 매니저와는 먼저 인사를 했고, 그는 현재 아온을 데리러 잠시 나갔다.

그사이 정민우 팀장은 벌써 물 한 잔을 다 마신 상태였다.

농담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있던 시점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기다리게 해 드렸습니다.”

남만덕 매니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로, 며칠 사이에 노란색에서 애시블론드의 머리색이 된 아온이 따라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강 PD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제 영상도 잘 봤습니다. 좋은 노래더라고요.”

“어머머, 정말로 제 채널 구독자신가 보네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굿즈라도 챙겨 드릴까요?”

깔깔 웃으면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역시나 쾌활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정민우 팀장 쪽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남만덕 매니저가 그 옆자리에 앉은 후, 나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지 않도록 아온을 보았다.

“아온 님, 이쪽은…… 예능5팀장이신 정민우 팀장입니다. 팀장님, 이쪽이…….”

“반갑습니다, 아온…… 씨.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네. 뭐.”

확실히, 나와 대화할 때와 비교되게 아온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정말로 알기 쉬운 성격이다. 이렇게 다 드러나니 그건 또 그것대로 입맛이 썼다.

다만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일단 이야기를 텄으니, 나는 뒤로 물러나야 맞았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방적으로 사과를 드리겠다고는 했어도, 사실 받아 주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뭐…… 저도 잘한 건 없어서요.”

“아온 씨가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정민우 팀장이 손을 모아 쥐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때의 자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어차피 변명이자 핑계일 테고. 그저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는 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정민우 팀장 스스로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지만, 다시 들어도 그때 일에서 그가 실수한 부분은 사실상 없었다.

힘 있는 메인 PD의 의견으로 기획이 진행되었고, 그중 중소 규모 아이돌 그룹의 데뷔 과정을 좇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데뷔 리얼리티라고 해도 그 콘셉트는 천태만상인 법.

방송 측에서 여러 기획사를 콘택트하고, 기획을 짜고, 그러는 사이에 몇 개의 기획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그 팀에 막바지에 합류한 정민우 팀장은 수없이 기획을 갈아엎은 끝에 이제 최종 기획이 거의 완성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제작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알고 있었지만, 결국 그가 합류한 직후 기획은커녕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프로젝트 종료. 1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연거푸 기획을 갈아엎으면서도 꼭 제작될 거라는 식으로 기획사와 데뷔 전 연습생들을 옭아맸던 방송사로서는 그 사실을 통보하기가 난처했고, 그 역할을 결국 팀의 막내였던 정민우 팀장에게 맡겼다.

그는 그 일을 수행했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조직 문화에서 그는 또 다른 희생양일 뿐이었지만, 그 죄책감을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 죄책감을 그득하게 담은 얼굴로, 그렇지만 결코 피하지 않고 그는 아온을 보았다.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일이 아온 씨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만큼 깊은 상처일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지만, 그때의 제작진을 대신하여 이렇게 깊게 사과를 드립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깊게 숙여, 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이렇게까지 하실 건 없습니다, 팀장님.”

남만덕 매니저가 당황하여 일어났다. 그래도 정민우 팀장은 더 시간을 들여 인사한 뒤 고개를 들었다.

“이걸로 마음이 풀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드리자면…… 그때의 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여전히 진지한 눈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있는 강 PD, 이야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NBS 내에서도 기대가 큰 친구입니다. 이번 경연 기획도 분명 잘될 거고요. 아온 씨께서 그 방송에 힘을 빌려 주신다면, 과거의 잘못과 더불어, 저도 열심히 도와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절로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참으면서 정민우 팀장을 보았다.

서인하 국장과 죽이 맞아 나를 놀리기도 하지만, 팀장은 팀장이었다.

직속 팀이 된 이후로 그의 존재를 더욱 크게 느낀다.

지금도 이렇게, 내 방송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음이 몸소 느껴지는 거다.

그것이 감동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도 아온을, 그리고 남만덕 매니저를 보았다.

“저도 이렇게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과거에 겪으셨던 일을 반복하시진 않을 겁니다. 약속 드리겠습니다. 당장 오늘 화가 풀리지 않으셔도, 함께 방송을 만들 기회에 대해 여지나마 남겨 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정민우 팀장이 그랬듯 나도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했다.

모든 일을 알게 된 만큼,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진심이었다.

내 방송도 방송이지만, 아온이 과거를 잊고 방송 업계 전체를 다시 볼 수 있을 만큼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능력 있는 가수가, TV 방송이라는 분야를 완전히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쓰러움이기도 하고, 절실함이기도 했다.

“…….”

아온은 테이블 위의 모은 손을, 조용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의 인사가 통했는지, 안 통했는지, 흐르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확률이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