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리얼리티 첫 촬영
플래티넘은 류준혁을 영입하면서 배우 부문이 보강된 데다 대형 규모로 발돋움을 할 여건은 갖췄지만, 여전히 중소 규모였다. 빅3 연예 기획사에 비견하기는 아직 부족했다.
다만 발전 가능성이 큰 시점이고, 그 발전력의 한 축인 엑시트로서는 아직 안정적으로 매출을 올려야 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버스킹 리얼리티 프로젝트를 하자고 우리가 달려든 것이다.
컴백이 50일 남은 마당에, 지금껏 준비한 컴백 콘셉트를 내다 버리고, 밴드 음악으로 버스킹을 하자는 거다.
그것도 외부인인 우리 제작진뿐만 아니라 엑시트 멤버들부터 송일현 매니저까지.
플래티넘 대표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프다 못해 멘털이 나갈 지경일 거다.
아니나 다를까, 초면인데도 대표의 전신에서 그러한 감정이 느껴졌다. 표정에 서린 불쾌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갑작스럽군요.”
그나마 방송계 짬밥인 굉장한 서인하 부장이 있어서 욕만 안 하겠다 수준이다.
“꼭 방송 때문만이 아니에요. 저희 원래 밴드로 하려고 했었잖아요, 사장님. 이게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상업적 리스크 때문에 포기했던 밴드 콘셉트. 그것을 부활시킬 찬스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엑시트 멤버들은 하나같이 열성적이었다.
“반드시 방송을 성공시키겠습니다.”
서인하 부장도 직위를 내걸고 그렇게 장담했다.
……이게 그건가? 인해전술, 혹은 차륜전?
대표가 한마디를 할라치면 몇 명이고 달려들어 애원을 하고 반박을 하고 장담을 한다.
싹 다 나가라고 안 하는 게 용해 보일 정도였다.
결국 대표는 이마를 주무르다가 진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송 매니저.”
“예, 대표님.”
“가서, 팀장들 올라오라고 해.”
“어…… 네!”
송일현 매니저가 움찔하다가 곧바로 사장실을 튀어나갔다.
대표는 부라리는 눈매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효명이와 서인하 부장, 그리고 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슬쩍 눈매를 풀었다.
“우리 회사로서는 많은 걸 포기하고 진행하는 겁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효명이를 비롯한 엑시트 멤버들이 소리치고, 나랑 서인하 부장도 벌떡 일어났다. 서인하 부장은 대표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까지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가지곤 안 됩니다. 반드시 성공시켜 주세요.”
대표의 허가가 떨어진 순간, 나만 볼 수 있는 확률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75%]
그 이후, 다들 간절해서인지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장 다행한 건 엑시트의 컴백이 늦춰졌다는 사실이었다. 예산깨나 잡아먹는 뮤비 촬영이나 디자인, 촬영 등이 아직 진행되기 전이라 손실 폭을 줄일 수 있었다나 뭐라나.
다만, 컴백을 미뤘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다른 그룹들과 겹치지 않게끔 컴백 시기를 조율해야 해서 일정이 엄청 여유가 있진 않았다.
조정된 일정은 2주. 14일을 추가로 벌어 그나마 컴백까지 64일이라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시간을 벌었다고는 해도 결코 여유로운 일정은 아니어서, 방영 화수는 총 5화로 결정했다.
1시간 내외 분량으로 5화. 그리고 최종화 방영 직후 <뮤직스케치>에서 컴백 무대.
이번 리얼리티 프로젝트의 최종 편성안이었다.
“다른 방송이랑 연계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저희도 준비할 게 많겠군요.”
서인하 부장과 동석한 채로 <뮤직스케치>의 정민우 PD와도 만나 보았다.
서글한 인상의 그는 <뮤직스케치>의 라이브 무대에 꽤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그가 이러한 형태의 콜라보를 허락해 준 것이 참 감사할 따름이었다.
일정은 막힘없이 흘러가 첫 방영일도 결정되었다.
4월 마지막 토요일. 가칭 <엑시트의 버스-킹>의 첫 화 방영일이었다.
* * *
“네, 효명이한테 연락받았습니다. 스튜디오 흔쾌히 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방문하겠습니다.”
나는 첫 녹화를 효명이의 싱글 앨범이 작업된 홍대의 그 녹음실에서 진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우리 팀에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홍대 인디씬 시절의 감성을 되살리고, 그때의 감정을 논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결과 장소 섭외를 할 수 있었고, 출발하기 전 확인 차 전화를 해 본 거였다.
섭외가 끝나고 장소를 촬영 스크립트에 기입했을 때, 확률이 또 상승했었다.
[81%]
확률이 80%대로 진입했다.
그동안의 경험상, 80%대에 들어서면 큰 사건이 없지 않고서야 확률이 크게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제부턴 정말 잘 만들고 볼 일만 남은 셈이다.
“장비 다 챙겼지? 슬슬 가자.”
서인하 부장이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촬영팀이나 음향팀과는 현장에서 바로 만나기로 해서, 연출과 작가진만 재빨리 이동하면 될 일이었다.
미니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민희가 문득 생각 났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콘셉트도 버스킹인데, 이런 버스 하나 대절해서 타고 다니면 어떨까요? 버스킹이니까 버스로 이동하는 거죠.”
실패한 아저씨 개그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그 드립을 듣고 있는 우리 대장이 아저씨 부장이었다.
“어라, 괜찮겠는데. 회사에 남는 버스 있던가.”
아, 아조씨…….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대절도 알아봐.”
그러자 마흔을 바라보는 선배들도 아조씨가 되어 갔다.
“어라, 진짜요? 진짜 하시게요?”
정작 아이디어를 낸 이민희가 당황하는 사이, 뒷자리에 앉은 임윤주 작가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서인하 부장은 신나서 버스 콘셉트를 몇 개 더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들은 임윤주 작가가 칼같이 커트해 버렸다.
“……그래, 그럼 겉만 조금 꾸미는 걸로 하자고.”
묘하게 서인하 부장이 시무룩해진 사이에 차가 홍대의 좁은 골목에 도착했다.
촬영 장비를 실은 트레일러도 한쪽에 도착해 있었고, 촬영팀은 스튜디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녹음실로 뛰어 내려가 주인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NBS 예능팀에서 나왔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전화 주신 분이신가요?”
“예, 강대한입니다.”
효명이가 미리 귀띔했던 대로, 스킨헤드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덩치도 있고, 언뜻언뜻 소매 밑으로 요란스러운 문신도 보였다.
효명이 말로는 이 동네에서는 제법 터줏대감인 데다, 힙합 음악을 주로 하는 분이라고 했었다.
“녹음실 감사합니다. 깨끗하게 쓰고, 정리해 놓고 가겠습니다.”
“여기 기재들만 조심해 주시면 됩니다. 방송에 나올 만큼 그럴싸한 데는 아니라서 참, 괜히 쑥스럽고 그렇네요.”
“아니요. 별말씀을요. 딱 좋은데요.”
스튜디오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장비도, 녹음실의 정경도 그대로였다.
그는 뒤따라 내려온 서인하 부장하고도 악수를 나눈 후에 자리를 피해 주었다.
“카메라 팀 도착했나? 미술팀도 좀 오라 그래.”
서인하 부장이 진두지휘를 시작했다.
미술팀이 뒷정리를 위해 스튜디오 구석구석을 촬영한 뒤, 가지고 온 소품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는 어떻게 할까요? 출연진한테 채울까요?”
음향팀의 질문에 서인하 부장은 한차례 스튜디오를 둘러보고선 고개를 저었다.
“일단 마이크를 따로 배치해. 최대한 날것으로 소리를 잡아 보자고.”
기획 회의를 거듭하면서 정한 룰이 있었다.
결코 꾸미지 말자는 것. 편집 때 고생하더라도 리얼리티 프로젝트에 걸맞게 날것 그대로 잡자고.
그를 위해서 오늘 촬영에서 쓰일 카메라는 엑시트가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최대한 숨겨서 배치해 뒀다.
그 일환으로 개인 마이크도 채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애초에 작은 규모인 데다 스튜디오다 보니 외부 소리가 잡힐 일도 없었다.
나는 막상 이런 배치를 보는 건 처음이라, 이것저것 눈여겨보며 메모해 두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배치 완료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그래. 야, 대한아. 올라가자.”
서인하 부장이 나를 보며 손짓했다. 나는 그와 같이 버스로 돌아가 배치된 모니터를 확인했다. 나는 서인하 부장 옆에 찰싹 붙어서 그가 내리는 지시를 카메라 감독이나 음향 감독들에게 전달했다.
“자, 마이크 체크. 잘 들리시나요?”
마이크 설치도 끝낸 음향 감독이 근처의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이야기하자, PD들에게 연결된 이어폰에서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작아. 좀 더 키워 봐.”
“거기 뒤쪽, 3번 마이크 켜진 것 맞아? 안 들리는 것 같은데.”
“녹음실에 있는 7번 마이크는 뒤로 좀 더 빼. 카메라에 너무 노출된다.”
그런 식으로 정리를 하고 세팅을 끝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효명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엑시트최효명: 형 저희 곧 도착해요 (엄지척)]
좀 지각해 줘도 좋으련만…….
“부장님, 곧 도착한답니다.”
“그래? 시간 잘 맞춰 오네. 맘에 들어.”
아…… 조금 쉬고 싶은 맘에 지각을 바랐던 나 자신을 탓해야겠다.
서인하 부장이 시계를 확인한 다음 버스에서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저쪽 모퉁이를 돌아 밴 하나가 나타났다. 이윽고 훤칠한 남자 다섯 명이 내렸다.
하지만, 나는 보자마자 태클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좀 그래도 꾸미고 오지 그랬냐.”
이른 시간이긴 해도 홍대는 홍대여서, 사람이 많았다.
얘들은 뭐 연예인 병 같은 게 없나?
“그래도 머린 감고 왔어요.”
효명이가 히죽 웃으면서 나와 서인하 부장에게 인사를 했다. 얼굴을 익힌 이민희와도 인사를 마치더니, 입구를 가리켰다.
“내려가면 될까요?”
“그래요, 내려가시면 됩니다. 카메라 돌고 있지?”
서인하 부장의 지시와 함께 엑시트 멤버들이 빠르게 지하 1층 녹음실을 향해 내려갔다.
극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민들의 눈에 최대한 안 띄게 빨리 행동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멤버들이 전부 사라지자 운전석에서 내린 송일현 매니저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저희도 잘 부탁드려야죠.”
마주 인사치레를 건넨 서인하 부장과 함께 도로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 스튜디오 촬영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걸맞게 오로지 엑시트가 이끈다.
카메라 안에 들어가는 건 오로지 엑시트뿐인 것이다.
메인인 서인하 부장이나 임윤주 작가도 버스 안에서 모니터링을 할 뿐이다.
버스 속 모니터 너머로 엑시트의 모습이 보였다.
“이야, 카메라 봐. 이것도 카메라야?”
“지금 찍히는 건가?”
“여기 녹음실 진짜 오랜만이지 않냐, 효명아.”
“난 얼마 전에 왔지만, 창호 넌 거의 7, 8년 만이겠다.”
다섯 멤버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면이 자연스레 그려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엑시트의 버스-킹> 첫 촬영이었다.
* * *
이번 기회에 엑시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바, 엑시트의 멤버는 각자 특색이 있었다.
우선 효명이. 리더이자 리드보컬로, 작사작곡을 하고 곡 프로듀싱도 가능하다. 엑시트가 그간 발표한 곡들 중엔 효명이가 작사 작곡한 곡도 꽤 됐다. 거기다 프랑스어와 기타 연주 능력자. 어느 모로 보나 아이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메인보컬인 정창호도 효명이 못지않은 능력자였다. 인디신에서 밴드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보컬이었고, 효명이처럼 기타 연주와 작사 작곡 능력이 뛰어났다. <마스크 싱어>에서 3연속 우승을 했을 만큼 실력파다.
그다음, 미국 유학파 출신인 아론은 랩과 댄스, 그리고 막내를 담당하고 있는데, 랩 가사도 직접 한다고 했다. 유학 시절에는 댄스 대회에서 우승도 곧잘 했다던가? 그룹에 합류한 후에는 드럼을 공부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긴 하다.
허민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랩, 댄스 담당인데 고등학교 때까지는 독학으로 베이스를 공부했었단다. 효명이가 잘 친다며 몇 번 실력을 보증했었는데, 미팅 때 확인한 결과…… 음. 독학으로 배웠다는 부분은 콘셉트인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곽기한이란 멤버는 서브보컬인데, 효명이가 인디신에 있던 시절 다른 밴드 소속이었다고 했다. 포지션은 키보드. 데뷔 후에도 종종 인터넷 방송을 통해 키보드 연주 실력을 뽐내기도 했단다.
이처럼 갖은 재주를 지닌 엑시트에게 합주할 기회를 제시해 준 것이다.
굶주린 늑대는 먹잇감을 놓치는 법이 없다.
지금 엑시트도 마찬가지였다. 밴드 음악에 오랜 갈증과 허기를 가지고 있던 그들이 이 기회를 대충 때울 리 없었다.
효명이는 이번 촬영이 결정된 후로 샘플 곡을 몇 개 작곡했다고 했는데, 오늘 그걸 들고 와서는, 멤버들과 맞춰 보기로 했다.
“야, 거기 틀렸잖아!”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
“손목 보호대 있어? 오늘 한번 죽자고 달려도 될 것 같은데.”
[84%]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기획서와 스크립트 위로 확률이 변화하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이제야 원래 콘셉트로 복귀한 엑시트 멤버들은 정말로 즐겁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제작진조차 감성이 움직일 만큼.
“……마이크 더 설치할걸 그랬네.”
“끊을 타이밍이 없잖아. 일단 최대한 잡아 봐.”
뭐…… 몇 명의 아조씨들은 철저히 이성을 지켰지만.
어쨌든 모니터 너머의 다섯 명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어쩐지 이번 기획안을 구상한 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라, 대한 씨. 좀 있으면 울 것 같은데요?”
옆에서 보고 있던 이민희가 내 감개무량한 얼굴을 보고서 놀렸다.
아, 이 분위기 브레이커.
하기야 박주영 선배가 없는 게 다행이려나.
“아, 아니거든요.”
설마 울 것 같은 얼굴이었으랴마는 혹시 몰라 얼굴을 쓸어내리며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예정했던 촬영 시간을 훌쩍 넘겨 가는 중에도 엑시트의 합주는 계속 이어졌다.
한참을 연주한 끝에야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괜찮은데? 이 곡으로 콜?”
“난 좋아.”
“좋은데? 랩은 좀 더 넣어도 되지?”
“창호, 넌?”
“……그래, 뭐. 나쁘지 않네.”
다소 시크한 멤버 창호의 콜 사인과 함께, 첫 번째 곡이 정해졌다.
그렇게 촬영 종료.
서인하 부장과 임윤주 작가도, 그리고 다른 제작진 모두 촬영 결과에 만족했다.
[88%]
첫날 촬영 종료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순간, 확률도 90%에 근접했다.
하지만…… 나는 확률까지 봤음에도 무언가 기분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뭔지 모를 허전함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분명, 촬영 도중 모니터를 통해 촬영을 감상할 때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촬영이 종료된 순간이 되니 막상 느낌이 달랐다.
……왜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