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재미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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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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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5P/343P]
[2,000P]가 빠지면서 바닥을 친 포인트가, 지금 내 심정 같았다.
두어 시간의 고생이 물거품이 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할 타이밍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들한테 내보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일단 초안을 좀 더 다듬어 놓고, 경연 쪽 아이디어도 몇 개 정리해 놓았다.
그러고 나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금요일 퇴근하고 나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 *
새로운 주가 시작되고, 다시 바쁜 날이 시작되었다.
정민우 PD에게 불려 가고, 서인하 부장에게 불려 가고.
그러는 사이 방송사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부서 개편에 대한 정식 공지가 내려오면서 개편 일자도 확정되었다.
그러면서 가을 프로그램 개편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나왔는데,
“……박 PD님, 다시 난민 되시겠네.”
점심시간에 회사 앞 순댓국밥집에서 만난 민희가 그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 퀴즈 프로도 정리한대?”
“윤주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고. 그 프로 작가한테 들었다는데, 시청률도 잘 안 나오고 화제성도 전 같지 않아서 개편 때 끝낸다는 이야기가 있나 봐.”
박주영 선배가 제작진으로 있는 퀴즈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1%대로 알고 있다.
케이블이니 나쁘다고 하긴 그렇지만, 낮은 축이긴 했다.
대대적인 개편에 맞추어서 낮은 시청률의 프로그램들이 대폭 정리된다고는 들었다.
그동안 참여한 기획회의 중에는, 개편 때 배치될 파일럿 프로그램도 다수 있었다.
많은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또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시기.
우리 방송사 안팎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야 하는 시기에, 박주영 선배가 그 영향을 크게 받을 듯했다.
“민희 너는? 네 프로그램은 괜찮아?”
“우리야 뭐, 윤주 작가님이 있으니까. 시청률도 괜찮고.”
“다행이네.”
“그래도…… 아마 팀원은 좀 갈릴 것도 같은데.”
부서 개편이 되고 예능국 체제가 되면서, 그 아래의 예능 PD들이 각 팀에 소속되었다.
어떤 프로그램이든 한 팀 내에서 돌리는 것이 관리는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의 제작진 교체도 일어날 예정이었다.
PD도 그렇고, 작가도 마찬가지.
“바뀔 것 같아?”
“윤주 작가님이 챙겨 주신다고는 했는데,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순댓국을 뒤섞는 행동이 어째 좀 애매해 보였다. 불안해하는 건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민희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러는 너는? 입봉 준비는 잘 돼?”
“음.”
난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내가 누굴 걱정할 때는 아니지.
서인하 부장이 오더한 경연 프로그램의 확률이 ‘62%’가 나온 이후로, 경연 프로그램 초안에 몇 개의 아이디어를 더했다.
현재 확률은 ‘64%’. 확률이 오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성공 가능성이 높긴 한 모양이었다.
다만, 아직 내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민희에게 돌려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가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남이 시키는 프로그램은 만들기 싫다는 거지?”
“……야, 너무 훅 들어오는데?”
표정도 숨기지 못하겠다.
“싫다기보다…… 그게 맞는 건가 하는 거지.”
“그게 그 말이지. 따로 만들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연속으로 뼈 때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난 불만스러운 얼굴로 순댓국밥만 퍼먹었다.
민희는 잠시 킥킥댄 뒤 말했다.
“입봉작이니 기합이 들어가고 심각한 건 알겠는데……. 뭐, 나도 입봉은 못해 본 몸이라 뭐라 하긴 그렇지만, 그냥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말해 봐.”
“도와달라고 해 보라고?”
“서 부장님이나, 정 PD님 말야. 잘 푸시해 주신다고 했다면서?”
그런가.
잠깐 멍해졌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네가 잘난 건 알겠어. 혼자 둬도 뭐라도 만들겠지. 하지만 아직 3년차도 안 된 PD 주제에, 너무 까부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아니…… 잘난 건 아닌데.”
“그럼 건방진 거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민희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론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긴, 맘 편히 기댈 곳이 있는데 이럴 때 뻔뻔하게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야, 고맙다. 이건 내가 살게.”
“어, 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희가 뭔가 말하려던 것 같았지만, 급히 계산을 하고 나가느라 듣지 못했다.
“면담 요청 좀 드려도 될까요.”
정민우 PD는 <뮤직스케치>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부산하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다가, 내가 그의 앞으로 가 면담 요청을 하자 시계를 보았다.
“10분 뒤에 회의실에서 보자. 괜찮아?”
“예.”
나는 대답하고서 곧장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챙겨 회의실로 갔다.
정리했던 초안을 노트북 화면에 띄운 채 있자니, 그가 왔다.
이윽고 정민우 PD는 내가 내민 노트북을 살펴본 뒤,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안 봐도 비디오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느냐, 회사에서 시키는 걸 하느냐, 그게 고민인 거지?”
“……예.”
“너는 이 셋 중에서 뭘 하고 싶은데? 최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걸 말해 봐. 다른 이유 다 필요 없고, 그냥 네 마음이 동하는 거.”
그건 정해져 있었다. 나는 숨도 안 쉬고 답했다.
“BJ 콘서트 기획입니다.”
“버스킹은 왜 안 해?”
“제가 다룰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닐 것 같아서요. 물론 좀 더 큰 다음에 제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그럼 경연 프로그램은 왜 안 하고 싶은데?”
“이미 많은 경연 프로그램이 나와서…… 시청자들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을지, 그게 제일 확신이 안 듭니다.”
“그런 것치고는 네가 잡아 놓은 초안에 있는 소재들은 꽤 괜찮은 것 같은데.”
“많이 다듬어야 하니까요.”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더니 정민우 PD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무척이나 감사했다.
자기 바쁜 시간을 내서 입봉 기획을 같이 고민해 주고 있는 거니까.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정민우 PD가 이야기했다.
“어차피 결정하는 건 너야. 부장님도 네 의견을 존중해 주시겠지. 그걸 전제로,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
그러더니 잠시 뜸을 들이고 덧붙였다.
“섞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네?”
“중도를 지키는 건 언제든 중요한 법이거든. 지금 네 입장에선 더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것도 존중하겠지만,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한 시기야.”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사측. 가려운 곳을 적시에 긁어 줄 줄 아는, 회사가 원하는 인재가 될 수 있는 시기라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걸 포기하면, 이 방송 업계에서 오래 일 못해. 시키는 걸 하더라도, 자기 고집도 어느 정도 챙겨야 오히려 오래 일할 수 있는 거야.”
정민우 PD의 연차는 이미 10년. 그런 사람의 조언인 거다.
무게감이야 서인하 부장의 조언 쪽이 더 무겁긴 했지만, 뭐랄까. 와 닿는 느낌이 또 달랐다.
“그리고 추가로, 부장님이 굳이 경연 프로그램 기획을 너한테 줬다는 건, 네가 이 기획을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하신 거야. 그러니 기회를 발로 찰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
그건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다른 PD들에게도 같은 기획을 보여주었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까?
“아, 그렇다고 너만 보여 준 건 아니긴 하지.”
그는 깔끔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 줬다.
“하지만 그 PD 중에 누구를 가장 기대하고 있을지는,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일어났다.
“지금은 고민해도 될 때지. 고민해 봐. 너무 늦지만 말고.”
“예. 감사합니다.”
나는 회의실을 나서는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섞어라.
정민우 PD의 조언은 마치 한의원에서 맞는 침 같은 데가 있었다.
한 번에 쿡 찔러서, 머릿속 고통을 완전히 없애 준 거다.
사무실로 올라와서 할 일을 해치우고, 전의 카페에 다시 자리를 잡고 나자 새로운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야 할 것은 경연 프로그램.
하고 싶은 것은 BJ 콘서트.
“이 둘을…… 섞는다면…….”
네이버TV나 미투버 등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았다.
그동안 구독해 둔 채널들도 제법 되다 보니, 다시 진지하게 훑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다 보니 배가 고파서 또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먹어 가면서 동영상을 훑고, 채널 정보를 엑셀에 정리했다.
한 시간 넘게 그 작업을 하고 나자,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점차 하나의 형태로 정립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BJ들끼리 모아서…… 경연을 시키면……?”
커버하는 BJ들은 각각 구독자수가 천차만별이지만, 인기 있는 10명 정도만 추리더라도 그 팬 수가 꽤 된다.
경연 프로그램을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PPT 파일을 열었다.
서인하 부장이 넘겨준 경연 프로그램 초안을 기반으로 PPT를 새로 짰다.
그리고 거기에…… 커버계 BJ들의 요소를 집어넣었다.
[‘성공적인 예능 프로그램 입봉을 위한 초안 선택’의 확률이 변화합니다.]
PPT 위로 옮겨간 확률이 변동을 일으켰다.
[69%]
‘70%’는 못 미쳤지만, 어쨌든 상승한 거다.
이 방향이 맞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좀 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24시간 하는 카페라서 다행이었다. 노트북 작은 화면에 눈이 빠져라 집중하면서,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몰입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뜨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 하고…….”
결국 뻑뻑한 눈을 견딜 수 없어 적당히 마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73%]
고통도 못 느낄 만큼 눈부신 성과였다. 70%대로 진입한 확률이 보였다.
기획 초안으로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사우나에서 몸을 씻고, 정민우 PD가 출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사무실로 방문했다.
“안 잤냐?”
대뜸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씻고 온 게 무색할 만큼 퀭해 보이나 보다.
‘그렇습니다’ 하고 대꾸하면서 출력한 기획안을 내밀었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초안을 벌써 만들었어……?”
“고칠 부분은 있을 것 같지만, 일단 제가 정리할 수 있을 데까지만 했습니다. 충고해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이것 참…… 그래, 일단 가서 커피 한 잔만 타 와.”
나는 탕비실로 뛰어 들어갔다. 탕비실에 있던 안면 있는 PD들과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한 잔 내려서 가지고 왔다.
돌아왔을 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기획안을 보고 있었다.
잔을 그 앞에 내려놓자, 보지도 않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재차 기획안 페이지를 넘겼다.
잠시 뒤.
그가 기획안을 덮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님 나오셨을 거야. 가자.”
“어, 예. 알겠습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가 먼저 걸어 나갔다. 난 급히 뒤를 따랐다.
그의 말대로 서인하 부장은 부장실에 있었다. 아침부터 그의 방에는 PD들이 방문해 있어서, 빌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들어와.”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고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인하 부장이 놀라워했다.
“뭐야, 아침부터 왜 둘이 같이 와. 설마 벌써 나왔어? 어제 조언 구했다며?”
어제 내가 정민우 PD에게 조언을 구한 것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강 PD가 밤을 새워서 가지고 왔습니다. 보시죠.”
내 기획안은 그렇게 서인하 부장에게로 넘어갔다.
서인하 부장이 소파로 와서, 기획안을 받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괜찮은 건지 아닌지, AGD 앱과 달리 그들의 표정으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평소에는 웃기지도 않은 아재 개그를 던지지만, 일을 할 땐 이렇게 한없이 진지한 상사들이었다.
괜한 갈증을 느끼면서 기다리다가, 문득 서인하 부장의 입매를 발견했다.
입꼬리가, 한쪽이 아니라 양쪽이 올라가 있다.
탁.
그가 소리 나게 기획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재미있겠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