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부서 개편
서인하 부장이 이사회의에서 내려온 뒤, 공지 게시판 앞에서 우글대고 있는 직원들을 발견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부장님! 이거, 진짜입니까?”
중견 PD 한 명이 대표로 묻자, 서인하 부장도 게시판을 힐끗 보고는 선선히 대답했다.
“맞아. 몇 달 동안 이야기했잖아. 제작부 형식을 바꾸고 팀별로 나눠서 운영될 거야.”
게시판에 붙은 공지는 단순히 개편에 대한 사실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서인하 부장은 PD들을 사무실로 다시 불러들여 설명했다.
“솔직히 제작부란 이름하에 너무 일이 많이 몰려 있어서 윗선에서도 관리가 되네 안 되네 갖고 이야기가 많았어. 그래서 가을 개편과 함께 예능국, 드라마국 등등 국장 체제로 바꾸고, 그 밑으로 팀을 만들 거야.”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예능 전문이었지만 드라마나 교양 프로까지 관여했던 서인하 제작부장의 업무가 과중한 문제가 이전부터 있었고, 실질적으로 채널이 하나 늘어난 시점에서 더는 이 체제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능국, 드라마국, 교양국 등의 부서를 개편키로 했다는데, 서인하 부장은 예능국장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 아래로 예능1팀, 2팀 등등이 생기고, 현재 예능 PD들이 그 각각의 팀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했고.
“팀장들 위치로 승진이 있겠지.”
PD들의 눈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승진을 꿈꾸지 않는 자가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는 팀이 꾸려지고 나서야 그 팀의 팀장을 맡는 형태였지만, 앞으로 팀별 체제가 되면 달라질 것이다.
몇몇 중견 PD들의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도 있지만, 충분히 팀장으로 오를 경력이 되는 이들이었다.
“드라마국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럴 거야. 그쪽도 국장이 생기고 팀장들이 생기겠지. 대신 우리 방송사 내부 PD는 예능 쪽이 더 많으니까, 예능국이 좀 더 덩치가 크겠지.”
이번에는 드라마 PD들의 눈빛이 빛났다.
힐끔힐끔 비슷한 경력 PD들을 살피는 그 모습은 예능 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서인하 부장은 좌중을 둘러본 뒤, 빙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뭐, 자세한 공고는 곧 나올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각자의 일을 하도록.”
PD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긴 했지만, 선뜻 일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메신저를 하고,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가고, 아침부터 매우 분주했다.
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시 자리에 앉아, 회의를 위해 준비해 둔 자료를 찾아서 프린트하긴 했는데, 프린터 앞에서 멍하니 있었다.
“뭐 하냐?”
멍하니 프린터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가, 들리는 목소리에 움찔 놀라 옆을 보았다.
“아, 선배. 언제 올라왔습니까.”
“공지 하나 나왔다고 해서 보러 왔지. 넌 프린터 보러 올라왔냐?”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박주영 선배가 씨익 웃더니, 푹 찔러 왔다.
“부서 개편 때문에 그래?”
“음, 신경은 쓰이네요.”
“넌 걱정할 거 없지 않냐. 서인하 부장이 알아서 좋은 팀에 넣어 줄 텐데.”
서인하 부장과 함께 이 팀 저 팀 기획회의에 다 끌려다니다 보니, 그가 나를 총애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다.
나로서는 뭐랄까 이 일 저 일 내 일 같지 않은 것에 머리를 쓰는 느낌이라 조금 지친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는 시각은 다른 것이다.
박주영 선배의 말처럼 라인을 잘 탔다는 소리도 있고.
그런 흐름 중에, 이번 부서 개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이 솔직히 걱정되긴 했다.
“선배. 혹시 오늘 시간 좀 되십니까.”
“오늘? 출연진 인터뷰가 있긴 한데 늦게 끝나진 않을 거야. 왜?”
“술 한잔 사 주십쇼.”
“네가 웬일이냐, 술을 사 달라고 하고. 많이 심각해?”
“사실…….”
“강 PD, 준비 다 됐어?”
우리의 대화를 끊으며 들려오는 목소리. 서인하 부장이었다.
둘이 동시에 돌아보자 그가 과장되게 눈썹을 찡그리면서 다가왔다.
“뭐야, 주영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내 욕 했냐?”
“에이, 부장님. 저희가 어떻게 부장님 욕을 하겠습니까. 욕을 할 데가 어디 있다고.”
“그치? 내가 욕을 할 데는 없지?”
크크 하고 웃으면서 서인하 부장이 내 어깨를 툭 치고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회의 늦겠다. 빨리 와.”
“예. 다 뽑았습니다.”
프린터된 자료를 챙겨 들고 박주영 선배에게 인사했다.
“메시지 드릴게요.”
“그래.”
서둘러 서인하 부장을 따라 사무실을 뛰어나갔다.
연달아 세 번의 회의가 있었다.
두 개는 아이돌 리얼리티 관련. 한 개는 새로 만들어지는 NBS-M의 음악 예능.
이번 부서 개편에는, 새 채널인 NBS-M의 오리지널 프로그램 확대가 한몫했다.
현재로선 전체 방송의 10% 수준인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내년까지 30%로 올리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 프로들은 모두 음악 관련으로, 예능이기도 하고 드라마이기도 하고, 다큐나 교양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난달부터 정말 기획회의가 많아졌는데, 덕분에 서인하 부장이 참여하는 일도 많았고, 거기에 나도 같이 끼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돌 심폐소생협회장, 잘 부탁해.”
“요물 PD님, 저희 프로그램에도 운기 좀 나눠 주세요.”
과한 기대를 받으면서 오늘도 회의를 끝냈다.
[86%]
요즘은 계속 이렇다.
기획회의만으로 ‘100%’에 도달하는 경우는 없었다.
제작에 직접 관여하면 도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역할은 여기서 끝.
[……의 확률 보기 사용을 종료하였습니다.]
[100% 확률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포인트가 적립되지 않습니다.]
100%를 채워 본 게 언제더라. 몇 달은 된 듯한데.
그저 허하고, 아쉬운 기분만 가득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저녁 8시.
퇴근 인사를 남겨놓고 사무실을 나와서, 방송국을 벗어나 역 앞까지 걸어갔다.
지하철을 탈 것은 아니었다. 역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가, 익숙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야, 여기. 여기.”
들어가자마자 입구 가까운 곳에 박주영 선배가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옆에 있는 건 민희였다.
“너도 왔었냐.”
“뭐야, 불만이야?”
“그런 건 아니고. 선배가 불렀어요?”
“술 한잔 하자고 했는데 우리 이 작가님이 없으면 섭하잖아. 이렇게 셋이서 작년엔 자주 마셨잖아?”
<당잠사> 팀이 해체된 이후로 이렇게 셋이서 마신 적이 잘 없긴 하다. 같은 회사에 다녀도 팀이 다르다 보니 얼굴 마주치기도 쉽지 않고.
“사귀는 사이에 너무 얼굴 안 보고 살고 그러면 안 돼.”
“사귀는 거 아니라고요.”
“박 PD님은 만날 때마다 그 소리네요.”
“이 작가님도 매번 부정하니까 그러지.”
“매번 부정하는 데는 아주 당연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헛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인 박주영 선배는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지, 지금도 꾸준히 민희와 내가 사귄다는 설을 밀고 있다.
지금도 우리 둘이 동시에 부정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비밀 연애는 피곤할 거야. 하지만 내 앞에선 괜찮다니까?”
“민희야, 그냥 가자.”
“그럴까. 괜히 나왔네, 정말.”
우리가 정말로 일어서려고 하자 결국 낄낄 웃으면서 우리를 말렸다.
우리도 한차례 웃음을 짓고, 역시나 저녁도 먹지 못한 신세 한탄을 하면서, 밥 되게 탕과 안주를 시키고 소주도 주문했다.
한 잔 두 잔, 근황을 나누면서 술을 나누었다. 박주영 선배는 여전히 퀴즈 프로그램을 하고 있고, 민희는 임윤주 작가 밑에서 토크 예능을 하고 있다.
“매주 게스트들 인터뷰 하는 게 제일 힘들어.”
“나도 그래. 게스트마다 다들 성격이 너무 다르다니까. 오늘 만난 배우는 있잖냐…….”
“헐, 그 배우 거기서도 그랬어요? 저번에 우리 프로 나왔을 때도 그 짓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매우 그리워졌다. 괜스레 눈가가 촉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너 표정 왜 그래.”
박주영 선배가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얼굴로 물어왔다. 민희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사실 요새 좀…… 맨날 기획회의만 들어가고, 프로그램 만드는 건 다른 사람이 하고, 그게 계속 반복되다 보니 좀…….”
“이 고생이 그리워?”
아무렇지 않게 푹 찌른다. 난 윽 하는 얼굴을 했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 하나 만들려고 뛰어다녔던 그 고생을 안 한 지 오래되니까 그립고, 허전하고 그래요.”
“한창 만들려고 뛰어다니는 시기에 회의만 죽어라 들어가고 앉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네.”
“오늘도 회의 세 탕 뛰었다던데. 그거 다 부장님이 데리고 들어가는 거지?”
민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다, 너도.”
“그래. 사실 우리 고생이야 방송 만들려면 당연히 하는 거지만, 너는…… 결국 그거 다 남의 방송인 건데.”
그들이 소주잔을 들었다. 나도 그 잔을 부딪쳤지만, 사실 답답함이 풀리진 않았다.
“그래, 그거 때문에 술 마시자고 한 거냐?”
잔을 비우고, 내 잔을 따라 주면서 박주영 선배가 물었다. 마주 잔을 따라 주고, 민희 잔도 채우면서 말했다.
“그것도 있는데요, 사실 고민하는 일이 있어서요. 제가 쉽게 이야기할 사람이 누가 따로 있겠습니까.”
“강요물 PD님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영광이네.”
“무슨 고민인데?”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주점을 찾아오면서 계속 고민했지만, 결론은 꾸미지 않는 것이었다.
“저, 승진할 것 같습니다.”
* * *
며칠 전이었다.
그날도 서인하 부장의 명으로 지원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는데 그 안에 정민우 PD가 있었다.
“어어, 강 PD 아냐. 타, 타.”
“안녕하십니까.”
최근 <뮤직스케치> 지원을 안 나가고 있다 보니 그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묵례하고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부장님한테 가?”
“예. 좀 전에 회의 끝나서, 보고하러 갑니다.”
“부장님이 같이 안 들어갔나 보네?”
“중간에 위의 호출 받고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아이고, 너무 혹독하게 굴리시네. 아무리 요물이라고 해도 쉴 땐 쉬게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기색에 웃음기가 섞여 있어서 딱히 진심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난 그저 웃어넘겼다.
“잘됐네. 나도 부장실 가는 길이거든.”
“아, 그럼 저는 이야기 끝나시고 들어가겠습니다. 바쁜 보고는 아닙니다.”
“아냐, 괜찮아. 아마 강 PD를 부르게 될 거니까.”
“네?”
무슨 말인지 눈빛으로 물었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정말로 부장실에 함께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만나서 그냥 같이 왔습니다.”
“그래? 잘했어. 어차피 부를 거였으니까.”
정민우 PD의 예측 그대로였다. 무슨 일일까, 또 뭘 맡기시려고…….
“회의는 잘 끝났지?”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대로 앉으면서 회의 결과를 이야기했다.
“그래, 결국 그 방향으로 가기로 했나 보군. 알았어, 그쪽은 내가 전해 두지. 수고했어, 강 PD.”
내가 넘긴 파일을 한쪽으로 치워 둔 뒤 서인하 부장이 정민우 PD와 슬쩍 눈을 맞추었다.
뭘까, 둘 사이에 좀 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사실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할까 했었는데, 셋이서 영 시간이 잘 안 맞더라고. 그래서 그냥 이야기하자 싶어졌어. 대외비니까, 당분간 강 PD만 알고 있어.”
“예. 말씀하십시오.”
“부서 개편이 있을 거야. 제작부 체제를 팀 체제로 나누는 게 주요한 포인트가 될 거고, 국장들이 생기겠지.”
개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정 PD가 팀장 중 한자리를 맡게 될 거야.”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물론 10년차 경력인 정민우 PD기에, 팀장급에 어울리지 않아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나에게 알려 주는 것에 놀란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정 PD님.”
“고마워. 강 PD가 도와준 덕분이야, 다.”
인사치레가 그렇게 지나간 뒤, 서인하 부장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 팀에 강 PD를 넣으려고 해. 대리급이 되겠지.”
또 놀랐다.
우리 회사에서는 직위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연차고 호봉이라서, 대리, 주임 같은 명칭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
하지만, 승진은 승진이었다.
거기다 주임을 뛰어넘어, 바로 대리라니. 이게 말이 되나?
“그 부분은 아마 반발은 좀 있을 거야. 하지만 이사진에도 이미 구두로 오케이 받았어. 강 PD 네가 한 일이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거지.”
“부장님이 많이 힘써 주셨어.”
“가, 감사합니다.”
그 말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확히는, 일련의 이야기를 아직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그저 반사적으로 인사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놀라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정 PD랑 한번 이야기해 봤는데. 강 PD, 대리 달면 이제 3년차 들어가잖아.”
“그렇습니다.”
“우리 회사 기준에선 좀 이르긴 하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제안이야.”
무슨 말이길래 뜸을 들이지?
한 번 더 정민우 PD랑 눈을 맞추고, 서인하 부장이 말했다.
“NBS-M 채널에서, 입봉해 볼 생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