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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공할 확률 100%-54화 (54/200)

54화 선배보다 먼저

박주영 선배는 매우 피로한 얼굴이었다.

저녁 시간에 식사 겸 반주나 하자고 만났는데,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 죽을 것 같다.”

그가 소속해 있는 퀴즈 예능은 민희가 전해 준 대로 폐지가 확정되었다.

심야 시간에 사실 1%대라면 나쁘지 않은데, 아마 자체 콘텐츠가 떨어진 것도 문제 같다는 사내 평가가 있었다.

박주영 선배의 저 피로한 표정은 아마 그 영향도 있으리라.

“쉬긴 쉬시나요.”

“쉬기야 하지만, 뭐,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기분이긴 하지.”

이미 합류할 때부터 시청률이 내리막길이었던 프로그램이다 보니, 선배가 합류했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애착은 있었던 모양이다.

서브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님에도 본방부터 클립까지, 편집이란 편집은 죄 도맡았다고 하니 더욱 그럴 만도 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박주영 선배가 먼저 주문을 하고 소주도 시켰다.

“민희도 온대?”

“예. 회의가 길어져서 좀 늦는다고…… 아, 오네요.”

때마침 가게 밖에 도착한 민희가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눈이마주치자, 그녀가 냉큼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박 PD님, 오랜만이에요.”

“이 작가도 오랜만이야. 둘은 딱히 오랜만이 아닌가 보네?”

“어제도 봤거든요.”

“뭐야, 나만 빼고 둘이 놀아? 섭하게?”

그가 또 장난스레 웃으면서 ‘사귀……’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아니거든요’ 하고 잘랐다.

“여전히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안 그래, 이 작가?”

“박 PD님이 그 농담을 너무 오래 끄는 거예요.”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자니 어째 애상이 감도는 기분이었다. 셋이서 편집실에 박혀서 밤을 새웠던 기억들도 떠오르고.

굳이 따지면 그렇게 오래된 기억도 아닌데, 왜 이리 그리운 기분이 드는 걸까.

잠깐 멍해진 사이 내 앞에 빈 소주잔이 와 있었다. 받아들자 박주영 선배가 잔을 채워 주었다.

“그래서, 뭔데?”

여긴 민희와도 만났던 순댓국집.

순댓국집이라 하면 패스트푸드나 다름없다 보니, 주문하고 얼마 안 있어도 요리가 나온다.

나와 선배는 술국에 모듬순대를 주문했고, 나는 음식이 차려지면 설설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푹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일단 묵묵히 선배 손에서 술병을 받아 들고 그의 잔과 민희의 잔을 채웠다.

“이 바쁜 시기에 이 작가까지 같이 보자 한 걸 보니, 뭔가 할 말 있는 거지. 둘이서?”

딱히 감이 좋다거나 하지 않아도 누구나 눈치챌 일이었다.

“일단 한 잔 하시죠.”

잔을 부딪치는 사이에, 술국이 나왔다.

다시 빈 잔을 채워 주면서 이야기했다.

“지금 하는 프로, 언제까지 하세요?”

“개편 전까지는 하겠지.”

“그다음 계획은 있으십니까?”

“난 3팀이니까, 아마 3팀장님이 잡아 주지 않겠냐?”

3팀장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뭐…… 다른 팀에서 사람 빼 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일단 이야기는 하고 보자.

“저도 많은 고민을 하고 이야기하는 거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거.”

“뭔데 이리 무게를 잡냐.”

술국을 휘젓는 그의 손길을 보면서 말했다.

“제 프로그램, 같이 해 주세요.”

“…….”

테이블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이 늘 붐비는 순댓국집이라 가게는 시끄러웠지만, 이 테이블만은 그 소란도 침범하지 못했다.

“…….”

“…….”

일단 내뱉고 나니 새삼 가슴이 떨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옆자리 민희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그녀가 나와 박주영 선배를 번갈아 보는 게 옆눈으로 보였다. 그래도 선배에게서 눈을 돌리진 않았다.

“결코 쉽게 말씀드리는 건…….”

“내가 불쌍하냐.”

“예?”

그가 순댓국을 뒤섞던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숨이 절로 멈추었다.

“너보다 선배인 주제에 입봉도 느린데, 이번에 마침 팀도 해체되고 또 난민 생활도 하겠다, 그래서 불쌍해 보였냐고.”

“박 PD님, 대한이 말은 그게 아니라는 건…….”

“이 작가가 왜 여기 있는 줄 이제야 알겠네. 이미 이 작가는 같이 하기로 한 것 같은데, 그건 알겠으니 잠시만 우리끼리 이야기할게.”

민희의 말허리를 잘라 입을 다물게 한 뒤. 박주영 선배가 다시 나를 보았다.

“대답해 봐. 내가 불쌍하냐고.”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나보다 먼저 입봉한다고 했을 땐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건 위에서 준 기회이고, 그걸 이코저코 따지면서 못 잡아 봐야 등신이니까. 그날 술 좀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난 네가 입봉한다고 해서 기뻤거든. 근데, 나더러 네 밑에서 일하라는 건 좀 미친 거 같지 않냐?”

박주영 선배의 말투는 매우 날카로웠다.

이 정도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를 내시는 거야 당연하시겠지만, 오해세요. 전…… 다시 선배와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확률에 상관하지 않고 선배를 서브로 생각했던 건, 솔직히 그 마음 때문이었다.

“<당잠사> 시즌2 때, 셋이서 티저 만든다고 밤을 새웠을 때, 그리고 그 뒤로도 함께 편집하고 기획하고 했던 때가 저한테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어요.”

선배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서슬 퍼런 눈은 처음 보는 거라서, 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나도 물러설 순 없었다.

이대로 오해를 만들고, 멀어지고, 그런 건 싫었다.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정말, 정말 우리 셋이서 같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을 뿐이에요.”

옆에서 민희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기 앞 빈 잔만 매만지면서.

“말 다 했냐.”

“예. 다 했습니다.”

“내가 거절하면?”

“다른 사람…… 찾아야죠.”

“후보군은?”

“없습니다.”

“그래 놓고 찾아야 한다고?”

피식 웃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선배와 함께하고 싶은 것만 알아주세요.”

“프러포즈하냐. 남자 놈이 그렇게 말해 봤자 사절이야.”

“일종의 프러포즈죠.”

“효명이나 류 배우하고 놀더니 애가 이상해졌어. 이 작가도 그렇게 생각 안 해?”

“그, 그렇죠.”

그렇긴 또 뭐가 그래. 그가 말을 걸어 주자 민희도 냉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를 흘겨봐 주고서 다시 물었다.

“그럼 선배, 제 제안을…….”

“아직 아냐. 나도 생각할 시간은 있어야지.”

“아, 예. 그렇죠.”

하긴. 결정을 종용할 입장이 아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진 마. 지금 기분 같아선 오기가 나서라도 하기 싫으니까.”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고 대답하자, 그가 퀭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어느새 빈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라 들었다.

“저도 주세요.”

잠깐 또 나를 노려보던 선배가 내 잔을 채워 준다. 민희도 냉큼 잔을 내밀었다.

짤랑-

세 잔이 부딪치고 박주영 선배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딴 얘기나 하자.”

“……예.”

밤늦게 헤어질 때까지, 우린 다시 이전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박주영 선배의 눈빛이 여전히 가라앉아 있음을 어찌 우리가 모를까.

그저 애써 못 본 척을 할 뿐이었다.

* * *

[이민희작가: 도와주러 간 건데 딱히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미안해.]

민희가 보내온 메시지에 한 번 더 그날을 곱씹었다.

[어차피 내가 했어야 할 일이야. 괜찮아.]

[이민희작가: 쨌든 셋이 다시 뭉치면 좋겠다.]

[이민희작가: (기도)]

그녀의 이모티콘처럼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ㅇㅇ’이라고 보냈다.

“야, 뭐해. 이거 좀 날라.”

돌연 들려온 목소리는, <뮤직스케치> 팀의 선배 PD.

지금 나는 <뮤직스케치> 팀에 지원을 나와 있었다.

이번 가을 개편 때 <뮤직스케치>도 구성이 개편된다. 라이브 무대라는 건 같지만 코너가 신설되고, 무대를 사전 녹화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녹화하는 스튜디오도 바뀌고 해서, 현재 팀 자체로 일이 많았다.

나는 향후 정민우 PD의 팀이 될 것이기에 최근에는 <뮤직스케치> 일을 자주 돕고 있었다.

기획회의에만 참여하던 때와 비교하면 이쪽이 훨씬 도움이 되고 경험도 되었다.

경연 프로그램을 실제로 만들면 이런 무대를 몇 번이나 꾸며야 하니, 나중을 위해서도 적격이었다.

선배 PD의 지시에 따라 기재를 옮기고, 심부름을 다녀오는 사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내일 녹화 준비는 다 됐고…… 출연진은 이상 없지? 오케이, 다들 고생했다.”

무대 앞에서 정민우 PD가 해산을 명하자 팀원들이 드디어 퇴근할 수 있다면 환성을 질렀다.

어느새 시간은 밤 11시. 기뻐할 만도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도 다른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객석에 던져 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다 민희의 메시지 이후로 폰을 확인하지 못한 것을 알고, 메시지 앱을 열었다.

……답장은 없구나.

박주영 선배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진심을 다하면 통하지 않을까 했지만…… 확실히 내가 선배 입장이었어도 내가 싸가지 없게 보였지 않을까 싶다.

민희 말대로 난 좀 건방진 걸까.

“휴우…….”

“뭘 그리 한숨이 깊어.”

가방을 챙겨드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정민우 PD였다.

“뭐 고민 있어? 기획이 잘 안 풀려?”

“어떤 의미론…… 맞습니다.”

“어떤 의미는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인데?”

“제작진으로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오케이를 해 주지 않아서요.”

“누군데?”

“박주영 PD입니다.”

“아아…… <당잠사> 때 같이 있었지? 권 PD 밑에.”

정민우 PD는 선배가 이번 부서 개편 때 예능3팀에 속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뭐, 아직 개편 전이니 우리 팀으로 데리고 오는 게 아예 안 될 것 같진 않은데.”

“예…… 하지만 설득이 안 되더라고요.”

“하긴. 저 밑에 있던 후배 따까리 노릇하고 싶은 선배가 어디 있겠어? 가뜩이나 자기 팀은 공중분해된 마당에, 존심 상하지.”

내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정민우 PD는 어떤 내막이 있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기야, 프로그램이 끝난 건 나한테나 좋은 일이지, 선배한테는 전혀 좋은 일일 수가 없다.

“열심히 말해 봤지만, 아무래도 틀린 것 같습니다.”

“다른 후보군은?”

“이제부터 찾아보려고요.”

“너무 외통수인데. 출연진 그렇게 짜는 거 아냐.”

정민우 PD의 표정이 짐짓 엄해졌다.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게 항상 대책은 마련되어 있어야지. 출연진도 마찬가지고. 메인이 된다는 건 그런 거야.”

“네……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선배랑 꼭 하고 싶었거든요.”

“흠. 프로그램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편집에 관해서는 사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손발을 많이 맞춰 봐서 호흡도 잘 맞을 것 같습니다.”

말하다 보니 절로 비관적이 될 것 같았다.

정민우 PD가 다시 뭐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문제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PD 찾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능한 한 저희 팀 내에서요.”

“뭐…… 그래.”

정민우 PD는 뭔가 달리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퇴근했다.

아마 힘내라는 충고이지 않을까 싶어서 나도 따라가 묻지는 않았다.

그 뒤로 다시 며칠.

나는 민희와 사이사이 이야기하며 기획을 다듬으며, 제작진에 대한 고민도 함께 공유했다.

확실히 5팀으로 한정을 지으면 더더욱 찾기가 어려웠다. 서브로 삼아야 하니 너무 선배는 어렵고. 동기 중에서도 실력이 있는 PD를 몇 명 접촉해 봤다.

개편 때 폐지가 확정된 팀 소속들하고도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알잖아, 거기 못 들어가는 거.”

“야, 강대한. 너 지금 뭔 상황인지 몰라? 너야 서 부장 라인이라 백도 제대로 있다지만, 내가 거기서 뭘 하냐……?”

사정이 있다고 거절을 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말도 안 되는 연차에 입봉을 하는 내 문제도 있어서,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쁜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하기야, 이해가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도 AGD 앱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들처럼 선배 눈치를 보고 있었을 테니까.

[이민희작가: 나 이번 주면 일 마무리되니까, 더 열심히 도울 수 있어.]

[그래. 고마워. 개편 직전인데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이민희작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 프로그램이기도 하니까. 같이 고생하자구.]

새삼 민희가 여장부 스타일이라는 것이 고마웠다.

유수현 작가나 임윤주 작가가 왜 그녀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한 주가 마무리되는 사이.

가을 개편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2주만 지나면 내 입사도 3년차를 찍는다. 그리고 개편이 시작된다.

2주 사이에 제작진을 찾고, 출연진까지 갖춘 기획안을 만들 수 있을까.

퇴근 직전에, 이번 주 마지막으로 확률을 봐 보고자 했다.

[82%]

“……어?”

그런데, 확률이 상승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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