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꿈을 이뤘을까
부산 촬영은 광안리 버스킹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점심쯤에 서면에서 한 번 더 버스킹을 하고서 서울로 돌아가는 계획이었다.
당장 내일을 위해 서면 상가 협의회와 몇 번 더 통화하고, 관련 구청 담당 직원과도 시간을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우리 제작진은 휴식에 들어갔다.
똑똑.
카메라 감독들이 전부 자러 간 것을 확인하고, 나는 효명이의 방문을 두들겼다.
“어서 오세요, 형.”
내가 방문할 걸 미리 알고 있던 효명이의 방에는 엑시트가 전부 모여 있었다. 나는 손으로 쉿 하는 동작을 해 보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오늘 고생하셨어요.”
이 좁은 방 안에 아이돌 5명이 앉아 있었다. 효명이 말고도 다들 함께 촬영을 진행하면서 더 친해져 가고 있는 동생들이었다.
아직 말을 놓진 못했지만.
“고생은요. 고생은 여러분이 다 했죠.”
제작진의 관여를 최소화한다는 방침 때문에, 이동과 버스킹 준비, 철수까지 전부 엑시트가 도맡아 하고 있다.
호텔에서라도 푹 쉬라고 카메라는 정말 최소한만 배치한 상태.
나는 효명이가 비워 준 소파에 앉으면 한 번 더 카메라를 훑었다. 전부 꺼져 있다.
그것을 보고 슥 내 스마트폰을 꺼내 한쪽에 세우고 동영상 녹화를 시작했다.
“뭐 하세요, 형?”
버릇처럼 내게 맥주캔 하나를 내주던 효명이가 내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녹화 끝난 거 아니었어요?”
“아, 벌써 씻어서 메이크업 다 지워졌는데.”
투덜대는 아론과 기한, 그에 비해 허민과 창호는 별말이 없었다. 창호는 시크한 눈매로 렌즈를 일별하는 것 같더니, 다시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돌아갔다.
“좀 찍을게.”
양해 아닌 양해를 간단히 구한 다음, 난 효명이가 준 맥주를 깠다.
어서 말해 주고 싶었지만 일단 나도 숨을 돌린 시간이 필요했다. 꿀꺽 맥주를 삼킨 다음, 엑시트 5명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오늘 시민들 상대로 했던 멘트가 아주 좋았어. 부장님은 첫 화에 프롤로그로 붙이면 딱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제목 정말 <드림 어게인>으로 가는 거예요?”
“더 좋은 게 없다면.”
효명이의 발언으로 만들어진 제목. 솔직히 그것 이상의 제목은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냥 버스-킹 안 돼요? 어차피 우리 버스 이름도 그건데.”
“야, 좀. 제발 그건 하지 말자.”
“왜? 좋지 않아? 버스킹의 킹이 되는 거지! 우리가!”
“닥쳐. 넌 좀 닥쳐.”
아론과 허민이 투닥대자 분위기가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의 긴장이.
“그런데, 그 장면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이 있어.”
“생각이요?”
“꿈이 이뤄졌댔잖아, 네가. 그런데…… 버스킹과 <뮤직스케치> 무대. 그것만으로 너희들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
효명이를 보고, 다른 네 명도 돌아보았다. 다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몇 년째 속에 담아 뒀던 밴드로서의 꿈을 그냥 버스킹으로 해소하기엔 아깝잖아.”
“저희 싱글도 낼 거잖아요.”
“그래, 알아. <뮤직스케치>에서 밴드로 컴백 무대도 할 거고. 하지만…… 왠지 나는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
반쯤 누워 있던 창호도 상체를 일으켰다. 5명의 시선이 모인 것이 느껴졌다. 미팅 때에도 몇 번 보지 못한 진지한 눈길들.
“혹시,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서 볼 생각은 없어?”
“네……?”
“록 페스티벌요……? 지산이나 펜타포트 같은 데요?”
엑시트 전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온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이민희가 찾아준 록 페스티벌의 정보가 있었다.
고양 K-Rock 페스티벌. 고양시에 조성 중인 한류월드에서 5월 중순에 열릴 야외 록 페스티벌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무대에 밴드로 공연하라고요……?”
“그래. 물론 확정된 건 아니야. 이 프로그램은 너희 결정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할 생각이 있다면, 추진해 볼 계획이야.”
어느새 5명이 바짝 붙어서 태블릿 화면을 쏘아져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너희가 꼭 했음 좋겠어. 이쯤은 해 봐야 오랜 소원을 성취했다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거든.”
참가 확정된 명단만 봐도 으리으리했다. 곽도현 밴드, 환생 같은 유명 밴드부터 인디 밴드까지 있었는데, 이민희 말로는 그 인디들 모두가 인디 신을 씹어먹는 괴물들이라 했다. 거기에 기라성 같은 해외 실력파 밴드들까지 목록에 있었다.
“여기에…… 우리더러 서라고요……?”
“뭐지…… 신종 수치 플레이, 신종 은퇴 선언. 뭐, 그런 건가요?”
드립을 치곤 있지만, 아론도 말도 안 된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게 라인업만 보면 그런데…… 첫날 낮 공연 중에 홍보 차원으로 신인 밴드 서너 팀만 뽑아서 공연을 시킨대. 그 라인업이면 괜찮지 않을까?”
“메인 PD님 컨펌은 받은 거예요?”
효명이가 물어왔다. 난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희가 콜 하면 보고할 생각이라니까.”
5명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으니까.
잠시 후.
“……형. 솔직하게 이거 가능하긴 해요? 솔직하게요.”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마당에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뭐, 부장님 설득이야 둘째치고…… 록페스 운영팀 설득이 관건이겠지.”
“많이 어렵다는 거네요.”
“맞아. 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거야. 부장님이고, 저쪽 팀이고.”
부정할 순 없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이 친구들의 꿈을 이뤄 주고 싶었다.
“이번 리얼리티 처음 찍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창호의 푹 찌르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미국에서 어거지로 쇼다운 나갔을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나도. 일주일 만에 댄스대회 준비했을 때가 더 나았을 것 같다.”
이어지는 아론과 허민의 말.
“예전에 밴드할 때도 이렇게 무리한 무대는 안 섰었단 말이죠.”
기한도 밴드 경험을 떠올리며 말한다.
다들 부정적인 말.
“하지만…….”
효명이가 멤버들과 재차 눈을 마주친 후 나를 보았다.
“저희는 해 보고 싶어요.”
엑시트의 5명은 전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생한, 고양되어 있는 얼굴.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그래, 첫날 촬영 때, 녹음실에서 처음 합주를 했을 때, 바로 그 얼굴이었다.
“되든 안 되든. 되면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버스킹 열심히 하면 되고. 그럼 되죠?”
“속 편한 놈은 좋겠다.”
“너는 좀 나를 닮아야 해.”
아론과 허민이 다시 투닥대는 사이, 창호와 기한은 한 번 더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신인 밴드들 무대는 아직 라인업 짜고 있다니까 가능성 있을 거예요.”
“뭐 록페스에서 라인업이 바뀌고 추가되는 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죠.”
“다만 저쪽에서 받아 줄까가 문제겠지만.”
흥분한 줄 알았는데, 창호는 여전히 냉랭했다. 시크한 성격이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 형. 같이 부장님하고 싸우러 갈까요? 지금 바로?”
효명이의 말에 나조차 고양됨을 느꼈다.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 또한 이런 본격적인 무대를 바랐음에도,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니, 괜찮아. 너희한테 던져 놓고서 설득까지 맡기면 내가 월급 루팡이지.”
루팡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설득은 내가 해 볼게.”
난 동영상 녹화를 종료하고, 태블릿까지 챙겨서 일어섰다.
“나만 믿어. 라인업에 반드시 등록해 줄게.”
* * *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막 잠이 들려고 하는 걸 깨워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헛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어서인지.
서인하 부장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절로 넘어가는 침을 가까스로 안 삼킨 척 하고, 다시 말했다.
“고양 K-Rock 페스티벌에, 엑시트를 세우고 싶습니다.”
“케이록?”
단숨에 줄여 부르는 게 왠지 아는 투처럼 느껴졌다.
“아십니까?”
“알다마다. 거기 촬영 협조 들어왔었거든. 최종적으로 틀어지긴 했는데, NBS-M에서 특집 방송 하나 짜려고도 했었어.”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2년차 PD인 나는 모르는, 부장급 PD라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좀 전까지 보여 주고 있던 태블릿을 조작해 신인 밴드 라인업을 띄웠다.
“혹시 주최 측하고 직접 안면이 있으신가요?”
“그럼. 퍼플레인 일로 구멍을 열심히 메우고 있다는 것도 알지.”
퍼플레인이라…….
“그래서, 여기 신인 밴드 라인업에 엑시트를 넣고 싶다? 라이브 클럽이 아니라?”
“네. 기왕 판을 벌일 거, 보다 크고 본격적인 무대에 세우면 그것만으로도 정말로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그림 생각보다는 엑시트를 위함이었지만, 서인하 부장을 설득하기엔 이쪽을 어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태블릿을 무심하게 넘겨보던 그가 손가락을 들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물잔이어서, 잽싸게 건넸다. 시원하게 들이킨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다시 보았다.
“그게 아니잖아. 단순히 그림 때문이야?”
“……네?”
“방송에 예쁜 그림 넣으려고만 생각해 낸 거냐는 말이야.”
서인하 부장의 눈이 나를 꿰뚫는 것 같아서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회사 경력 1년짜리의 생각 따윈 이미 머릿속에 훤하다는 듯한 눈이어서, 나는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감추지는 말자. 대신 솔직하게 밝히고 설득을 하자.
순간적으로 나는 방향을 정했다.
“……사실 엑시트를 생각한 결정이긴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스토리텔링이 떠올랐습니다.”
“스토리텔링?”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는 내가 생각해 왔고 엑시트에게 말해 줬던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그럴싸하게 포장할 때였다.
“현실의 벽에 막혀서 밴드 음악을 접고 댄스 음악을 해야 했던 아이돌이, 간절한 꿈을 이룰 날이 왔습니다. 버스킹으로 실력을 단련하고, 자신들을 알리면서 결국엔 내로라하는 밴드들과 한 무대에 서게 되는 거죠.”
서인하 부장은 계속 해 보라는 듯이 잠자코 있었다.
“그 무대 위에서 아이돌이 아닌 올곧이 밴드로 인정을 받는 장면을 최종화에 보여 줄 수 있다면 멋진 스토리텔링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최근 예능 트렌드는 리얼함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요시되는 점이 또 있다. 바로 스토리텔링.
예능에서도 시청자들은 스토리를 원한다.
출연진들이, 제작진들이 어떤 스토리를 구상하느냐에 따라 같은 촬영분이라도 구성이 달라진다.
스토리를 어떤 식으로 풀어내느냐에 따라 완성본은 천차만별이 되는 것.
스토리에 이입하라.
방송 제작을 배울 때 항상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
방송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
나는 거기에 승부수를 두었다.
“……스토리텔링이라.”
서인하 부장이 운을 떼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야, 강대한.”
“네……?”
“너무 장황하지 않냐? 5화짜리 프로그램에서 그 스토리텔링을 담기엔?”
“네……?”
“핑계가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는 법이야. 너는 설득하는 법을 좀 더 배워야겠다.”
에고, 결국 설득 실패각인가. 하긴, 듣기 좋게 포장하는 데 치우쳐서 너무 장황하게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난 아직 멀었구나…….
그렇게 자책할 때였다.
“소주 한잔 하고 싶네.”
“사 올까요?”
“됐어, 인마. 저기 미니 냉장고 열어 봐.”
아니, 체크인을 한꺼번에 했는데 또 언제 사 오셨대?
내가 후딱 냉장고를 열어 보니 종이 소주 컵 대엿 개에 뚜껑이 덮인 소주병이 보였다.
이것이 베테랑의 준비성인가 싶어 감탄할 뻔했다가 정신 차리고 어영부영 꺼내 들어 도로 소파에 앉았다.
또르르.
병뚜껑을 따 소주를 한 잔 따라 올리자, 서인하 부장이 내게도 잔을 건넸다.
그가 크 하고 한 잔을 비우더니 말했다.
“후우…… 쉽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하기엔 협의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아. 엑시트 애들도 설득해야 할 거고.”
뭐지…… 반대하는 입장이셨던 게 아닌가?
돌아가는 상황 파악이 안 됐지만, 일단 대답부터 했다.
“아, 그건 사실…….”
“뭐야, 이거. 그러니까 지금, 엑시트한테 먼저 딜 걸어놓고 나한테 온 거였냐?”
“아으, 그, 그게…….”
“이놈 이거, 눈 딱 감고 진행해 줄까 했더만, 도로 엎어야겠네?”
“죄, 죄송합니…… 예?”
지금 뭐라고 하셨지? 진행…… 한다고?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아주 제멋대로야.”
“죄송합니다…….”
“뭐, 하긴. 패기 있어서 보긴 좋네.”
대화가 아주 롤러코스터로 흐르고 있었다. 이런 건 제대하면서 다신 못 겪을 줄 알았는데.
그러는 사이, 서인하 부장의 속내가 엿보인 것 같았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서인하 부장은 기어코 피식 웃었다.
“주최 측 섭외 담당, 약속 잡아 주마.”
“감사합니다, 부장님!”
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더할 수 없이 기뻐서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아, 맞아. 엑시트 애들 설득하는 장면을 찍어 뒀어야 그림이 살 텐데. 보나 마나 카메라 켜져 있는지 확인도 안 했지?”
“찍었습니다.”
나는 내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서인하 부장이 처음으로 허 하는 소리를 내더니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런 요물이 나타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