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입봉
이야기를 끝낸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매우 불편한 정적.
민희가 나와 박주영 선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다시 입을 열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박주영 선배가 의자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박주영 선배가 심각한 얼굴로 가게를 나갔다. 난 차마 그 뒤를 쫓아 나갈 순 없었다.
박주영 선배의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박 PD님 많이 맘 상하신 것 같은데.”
“민희 너라도 좀 나가 봐.”
“나는 작가잖아. PD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PD와 작가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이지만, 생태 면으로 들어가면 또 그만큼 다르다.
PD의 삶은 PD밖에 이해할 수 없고, 작가의 삶은 또 작가밖에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반쯤 남아 있던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일어났다.
“나도 좀 나갔다 올게.”
“괜찮겠어? 도리어 안 좋지 않을까?”
“그래도. 좋든 안 좋든, 혼자 있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가게 밖으로 나가자, 건너편 전봇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박주영 선배가 보였다.
담배를 손에 들고, 하얀 연기를 입에서 뿜어내고 있다.
절로 긴장되는 걸음을 억지로 밟아서 앞으로 갔다. 어딜 보는지 모르겠던 박주영 선배의 시선이 힐끔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갈 거야.”
“선배 혼자 담배 피우면 쓸쓸할 것 같아서요.”
“혼자 기다리는 이 작가는 안 쓸쓸하냐, 그럼.”
핀잔주듯 말해도 다행히 날카로워 보이진 않았다.
나도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한 대 줘?”
“피워 본 적 없습니다.”
“알아. 그냥 물어봤어.”
그가 다시 하얀 연기를 푸욱 뿜어냈다.
나오긴 했지만,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자기보다 2년은 느린 후배 PD가, 자기보다 먼저 입봉하게 되었다. 방송사 내외로 유명해진 것은 그렇다 쳐도, 입봉은 모든 PD가 꿈꾸는 첫걸음 아닌가.
그 입봉마저 후배한테 선수를 당한 느낌일 것이다.
그 심정이 어떨지, 나로서는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
하얀 연기가 끊겼다. 뭐라도 말해야 하려나. 생각한 시점에, 박주영 선배는 다시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다시 후우 하고 뿜어내는 연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네가 왜 죄송하냐.”
그가 나를 흘겨보고는, 다시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도…… 제가 죄송합니다.”
“그래, 그렇게 죄송해한다는 건, 입봉하겠다는 말이겠지.”
“기회니까요.”
나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한 달 넘게 남의 회의에만 참여하고, 지원 나가서 며칠 일하고, 그런 반복이었습니다. <당잠사> 때도 <드림 어게인> 때도 소속감이 있고 보람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맨날 허했습니다.”
“나도 알지, 그 기분.”
“그 허전함이 뭐였는지 부장님의 제안을 듣고 알았습니다. 남의 방송이 아니라 제 방송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얼마나 고생을 하든, 제가 주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제 방송요.”
그래서, 박주영 선배나 다른 선배 PD들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기 전에, 흥분감부터 느꼈다.
내 방송을 만들 수 있다. 내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다. 그런 흥분감.
미안함과 죄송함은 그 이후에 떠올랐다. 내가 느낀 흥분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그리고 그들을 제치고 나에게 먼저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미안한 일인지 알았다.
“그렇지만…… 죄송하지만, 죄송함보다는 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이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솔직하네, 이 녀석.”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박주영 선배가 다시 이야기했다.
“그럼 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좀 열 받긴 했다. 오해하지 마. 너한테 열 받은 게 아니라, 서인하 부장한테 열 받은 거야.”
그가 든 담배에서, 잿가루가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입봉을 원하는 PD는 많지. 내 동기 중에도 아직 입봉 못한 애들도 많고. 그런 애들을 다 뛰어넘고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건, 아무리 실력주의인 이 업계라고 해도 연차를 너무 무시한 처사잖아.”
“예…….”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어.”
“예?”
“그 모든 연차를 뛰어넘고, 젊은 PD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너니까.”
박주영 선배가 나를 보았다. 술기운이 도는 나른한 눈빛이 아니라, 매우 진지하고 정직한 눈이었다.
“범람아. 이렇게 부르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주제가 넘쳐흘러서 범람이잖아. 근데 그 주제가 딱히 어색하지 않아도 될 요물이 되었어, 넌. 누가 뭐라 해도 그건 네 실력이고, 네가 가진 힘이야.”
“감사합니다.”
“연차고 나발이고, 그 실력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다. 그건 내가, 아니, 아마 너를 겪은 사람들은 다 인정할 거야. 서인하 부장도 그러니 누구보다 너한테 제안했을 거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입안 가득 연기를 머금고 내뱉더니,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그가 일어서서, 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눈앞에 온 기회는 잡아야지. 놓치면 그게 등신이고.”
“선배…….”
“내 감정은 내가 알아서 추스를 테니, 너는 네 눈앞만 생각해. 그럼 됐다.”
그가 이야기 끝났다는 투로, 주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등을 보고,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고맙습니다, 선배.”
“고맙긴 개뿔.”
그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민희 옆에 다시 앉았다.
난 크게 숨을 내쉰 다음,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 * *
부서 개편에 관한 정식 공지가 게시판에 붙었다.
각 층 게시판에, 아침 출근을 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수군대고 있었다.
출근길에 나도 그 정경에 합류했다가, 낯익은 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어, 선배. 안녕하세요.”
“응? 아, 강요물 PD님이시구나. 오랜만이다.”
권민헌 PD였다.
오다가다 얼굴은 몇 번 부딪쳤지만, 지난 한 달 정도는 정말 만나지도 못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해도 얼굴 보기 힘들 때는 죽어라 못 보는 곳이 방송계다.
“잘 지내? 요즘 엄청 바쁜 것 같던데. 우리 프로그램에도 올 거냐?”
그 말에 그냥 웃고 말았다. 권민헌 PD도 딱히 답을 바란 건 아닌 듯 게시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게시판을 살폈다. 예능국, 드라마국 등이 신설되고, 서인하 부장이 예능국장으로 정식 발령되었다. 드라마국장이나 교양국장도 다 아는 이름들이었지만, 내게 중요한 건 예능국 내의 인사였다.
팀장 인사 발령 이름을 살폈다. 익숙한 이름들이 보이는데…….
『예능1팀장 현준영
.
.
예능5팀장 정민우
.
.』
1팀장에서부터 보이는 이름에 조금 숨을 참았다. 얼굴이 굳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했다.
“현준영 PD가 결국 1팀장이 됐네요.”
“그럴 연차니까. 스카우트해 왔을 때부터 아마 예정되어 있었을 거야.”
나 같은 말단이야 부서 개편에 대한 이야기를 몇 달 전에야 겨우 들었지만, 이사진에서는 이미 꽤 오래 계획해 온 일일 수도 있다.
현준영 PD를 스카우트해 온 조건 중에 팀장 직위를 준다는 조건이 있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했다.
“정 PD님도 팀장 되셨고.”
낮게 말하는 권민헌 PD의 어조가 조금 평소와는 달랐다.
그 이유를, 서로 힘내라고 인사를 하고 올라와서, 팀 사무실에 붙은 제작부 내 상세 발령 게시물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예능1팀장 현준영
예능1팀 권민헌
.
.』
현준영 이름 바로 아래 적혀 있는 권민헌 PD.
위치로 보면…… 팀장 대리의 위치였다. <당잠사> 시즌3 때 메인과 서브 위치에서도 고생했었는데, 이젠 팀장과 그 대리가 되었다.
그래서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던 거구나.
게시판을 보면서, 그저 무운을 빌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확인했어?”
게시판을 살피고 있는데, 정민우 PD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팀장 승진, 축하드립니다.”
“정식으로 나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하는데 뭘, 별말씀을. 이게 다 강 PD 덕분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서인하 부장과 그가 예고해 준 대로, 나는 정민우 PD의 5팀에 속했다.
나 같은 경우야 예고를 받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권민헌 PD는 아니리라.
괜히 착잡해지려는 찰나에,
“부장님 호출이니 같이 가자.”
정민우 PD가 그렇게 이야기해, 감정이 깊어지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부장실로 들어갔다.
막 출근한 참인 듯한 서인하 부장이 손짓으로 소파에 우리를 앉히고, 자신도 재킷을 벗어 두고 앉았다.
“어떻게, 결정은 내렸어?”
서인하 부장이 준 기한이 오늘까지였다. 정민우 PD도 함께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은 정해져 있는데, 내뱉는 게 부담스러운 이 분위기란.
괜한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입봉하고 싶습니다.”
“오케이. 그럴 줄 알았어.”
“부장님 말씀대로네요.”
서인하 부장이 씨익 웃고, 정민우 PD도 예상했다는 투였다. 난 괜히 놀림 받은 기분이 들어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다니까?”
서인하 부장이 웃음 지었다.
“모든 PD가 자기 프로그램 만들고 싶은 욕심이야 있지. 하지만 그 욕심에 실력이 따라 주느냐, 타이밍이 맞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고.”
“강 PD는 그 타이밍도 맞아떨어진 거고.”
정민우 PD가 거드는 말에 점점 홀리는 기분이었다.
다시 말해, 어차피 할 줄 알았단 소리 같은데…….
다시 둘을 번갈아 보았더니, 내 표정이 어땠는지 소리를 내며 웃은 두 사람이 다시 눈빛을 맞추었다.
“어쨌든 우리 제안대로 입봉을 하기로 한 거니 서포트는 확실히 해 주마.”
“나도 곧 네 팀장 될 거니까 도울 수 있는 건 확실히 도와줄게.”
곧 예능국의 수장이 될 사람과, 내 직속 팀장 될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 말해 주니 든든하긴 했다.
“그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혹시 만들고 싶은 콘셉트는 있어?”
서인하 부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몇 가지 안은 있습니다.”
“기획안은?”
“정리해야 합니다.”
가안 형태로 된 것들은 지금도 내 개인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워낙에 괴발개발 써 놓은 것들이라서 보여 주긴 민망했지만.
“보시기 좋게 정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래. 정 PD한테 보여 주고 컨펌 받아서 올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인하 부장이 책상으로 돌아가더니, 그 위에서 파일 하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었다.
“생각하고 있던 기획 이외에, 이것도 하나 포함해서 가지고 와.”
파일을 열어 보았다. 기획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짧은 가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보고 고개를 들자, 서인하 부장이나 정민우 PD의 표정이 좀 더 진지해져 있었다.
“입봉한다는 건 이제 제대로 된 PD가 된다는 의미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 때에 맞춰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것도 PD에게는 필요한 능력이야.”
때에 맞춰 필요한 프로그램.
그건,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 경우에는 나보다 윗선인 사람들이, 지금 이 타이밍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프로그램일 것이다.
내가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나도 이미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뭐, 만들고 싶은 거랑 지금 필요한 방송이 상통하는 경우겠지. 그렇게 되길 한번 바라 보자고.”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