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38화 (38/200)

38화 케이 록페스를 위해

방송국 건물 한 층을 거의 다 차지할 정도로 충실하게 꾸며진 편집실임에도 텅텅 비는 일은 드물었다. 예능, 드라마를 비롯해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 많다 보니 빈 때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편집실은 정을 붙이려야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서울로 복귀하기 무섭게 편집실행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서인하 부장은 부산 촬영이 끝나고 올라온 날부터,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나에게 일을 쏟아부었다.

“티저 꼽아 봐.”

“1화 가편집 할 줄 알지?”

“가편집하면서 클립도 몇 개 꼽아 보고.”

“스크립트 정리하려면 별로 안 걸리지?”

하하, 별로 안 걸릴까요? 나도 모르게 성질을 낼 뻔했지만 참았다.

“그만큼 잘 봐주고 있는 거잖아.”

모니터를 보고 한숨을 쉬는 나를 보고 이민희가 피식 웃었다.

서울로 올라온 날, 그녀와 술 한잔을 하면서 말을 놓기로 했다. 동갑이긴 해도 그녀가 경력이 긴 데다 PD와 작가의 관계라서 애매한 존대를 유지했었는데, 기왕 의기투합할 거, 서로 편하게 대하기로 한 거였다.

“잘 봐주는 건 좋은데……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지.”

사실 선배들 입장에선 내가 천둥벌거숭이 같지 않을까?

원래 서브를 맡을 예정이었던 선배 PD의 역할마저 빼앗은 것 같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근데 부장님 성격이 이렇게 급할 줄은 몰랐어. 아니, 아직 5화까지 촬영 분량을 다 뽑은 것도 아닌데 뭘 벌써부터 1화 가편집을 시켜?”

민희가 나더러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편집을 이렇게 급하게 하게 된 건 부장님의 성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지만.

“뭐…… 까라면 까야지.”

그냥 적당히 맞장구만 쳐 주기로 했다.

“어쩌면 네 선배들, 급하게 가편집 안 해도 돼서 좋아할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긴 하겠네.”

“아냐. 혜정 언니도 다 그렇거든. 확실해.”

사실 민희도 나와 비슷한 신세였다. 임윤주 작가는 민희가 맘에 들었는지, 그녀 위로 손혜정 작가라는 선배가 있음에도 메인 급의 일을 시키고 있었다.

“대빵이 자기 밑에서 한번 빡시게 굴러 보라는 소리를 한 걸 정말 좋아해야 하나 싶다니까?”

어쨌든 그 탓에, 우린 이 밤에도 편집실에 붙잡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고생하는 게 아니라서 참 든든해.”

“그치? 나밖에 없지?”

작가가 굳이 있을 필요는 없는데, 그녀 나름대로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있는 것이다.

“네네, 이 작가님. 참 감사합니다.”

“시원하면 커피나 좀 쏴. 잠깐 쉴 겸.”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드디어 몇 시간 만에 편집실을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많이 늘었더라, 너.”

캔커피를 뽑아 민희에게 주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당잠사>에서 구른 보람이 있나 봐? 그때보다 훨씬 편집이 매끄러워졌어.”

“그거 다행이네.”

시즌3 때 카페에서 빡시게 구른 탓에 편집 스킬이 조금은 는 것 같았다.

현준영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첫 화의 가편집본이 완성되어 갈수록 확률은 더욱 안정적이 되었다.

[92%]

100%에 가까워질수록 1% 올리기도 힘든데, 이젠 매우 정기적인 페이스로 올라가고 있었다.

고생한 보람이라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가편집본을 완성하면 [93%]을 찍지 않을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엑시트 멤버들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이 방송 대박나지 않을까? <뮤직스케치> 무대도 기대가 되고.”

“좀 전에도 연습하고 있다더라. 사진 보내 왔었는데. 여기.”

“야, 애인 사진 솔로한테 자랑하고 그러는 거 아냐.”

“너…… 대체 정체가 뭐냐.”

기레기도 이 정도로 소설을 쓰진 않겠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서인하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야. 우리 노는 거 기가 막히게 아시고 전화를 해 오셨네? ……힘내.”

민희는 또 일을 잔뜩 떠안을까 걱정하며 격려해 줬다.

나도 부디 그런 용건이 아니길 바라고 있다.

휴게실을 나서 계단참까지 나온 뒤, 전화를 받았다.

“예, 부장님.”

“그래, 강대한. 잘 되고 있어? 잘 뽑아야 해. 그래서 맡긴 거야.”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보통 이 타이밍에 말을 한번 끌면서 일을 맡기곤 하셨는데, 이번엔 어떨까.

“케이 록페스 섭외 담당, 연락됐어. 지금 바로 와.”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가장 원하던 전화였다. 며칠간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주소 찍어 줄 테니까 헤매지 말고.”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움직이려던 나를 서인하 부장의 한마디가 다시 붙잡았다.

“이 일, 아무도 모르는 거 확실하지?”

* * *

부산 호텔에서의 밤.

케이 록페스행에 콜 사인을 준 서인하 부장은 직접 엑시트 멤버들을 만났다.

“어, 형 생각보다 빠르…… 헉, 부장님. 어서 오세요.”

내 옆의 서인하 부장을 보고 문을 열던 효명이가 놀라 굳었다.

“들어가지, 일단.”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굳이 한 번 더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무슨 죄 진 사람도 아닌데.

늘어져 있던 엑시트 멤버들이 서인하 부장의 등장에 하나같이 정자세로 일어섰다.

서인하 부장은 손짓으로 다시 앉게 한 뒤, 나에게 동영상 녹화를 지시했다.

“대한이…… 강PD에게 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도록 하죠. 록페스, 할 겁니까?”

연출 책임이 하는 물음은 무게가 달랐다. 엑시트 멤버 전부 다 대번에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물론입니다.”

“하고 싶습니다.”

“저희 꿈이었는걸요.”

그들이 하는 대답은 단단했다. 다시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좋아. 그럼 우리도 전력으로 서포트하죠. 방송과 여러분의 꿈, 서로 윈윈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메인 PD의 최종 컨펌. 엑시트 멤버들이 서로 들떠서 대답했다.

“단.”

하지만, 서인하 부장이 외마디로 분위기를 잘라 냈다.

“명심해야 합니다. 케이 록페스 무대를 망치는 순간, 방송도 아작 나요. 난 총괄로서 그런 결과를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해야 합니다.”

“물론이죠.”

“잠도 줄여서 하겠습니다.”

“그래요. 좋은 자세입니다. 다만 한 가지 더 말해 둘 게 있는데.”

서인하 부장은 엑시트를 보고, 이어서 나도 보았다. 내가 눈으로 ‘저요?’라는 사인을 보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은 여기 있는 우리들만 아는 겁니다. 다른 사람, 특히 다른 제작진들한테도 절대 알리지 마세요.”

“예? 네?”

내가 당황해 물었다.

“비밀로 진행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솔직히 위험도가 크거든. 방송 짬 좀 먹었다는 나도 해 본 적 없는 일이고, 솔직히 잘될지 안 될지 예상이 안 돼. 그러니 차라리 안전하게, 만약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잔 겁니다. 그게 모두한테 안전한 길이야.”

최소한의 인원만 알게 극비리에 연습, 촬영을 진행하자는 말이었다.

엑시트로서는 무조건 무대를 성공시키겠다는 의욕이야 차 있었지만, 서인하 부장의 현실적인 판단을 반대하기엔 아직 드러낸 게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맨 처음 소스를 주었던 민희에게조차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가편집본을 빨리 제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만,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던 거다.

미안한 감은 있었지만, 서인하 부장의 지시이기도 하고 엑시트 멤버들을 위해서도 입은 내내 걸어 잠갔다.

지금도 연습실에 모인 엑시트 멤버들은, <뮤직스케치> 무대와 병행하여 케이 록페스 연습도 하고 있었다.

버스킹의 곡과도, <뮤직스케치>와도 완전히 다른 케이 록페스만의 무대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나도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인하 부장이 알려 준 주소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민희에게는 서인하 부장이 따로 시킨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빠져나온 상태였다.

지하로 내려가자 조명이 흐릿한 주점이 보였다. 요즘 유행한다는 퓨전 한식 주점이었다.

“서인하 제작부장님의 일행인데요.”

입구에서 점원에게 말하자, 즉각 개인실로 안내되었다.

노크하고 문을 열자, 안에 서인하 부장과, 긴 생머리가 인상적인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보였다.

“왔구나. 빨리 들어와.”

서인하 부장이 손짓해, 그의 곁에 자리 잡았다.

“인사들 해. 이쪽은 케이 록페스 섭외 담당인 김유미 팀장. 이쪽은 우리 팀 막내 강대한 PD.”

“막내요? 그런데 제작부장님이랑 같이 다녀요? 능력 있으신가 보네. 반가워요. 김유미예요.”

그녀가 놀라워하면서 손을 뻗어왔다.

“강대한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하자,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긴장하신 거 같다. 얼굴 좀 푸세요. 잡아먹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얼굴에 다 보이나.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터트리며 서둘러 물을 마셨다.

“긴장 풀어, 풀어. 김 팀장이 사납게 보이긴 해도 좋은 사람이야.”

“어머, 부장님. 저 어디 가서 예쁘단 소리는 들어도 사납단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그렇다 치고.”

서인하 부장과 또래처럼 이야기하는 김유미 팀장을 보니, 사납게 보인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다.

분명 미인이기는 한데, 뭐랄까 날카로운 인상에서 포스가 느껴졌다.

그녀는 공연 기획 쪽으로는 도가 튼 사람이라고 했다.

역시 그 명성답게 만만찮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 포스에 눌리지 않는 것이다.

물 한 잔으로 진정하는 사이, 서인하 부장과 김유미 팀장의 대화가 몇 번 더 오갔다.

언제 끼어들까 틈을 보고 있는데, 김유미 팀장이 돌연 내게 말을 건넸다.

“들었어요. 전부라긴 뭣하지만.”

김유미 팀장이 도도하게 턱 앞에서 손깍지를 끼며 나를 보았다.

“팀 하나를 신인 밴드 라인업에 올리고 싶으시다고요. 암만 봐도 서 부장님이 친히 하실 만한 제안은 아닌 것 같아서 몇 번 더 여쭸더니, 지금 만드시는 프로그램 관련이라며 나머진 극비라고 하시더라고요.”

“극비인 건은 맞습니다. 밴드 실력은 저희가 장담하겠습니다. 신인이긴 해도 실력이 있는 친구들입니다. 무대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말로는 다 쉽죠.”

김유미 팀장은 도도한 얼굴을 바꾸지 않고 푹 찔러 왔다.

“서 부장님에게도 말했지만, 지금 신인 라인업이 한 팀 비어 있긴 해요. 왜 비었는지 알아요?”

“모르겠습니다.”

“알고 지내는 기획사에서 실력 좋은 밴드가 나온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라인업에 올렸어요. 그런데 막상 지난주에 오디션을 봤더니 형편없는 거예요. 곡도 엉망이고 연주도 엉망이고. 그래서 한 자리가 비었죠.”

“위약금도 물어 줬대.”

“시말서도 썼지만, 무대가 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거든요.”

김유미 팀장이 그 포스만큼 어떻게 일하는지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에피소드.

굳이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신인 밴드가 누구이든, 내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것.

서인하 부장을 슬쩍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도 설득은 해 봤지만 안 통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하죠.”

김유미 팀장이 내 잔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합석해서 아직 한 잔의 술도 받지 않았다.

빈 잔을 들자, 그녀가 거기에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눈치를 주지 않아도 원샷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꿀꺽 하고 막걸리를 비운 다음, 김유미 팀장의 잔도 채워주었다.

그 잔을 들고, 김유미 팀장이 입술을 진득하게 끌어올려 미소를 그렸다.

“누구예요, 그 밴드?”

뭐라고 답해야 할까. 확률이라도 보고 싶은 그 순간,

“아니지. 다시 묻죠. 그 밴드, 엑시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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