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안전 주의
모든 가수가 그렇지만, 데뷔 후에는 컴백과 활동을 반복한다.
아이돌은 그 사이클이 유독 빠르다.
싱글이건 정규건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약 3주간 방송 활동을 하면, 이후에는 휴식 차 개인 활동을 하고, 다음 앨범을 준비해 3~6개월 만에 컴백을 한다.
물론 연차가 쌓일수록 1년에 1번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는 모양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지난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엑시트의 경우는 연차가 제법 됐지만, 뒤늦게 이름을 알린 터라 사이클이 빠른 편이라고 했다.
거기서 효명이와 친해지면서 좀 더 알게 된 것들이 있는데, 아이돌들이 보통 컴백 준비를 2~3개월 전부터 한다는 거였다.
컴백 앨범에 수록될 곡이 뽑히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있고, 녹음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최소 1, 2개월은 필요하다고 했다. 거기에 뮤비 등 콘셉트 영상 촬영 기간까지 대강 1개월이라고 했다.
그래서 엑시트의 컴백에 최소 두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50일이라니?”
“예상보다 좀 빨라졌어요. 들어 보니 직소나 맨식스 같은 그룹들도 컴백 준비를 하고 있다더라고요.”
하긴.
우리가 후보군으로 잡은 그룹 전부가 사실상 엑시트로서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엑시트가 조명을 받기 시작한 건 최근 일이라 아무래도 다른 굵직한 그룹들과 비견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컴백 시기를 앞당긴 모양이었다.
와…… 생각지도 못한 난관인데, 이거.
“타이틀은 나왔는데, 수록곡들은 아직 한창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효명이가 몇 개 곡을 주긴 했는데 아직 회사 차원에서는 결정이 안 났습니다.”
“형도 들어 보실래요?”
지난 효명이의 솔로 데뷔에도 내가 관여했었다는 건 송일현 매니저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곡을 들려주겠다는 말에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은 기뻤지만, 아쉽게도 지금 나한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효명아, 내가 급해서 본론부터 말할게. 엑시트 컴백 리얼리티, 같이 해 볼 생각 없어?”
다른 수가 없었다.
“컴백 리얼리티요? 진짜요?”
“그런 제안일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스마트폰 너머 효명이와 송일현 매니저의 목소리가 대번에 어두워진다.
“너무 급박하지 않을까요?”
“방영 일정도 있을 텐데…… 그게 저희 일정과 맞을지부터가…….”
쉽게 결정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더욱이 내 생각보다도 일정이 촉박한 상황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매니저님?”
내 말에 효명이와 송일현이 스케줄을 확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효명이 스케줄 끝나려면 저녁 10시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회사로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매니저님도 괜찮으실까요?”
이 업계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은, 시간 대중이 없다는 것이다.
10시면 대부분 회사원이 퇴근할 시간이지만, 방송사나 연예 기획사 입장에선 그냥 비는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스피커 모드를 통해 송일현 매니저의 답변이 돌아왔다. 어쩐지 부담스럽다는 감정과 마지못해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에휴, 알겠습니다. 전에 약속드린 것도 있으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혹시라도 일정에 변동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다. 기획안을 정리했으니 좀 여유가 생길까 싶었는데, 확률부터 엑시트 컴백 스케줄까지. 머리는 복잡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대장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서인하 부장의 자리를 슬쩍 봤지만,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부장님한테 혹시 연락 없었나요?”
이민희에게 묻자, 그녀가 사무실을 한차례 둘러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작가님도 늦으실 거랬어요. 부장님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고친 기획서를 서브 PD에게 컨펌 받은 후에, 나는 제작부장실로 찾아갔다.
제작부장실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라, 막상 문앞에 서자 긴장이 됐다. 한숨을 푹 쉬고 노크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안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카메라팀하고 좀 안 싸울 수는 없나?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서인하 부장이 호통을 치고 있었다.
“제가 싸우고 싶어서 싸우나요? 해 달라는 대로 안 해 주니까 그렇죠.”
얼레? 대답하는 쪽 목소리가 왠지 낯이 익은데. 이 폐부에서부터 느껴지는 아니꼬운 말투는…….
“그게 가능한 일정이어야지 해 줄 거 아냐? 기존 스케줄을 일주일이나 당겨 달라는 사람이 문제이지 않나!”
“카메라팀이 그러라고 있는 거죠. 정말이지, NBS 시스템이 이런 줄 몰랐습니다. 차라리 외주 쓰겠습니다. 업체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서인하 부장에게 쏘아붙인 대상이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현준영이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난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흠.”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남겨 놓은 채, 그가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요새 <당잠사> 시즌4 때문에 방송사 내부에서 이곳저곳 트러블을 만들고 있었다.
기존 제작진이 전부 하차한 데다 출연진 섭외에도 난항을 겪고 있다 보니 꽤 고생을 한다는 모양이었다.
하차한 제작진 중 1인으로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사실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니 되레 가려운 곳을 긁었을 때의 기분도 들었다.
속 시원하네.
“강 PD. 여기서 뭐 하냐?”
잠깐 현준영이 사라진 곳을 보는 사이, 부장실에서 나오던 서인하 부장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안 그래도 곧 내려갈 거였어. 무슨 일 있어?”
“예, 부장님. 중요한 일입니다.”
“들어와.”
서인하 부장님이 손짓했고, 나는 부장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책상에 앉는 서인하 부장에게 수정한 기획서를 내밀었다. 그는 찬찬히 훑으며 검토한 끝에 말했다.
“잘 정리했네. 필요한 부분은 다시 보충하는 걸로 하고. 그래, 무슨 일이지?”
서인하 부장도 고작 기획서 수정 컨펌받으려는 행동이 아닌 줄은 빤히 알고 있었다. 하기야, 2년차 주제에 부장실에 찾아올 정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터.
“그게…… 문제가 좀…….”
그렇게 운을 떼고선, 나는 좀 전 통화한 내용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이야기를 듣던 중, 남은 기간에 대해 듣자, 결국 그도 인상을 찌푸렸다.
“50일?”
그가 벽에 걸린 달력을 한차례 일별하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팀이야 꾸려졌다지만, 가능하겠어?”
“……일단 이야기를 나눠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뭐. 이야기는 해 봐야겠지만…… 그쪽 회사 입장도 있을 텐데.”
서인하 부장이 기획서를 톡톡 두들기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만져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늘 밤이면 난 동석 못 해. 편성 회의가 아마 길어질 거야. 혼자 갈 수 있겠어? 다른 PD라도 붙여 줄까?”
“아니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어차피 이 기획에 대해서는 제가 제일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메일로 이 기획서 먼저 보내 주고 만나러 가. 이야기되는 대로 바로 연락하고. 시간 상관 말고.”
“예.”
혹시나 50일이면 너무 촉박하니 아이템을 바꾸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일단 만나 보고 오라고 하니, 정신없고 마음이 무거운 와중에도 기분은 좋았다.
어쨌거나, 허락은 받았고…… 밤 10시 미팅이 관건일 것 같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민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이민희와 다른 팀원들도 눈을 크게 떴다.
선배 PD가 물었다.
“서 부장님은 뭐래?”
“가서 만나 보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하자 이민희가 거들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아닙니다. 혹시 틀어질지도 모르는데, 저 혼자도 충분해요.”
감사한 말이었지만, 혼자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무리하게 부탁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초조한 와중에 시간을 보냈다. 아이템이 폐기된 건 아니어서, 버스킹 촬영을 할 후보군 사진 자료를 찾아보며 장소를 추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9시. 이제 나서야 할 때였다.
택시를 타고 플래티넘을 찾아가는 동안, 그저 손에서 식은땀이 날 만큼 긴장되었다.
“저 왔어요, 형.”
조금 일찍 도착해 플래티넘 1층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자, 스케줄을 마친 효명이와 송일현 매니저가 나타났다.
익숙한 듯 카페 사장에게 인사하면서 들어온 그들은, 내 맞은편에 앉으면서 곧장 본론을 꺼냈다.
“방영은 언제쯤 생각하고 있으세요?”
“그게…… 아직 편성이 확정되진 않았어.”
송일현 매니저가 한마디를 붙여 온다.
“조정 가능하다는 뜻으로 알아도 될까요?”
“네, 가능할 겁니다. 아마도.”
자신 없긴 하지만, 편성부와 싸우는 당사자는 서인하 부장. 제작부장이니 편성하는 게 어렵진 않을 거다.
나는 출력해 온 기획안을 내려다보았다.
[52%]
확률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였다.
어쩌면 플래티넘 측에서 이 버스킹 기획을 제대로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역시 설득이 필요할 것 같다.
“기획안에 안 적힌 것들은 일단 구두로 설명할게. 솔로 싱글 준비할 때, 홍대 그 녹음실에서 만난 날. 기억해?”
“그럼요. 필름 끊어지기 직전까지 마시긴 했지만, 정말 좋은 날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때 들은 말 덕분에 내가 이 기획안을 작성할 수 있었어.”
효명이는 고등학교 때 밴드 활동을 했다.
지금 엑시트의 멤버 중에는 그때 만난 멤버들도 있다.
즉, 엑시트는 작사 작곡 능력과는 별개로 악기 연주와 밴드 합주의 능력까진 갖춘 아이돌인 거다.
“그 매력을 충분히 살릴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의 아이돌 리얼리티와는 차별된 콘셉트를 해 보자는 데서 출발한 게 이 기획입니다. 물론 엑시트는 지금도 충분히 잘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해 나갈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매력을 발굴하는 게 나쁜 건 아니고, 그렇게 매력이 추가되면 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송일현 매니저를 향한 거였다.
송일현 매니저, 나아가서는 플래티넘을 설득하지 못하면 어차피 이 프로젝트는 진행할 수 없다.
[53%]
판단이 주효했나 보다. 수치가 소폭 상승했다. 고작 1%지만, 확률이 오른 것이다.
“효명이의 작사 작곡 능력이나, 밴드 음악에 대한 가능성은 지난 솔로 싱글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효명이 싱글뿐 아니라, 엑시트로도 그런 매력을 발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저희도 충분히 압니다만…….”
“저는 재밌을 것 같아요. 근데…….”
효명이는 그나마 프로그램 자체에는 긍정적인 입장인 듯했지만, 결론은 송일현 매니저와 같았다.
“역시…… 그동안 회사에서 진행한 컴백 프로젝트를 틀어서까지 이 방송에 실어야 할 의미는 아직 크게 못 느끼겠어요.”
“저도 그 점이 가장 걸리긴 해요. 컴백 콘셉트가 사실 거의 정해졌거든요. 이전에 들려 드렸던 정적인 댄스곡, 기억하세요?”
“네 솔로 싱글에 실으려던 그거? 그러고 보니 그건 싱글에 안 실었지?”
“네. 그 곡이 타이틀이 될 거예요. 안무도 거의 다 나왔구요.”
역시나.
컴백까지 50일이 남은 시점에서, 컴백 콘셉트 등이 정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안무까지 거의 다 뽑혔다면, 이제 안무 연습에 뮤비 촬영, 앨범 재킷 촬영까지 쭉 이어지는 일정이라는 걸 텐데.
이 상황에서 버스킹 콘셉트의 리얼리티를 통해 컴백을 하려면, 콘셉트부터 모조리 갈아치워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방송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이런 일에 경험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말을 뱉어 보겠는데, 나한테는 그게 영 어렵기만 했다.
서인하 부장이 말해 준 대로 다른 선배랑 같이 왔어야 했나. 아니면, 이민희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자꾸만 손에 땀이 배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그때였다.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송일현 매니저가 스마트폰을 들고 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 틈에 효명이가 대뜸 말했다.
“형. 사실 전 하고 싶어요.”
효명이는 상체를 내 쪽으로 들이밀면서 말했다.
“솔로 준비하면서 다시 기타 만지고 그랬더니…… 예전 기분이 살아나더라고요. 멤버들도 흥미 있어 하고. 하지만…….”
그렇게 뜸을 들이던 효명이는 미안하다는 듯이 뒷말을 붙였다.
“그런데 그게 우리 의견만으로 되나요. 회사 입장도 있고. 회사에서는 이번 컴백까지는 안전하게 가자는 주의라서요.”
엑시트의 이름값이 높아지긴 했지만 고작 1년 사이의 일일 뿐.
다른 보이그룹들만큼 탄탄한 인지도를 가졌다기엔 이른 감이 있다.
플래티넘이 안전 주의를 내세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효명이까지도 저렇게 말한 이상, 나로서는 더 이상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화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방안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AGD앱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저번에 AGD앱 없이 서인하 부장과 임윤주 작가를 설득해 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 내부 사람인 데다 그 두 사람이 나를 테스트한 거라는 점도 있었다.
회사 내부 사람이 아닌 외부의 업체를 설득하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구나.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러는 사이, 송일현 매니저가 돌아왔다.
“아쉽지만, 아무래도 이 건은 거절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도 컴백 리얼리티를 찍고야 싶지만…… 빨리 곡들부터 완성하라고 회사에서 난리네요.”
아, 아무래도 회사 전화였던 모양이다.
확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겨우 2% 올려놨더니, 이젠 아예 바닥으로 수직 하강을…….
[61%]
……뭐지?
무의식적으로 눈을 기획안 쪽으로 돌리는데, 놀랍게도 확률이 상승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