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마지막 연습
팬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김유미 팀장의 도도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효명이의 사인을 받고, 핸드백에서 다시 꺼낸 엑시트의 데뷔 앨범에 다시금 멤버 전원의 사인을 다 받고, 마지막으로 수첩에까지 한 번 더 사인을 받아 놓고서도, 그녀는 도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팬사에서도 저렇게는 못할 텐데…… 대단한 여자다.
“대대손손 가보로 떠받들게 할게요.”
표정과 대사가 일치하지 않지만…… 그래, 저런 팬도 있긴 하겠지.
오히려, 저런 팬심에도 정확하게 오디션을 봤다는 게 대단한 일이었다.
“총 네 곡의 리스트를 짜는 대로 연습 영상 보내주세요. 그걸 보고 라인업 구성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잘 찍어 보내셔야 할 거예요.”
“그 영상, 갠소용 아닌 건 확실하지?”
서인하 부장이 툭 말을 던졌다.
아, 팩트로도 때리면 안 되는 건데.
“서 부장님. 저 일할 때는 일만 하는 사람이에요. 설마 필요 없는 걸 사심 때문에 달라고 하겠어요?”
아니라고? 하기야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봐서는 정말 일로 필요한 것 같긴 한데…….
좀 전까지의 날카로웠던 태도도 있어서, 아무튼 우리는 믿기로 했다.
이후 김유미 팀장은 곧장 운영진과 통화를 나눈 뒤에 몇 가지 제안을 더 했다.
그 제안 중에서 방송에 필요한 것을 정리한 뒤, 서인하 부장이 불쑥 말했다.
“이제 문제는 <뮤직스케치>군.”
모두가 연습실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가, 그의 말에 시선이 모였다.
“<뮤직스케치>에 문제가 있습니까?”
정민우 PD와 이미 인사도 했고, 애초에 <뮤직스케치> 라이브 무대와의 콜라보를 메인으로 놓고 진행된 리얼리티다.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데.
“케이 록페스 무대가 성사된 이상, <뮤직스케치> 무대에 힘이 빠질지도 몰라. 케이 록페스 무대 일정이 <드림 어게인> 3화 방송 나가는 시점이잖아.”
무슨 이야긴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초안대로면 최종화까지 끌어올린 것들, 다시 말해 스토리라든가 감정선 같은 것을 <뮤직스케치> 무대에서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구성이었다.
정민우 PD도 그렇기에 오케이한 것인데, 새로 구성된 이 흐름대로 갔다가는 케이 록페스 무대에 화제성을 전부 잡아먹히게 된다.
엑시트나 우리 리얼리티는 상관없지만, 정민우 PD에게는 좋지 못한 상황.
“물론 무대를 성공시킨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뭐, 성공시킬 거잖아?”
“물론이죠.”
효명이가 대표로 대답하는 사이,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던 김유미 팀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어때요.”
“좋은 아이디어 있어?”
“창호 씨, <마스크싱어> 출연했었죠? 그때처럼 가면 쓰고 공연하면 어때요?”
김유미 팀장이 라인업을 꺼냈다.
“신인 라인업이 나쁘진 않은데, 사실 키치함이 좀 부족해요. 다들 실력이야 괜찮다지만, 스타성과는 또 다른 문제잖아요? 요즘 재미있는 밴드가 없기도 해서, 가면 쓰고 무대 만들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가면을 쓰고 공연하면 화제가 되더라도 엑시트라고 특정되긴 어려울 거고, 엑시트가 무대에 선 것만으로 인디 신에서 박탈감을 느끼지도 않겠네요.”
“그렇겠죠?”
“그 신비 콘셉트로 5화까지 끌어가서 <뮤직스케치>에서 터뜨릴 수도 있고…… 만에 하나 공연이 잘못되더라도 방송과 엑시트를 면피시킬 수는 있을 테고.”
“그 생각은 나로선 참 나쁜 연상이긴 한데……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머리는 좋은 편인가 봐요?”
내 말에 김유미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김유미 팀장의 대답에, 세차게 머리가 돌아갔다.
복면 밴드로서 무대를 성공시킨다. 실력과 신비 콘셉트 양쪽으로 화제가 된다. 그 암시를 최종화에 배치하거나 하면 <뮤직스케치>에도 자연스레 연결이 된다…….
“부장님. 마지막 화 스크립트를 엎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유미 팀장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인하 부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주물렀다.
“그게 말이 쉽지. 지금 구성 컨펌까지 받았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소재이지 않습니까.”
서인하 부장이 잠깐 눈을 굴리다 엑시트 쪽을 보았다.
“플래티넘 이야기도 들어봐야지. 어쨌든 케이 록페스가 결정된 만큼, 더 이상 회사에 숨길 수도 없을 거야. 그런데, 네 말대로면 그 공연에서 엑시트라는 사실 자체를 숨기게 되는 거야. 플래티넘이 정말 허락할까?”
“어…….”
그에 대해선 고려해 보지 못해서 말문이 막혔다.
“회사에서는…… 아마 괜찮을 겁니다. 실패했을 때를 생각하면 그쪽이 더 안전할 것 같기도 하고…….”
효명이가 대꾸했다.
“물론 성공할 거예요! 성공할 거지만, 보험은 들어 놓는단 쪽으로 이야길 풀어보겠습니다. 뭣보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복면 밴드라니.”
김유미 팀장이 다시금 예의 비즈니스적인 자세를 잡았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알고, 나도 위에 컨펌 받을게요.”
“다시금 당부하지만, 김 팀장. 최소한의 인원만 알게 해 줘.”
“그럼요.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조심해야죠.”
엑시트와 인사를 나누고, 연습실에서 나온 뒤 김유미 팀장이 타고 갈 택시를 불렀다.
서인하 부장도 대리운전을 다시 부르는 사이, 그녀가 슬쩍 낮게 물어왔다.
“효명 님하고 친하다고요?”
효, 효명…… 님? 거참 어색하기 그지없는 호칭이다.
“네 뭐, <당잠사>를 찍다가 친해졌습니다.”
“사적으로도 만나고, 그러나요?”
“네. 가끔. 술도 얻어먹고 그럽니다.”
“그렇군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강 PD님.”
그녀가 장난스레 악수를 건네오는데, 이걸 참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잠깐 고민이 되었다.
“아, 꼭 사심 때문은 아니에요. 이번 일, 서로 잘 성사시켜 보자는 의미예요.”
“하하하하.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도한 얼굴은 그대로인데, 생각보다 장난스러운 성격이었나.
처음 느낀 압박감을 조금이나마 덜면서, 나도 그 손을 악수했다.
* * *
『엑시트의 버스킹 리얼리티 <드림 어게인> 화제의 첫 출발!』
『NBS-M, <뮤직스케치>에 이은 연타석 홈런!』
『<드림 어게인> 3%대 시청률로 쾌조의 출발!』
<드림 어게인> 1화가 방영되었다. 직후, 우리가 뿌린 보도자료조차 눌러 버린 호평 기사들이 속속 인터넷을 수놓았다.
『<기획> 꿈을 이뤄가는 아이돌 밴드의 기록 <드림 어게인>
―We’z 서진명 기자
제작 발표가 되기 전부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방송이었다. 제작발표회에 대중의 관심이 모인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NBS-M. 개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채널의 프로그램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기대가 쏠렸다.
그렇게 첫 뚜껑을 연 <드림 어게인>은 리더 최효명이 이야기한 ‘꿈을 이루는’ 과정의 기록을 매우 서정적이고 몰입감 있게 풀어내었다…….
.
.
<드림 어게인>은 총 5화 분량의 프로그램이다. 이 리얼리티가 제대로 자리 잡아,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신선한 초석을 다질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방영 이틀 만에 기획기사가 뜨고, 시청자들의 댓글도 줄을 이었다.
―엑시트 시작이 밴드였다는 거 참트루임?
―ㄴ팬들 사이에선 유명했었나 봄.
―첫 콘셉트가 그랬다는 거지 진짜 밴드 한 적은 없잖아.
―명리더 솔로 밴드로 미리 간 봤던 거였네
―서인하 PD? 한참 지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감 안 죽었네
└ㄴㄴ제작발표회 안 봄? 서인하가 첫 기획 발안은 딴사람이라고 했음
└스탭롤에도 있음. 강대한? 겁나 애국적인 이름 아니냐
└야 그래봤자 선택한 건 서인하니까 서인하 감이 좋은 거지
└여러 기획 있었을 텐데 그중에 이거 고른 감은 ㅇㅈ
얼떨결에 내 이름도 그 기사들 댓글에 떠서,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출근 때마다 부끄러운 인사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오오, NBS의 라이징스타, 강대한 PD님 아니십니까?”
“아이고 출근하셨어요, 강 스타?”
박주영 선배와 민희가 아주 얼굴을 보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여 댔다. 같은 팀인 민희는 그렇다 쳐도, 박주영은 순전히 놀리기 위해서 팀에 찾아왔다는 점이 대단했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 안 바쁘십니까?”
“바쁘지. 그렇지만 내가 친애하는 후배 놀릴 시간은 있어.”
그는 낄낄대면서 몇 번 더 나를 부끄럽게 했다가, 그쪽 프로그램 메인에게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선배도 참, 아침부터 열정적이네.”
“자기 후배가 잘되는 걸 저렇게 진솔하게 좋아해 주는 선배가 또 있을 것 같아? 좋게 생각해, 좋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희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실 나보다 화제가 된 것은, 물론 엑시트였다.
―클립 몇 번 돌려보는지 모르겠다 진짜……
―이런 애들을 무대에서 춤만 추게 했다고……? 플래티넘 미친 거임……?
―최효명이야 지난번에 솔로로 밴드 했을 때 잘하는구나 했는데 다른 멤버들도 쩔어 개쩔어
―아론도 드럼 잘 치는 건 처음 앎ㅇㅇ 랩 작사도 좋았음b
―버스킹 직관했어야 했다 ㅠㅠㅠㅠㅠㅠ
―저대로 컴백하는 거지?
―<뮤직스케치>에서 한다더라. 반드시 뽑힌다. 수능 합격 안 돼도 저건 합격해야 한다.
버스킹 무대만 따로 모아서 무편집으로 올렸더니, 그 영상마다 소위 ‘앓는’ 댓글들이 따라붙었다.
조회수도 대번에 10만이 넘어가고, 급상승 검색어 순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시청률은 물론, 내가 맨 처음 원했던 화제성을 완벽하게 잡아냈다.
[‘아이돌 리얼리티 버스킹 기획의 대중적 화제성 획득’ 확률의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수많은 변수와 확률 변동 수치가 평가됩니다.]
1화 방영이 된 직후.
AGD 앱은 나에게 ‘100%’ 달성을 알려 주었다.
거의 50%에 근접한 확률 변동 수치를 평가한 AGD 앱은,
[2,000P가 적립됩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7,843P/2,343P]
무려 ‘2,000P’나 얻었다.
너무 놀라운 포인트라 내역 로그를 뒤졌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위기가 여러 번 있었던 데다, 그때마다 수많은 방향으로 노력했던 과정이 평가받은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게 연속된 2화.
스크립트에 맞춰서 촬영을 진행하면서, 편집, 방영까지의 흐름이 흘러가는 동안 한 차례 더 시청률이 오르고 화제성도 올라갔다.
이쯤 되자 회사에서의 기대도 더 높아지고, 곧장 다음 리얼리티 기획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
3화 방영을 앞둔 수요일.
[엑시트최효명: 케이 록페스 서기 전 최종 연습! 오늘도 연습하러 갑니다! (브이)]
[엑시트최효명: (사진)]
연습실로 출근하면서, 효명이가 엑시트 멤버들이 차 안에서 브이를 그리고 있는 사진을 보내 왔다.
벌써 해가 저무는데 스케줄을 마치고 마지막 합주를 맞추러 가는 것이다.
엑시트의 케이 록페스 무대가 예정된 것은 일요일.
토요일에 3화가 방영되고,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에 무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리허설을 제외하면 멤버들이 케이 록페스 무대를 연습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연습 잘해라. 방송도 방송이지만 너희 꿈이잖아. 잘할 거라고 믿는다. (엄지척)]
나도 묘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임윤주 작가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나를 불렀다.
“강 PD? 아, 자리에 있네. 부장님이 같이 올라오래.”
아, 때가 왔구나.
“지금 갑니다.”
임윤주 작가에게는 갑작스럽겠지만, 서인하 부장의 호출을 난 알고 있었다.
난 자료 파일을 챙겨서, 임윤주 작가와 함께 부장실로 올라갔다. 서인하 부장은 사무실에 따로 자리가 있긴 하지만, 그 위치상 결국 부장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서 와. 일단 앉아.”
“무슨 일이세요?”
임윤주 작가는 느닷없이 불려온 이유를 모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면서 슬쩍 서인하 부장을 눈짓했다.
“크흠. 그래, 임 작가. 다음 촬영지 섭외는 잘돼?”
“부장님이 갑자기 부르지 않으셨으면 확정 지었을 거예요.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임 작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
난 타이밍에 맞춰 기획안을 꺼냈다.
4, 5화 방영 기획안과 더불어, 그 내용 중에는 케이 록페스 무대 또한 실려 있었다.
당장 다가온 케이 록페스 무대 촬영 허가가 바로 어제 떨어졌다. 원래 계약된 방송사 외 다른 방송사의 촬영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는데, 김유미 팀장이 열심히 손을 써준 덕이었다.
그래서 내가 몰래 촬영을 나가야 하는데, 나 혼자만으로는 불안하다는 게 서인하 부장의 의견이었다. 나도 거기에 동의했고, 결국 답을 낸 것이 바로 임윤주 작가였다.
기획안을 본 임윤주 작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걸…… 지금 두 분이서만 진행하셨다고요? 그래서 라이브클럽 섭외도 중지시켰던 거예요?”
“미안해. 사과할게. 나중에 정식으로. 그런데 지금 시간이 없고, 도와줄 사람은 임 작가가 딱이야. 일요일에 비밀스럽게 촬영 진행 좀 해 줄 수 있을까?”
필요한 건 전부 다 지원해 줄게, 뭐 필요해. 같은 장담에도 임윤주 작가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같은 팀인데 속인 거나 마찬가지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라고 달리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도 죄인이니까.
“하아…….”
아주 한참 말이 없던 임윤주 작가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주무르다가 다시 썼다.
“알았어요. 이, 보상은, 다, 끝난, 다음에, 꼭, 반드시, 받아낼, 테니까, 그리, 아세요.”
어절마다 끊어서 말하는 것이,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난 여전히 찍소리도 못했고, 서인하 부장도 그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데 이 무대, 정말 괜찮아요? 화제는 당연히 되겠지만…… 버스킹과는 완전 다르잖아요. 성공할 수 있겠어요?”
난 임윤주 작가가 손에 들고 있는 기획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성공해야 한다. 동시에, 실패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남아선 안 된다.
정말 여러 사람의 목숨줄이 걸려 있는 일이었으니까.
내 속이 편하기 위해서 나는 케이 록페스 무대가 성공할 확률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홀연히 떠오르는 숫자를 보고야 말았다.
[62%]
그만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