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31화 (31/200)

31화 리얼리티 프로젝트

일정 프로그램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PD들처럼, 소속 없는 작가들도 지원 형태로 여러 팀을 돌아다닌다.

이민희도 <당잠사> 팀을 나온 후, 나처럼 유랑민 생활을 시작했는데 지난주부터 프로젝트 형태의 팀에 소속되었다고 했다.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아이돌 리얼리티요.”

“네?”

적성을 살릴 기회라더니, 웬 아이돌 리얼리티?

하지만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또 놀라고 말았다.

“메인은 서인하 부장님이에요.”

“부장님이 직접요?”

서인하 부장은 제작부장이라서, 예능뿐 아니라 드라마 등도 총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출신이 예능이다 보니 예능 총괄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지만…… 어쨌든 직접 메인 PD를 맡는 경우는 없었다.

“인력이 없잖아요.”

그 이유를 이민희는 간단히 설명했다. 하긴, 제작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진 데다 채널도 늘어난 상황. 그만큼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서인하 부장도 오랜만에 일선에 투입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일단 프로젝트성으로 구상하다가, 본격적으로 진행하자고 결론이 나서 팀원을 모집하고 있어요.”

이민희는 나에게 기획안을 넘겨주며 말했다.

“아이돌 하면 역시 대한 씨잖아요. 여기에 합류해 주면 분명 다른 분들도 반대할 리는 없을 거예요. 특히 서인하 부장님은 더.”

아직 명함도 못 내미는 신입 주제에 제작부장 앞에서 메인 PD를 들이받았으니,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서인하 부장은 사실 맺고 끊음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 결코 그때 일로 트집을 잡는다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잘 봐준다면야 나도 좋긴 한데…… 아이돌 하면 나라니?

“언제부터 아이돌 하면 저였나요…….”

“<당잠사>부터?”

아니, 내 필모가 당장 <당잠사>뿐인데……?

하지만 이민희는 마이 페이스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일단 기획안을 넘겨 보았다.

어째 초안이라고 못 박는다 싶었는데, 말 그대로 여러 가지 리얼리티 프로그램 소재를 구상해 뒀을 뿐인 자료였다.

무엇 하나 확정된 게 없는 모양이다. 아, 딱 하나 있었다. 편성 시간.

토요일 밤 10시. <뮤직스케치>가 11시 시간대인데, 바로 그 앞이었다.

“정말 초안이네요.”

이건 뭐, 초안 중에서도 초안.

‘아이돌을 데리고 와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는다’로밖에 요약할 거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본격적으로 진행해도 된다는 판단이 들어서 팀원을 모집한다는 건 아니었습니까?”

“그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이게 무슨 어른의 사정도 아니고……. 요즘은 피라미드도 이렇게 사람 꼬드기진 않을 텐데.

뭐, 잔뜩 투덜댔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기획안에는 아이돌 후보군 목록도 있었는데, 그중에 엑시트가 있었다.

이민희가 나를 염두에 둔 건 분명 그래서였으리라.

“어때요? 혹하지 않아요?”

내가 후보군 페이지를 확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민희가 훅 찔러 왔다.

난 솔직히 대답했다.

“회의가 언제라고요?”

팀원 모집은 약 3일 동안 이어졌다.

사흘 후 회의실.

이민희와 함께 자리에 앉은 나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아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윽고 통성명이 끝날 즈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서인하 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 오래 기다렸나?”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는 투로 인사한 그가 비어 있던 상석에 앉았다.

“다들 기획서는 읽어 봤나?”

그러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읽어 보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던데요.”

그렇게 태클을 건 사람은 이 팀의 메인 작가를 맡은 임윤주 작가였다.

나야 작가들을 잘 모르는 편이라 이번이 처음 보는 거였는데, 이민희 말로는 우리 방송사에서 굵직한 예능들을 맡아 온 사람이랬다. 특히 음악 방송 관련 경험이 많아서 불려 왔다고.

“앞으로 정해야지. 그러라고 임 작가를 데리고 온 건데.”

“아니, 제가 한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죠. 하다못해 후보군이라도 좀 더 추려야죠.”

백만 아이돌 시대답게 톱 급 아이돌만 따져도 수십이다. 그런 만큼 우리 프로그램의 후보군도 꽤 많았다.

컴백 예정이 있는 그룹만 추렸는데도 열댓 팀 가까이 됐다.

“아무리 초안이라지만 이렇게 해서는 프로그램 콘셉트도 제대로 못 잡는 거 아시잖아요.”

임윤주 작가도 꽤 말이 와일드했다. 저게 짬밥의 힘인지, 작가란 직업의 종특인지 알 수가 없다.

“알아. 그래서 내가 준비해 왔지. 이 자리에 왜 늦었겠어?”

서인하 부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뒤쪽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휘갈겼다.

1. 직소

2. 데이불릿

3. SNS소년시대

4. 엑시트

5. 맨식스

“어때?”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돌아보지만, 회의실의 모두가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요?”

“후보군을 다섯 그룹으로 추려 봤다고. 원래는 네 그룹으로 압축하려고 했는데, 듣자 하니 맨식스도 곧 컴백한다고 하더라고?”

맨식스는 최근 주가가 오르고 있는 짐승돌 콘셉트 보이 그룹으로, 매 무대마다 옷을 찢기로 유명했다.

그 이름이 언급되자 눈을 반짝이는 여성 팀원들이 몇 있었다.

“헉, 진짜 컴백하나 보네?”

옆자리의 이민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그녀조차도 모르고 있던 소식인 모양이다.

“엑시트도 아직 피셜은 아닌데…… 대한아, 컴백한댔지?”

서인하 부장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곡 작업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 거기 리더인 최효명이 최근에 솔로로도 대박을 냈으니까, 시기적으로도 괜찮을 것 같고.”

‘브레이브’. 결국 솔로 앨범 타이틀로 확정된 그 노래는 정말 대박이 났다. 단정한 이미지의 효명이가 정통 록 밴드의 음악을 타이틀로 삼았다는 것부터가 화제가 되었고, 노래도 괜찮아서 단숨에 차트 1위를 거머쥐었다.

내가 딱히 한 건 없지만 그래도 친한 동생이 그렇게 잘나가 주고 있으니 뿌듯하긴 했다.

“강 PD님이 최효명과 친하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인가 보네요?”

임윤주 작가가 나를 보고 하는 말에 괜히 침을 삼켰다.

빨간 안경테가 눈에 띄는 임윤주 작가는 역시나 말투가 꽤 까칠했다.

“강 PD는 저 다섯 그룹 중에 누구를 하고 싶어요? 당연히 엑시트?”

뭐지…… 떠보는 건가.

“그래, 대한아. 너는 어느 그룹으로 하고 싶어?”

서인하 부장도 물어 왔다. 그러니 절로 모든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입사 때 압박 면접을 보던 기분이 되살아날 지경이었다. 다만, 그때처럼 떨리진 않았다.

“예. 엑시트가 좋을 것 같습니다. 해 보고 싶은 기획도 있습니다.”

“해 보고 싶은 기획?”

오늘은 아이돌 리얼리티 팀의 첫 미팅. 모두가 저마다의 자료를 가지고 오긴 했지만, 기획을 가지고 온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춧돌조차 놓이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무슨 기획인데?”

나보다 선배인 PD들도 있는 자리였지만 서인하 부장은 거리낌 없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미리 뽑아놓은 기획안을 서인하 부장, 임윤주 작가를 비롯한 팀원들에게 주욱 돌렸다.

“노트북 연결해도 되겠습니까?”

서인하 부장이 허락하고, 나는 그들이 기획안을 살피는 동안 프로젝터에 내 노트북을 연결했다.

이민희가 재빠르게 회의실 불을 끄고 스크린을 내렸다.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참 편했다.

PPT를 스크린에 띄운 뒤 이야기했다.

“제가 준비한 기획은 ‘버스킹’입니다.”

* * *

효명이의 ‘브레이브’를 처음 듣게 된 그날.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엑시트의 결성 당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밴드였다고, 원래는?”

“네. 밴드 경험이 있던 멤버가 저까지 세 명이었거든요. 근데 결국 무산됐어요. 아무래도 중소 규모 회사에서 밴드 콘셉트를 시도하기엔 상업적 리스크가 커서요.”

그래서 댄스 그룹으로 데뷔하게 됐단다.

그런데 이민희한테서 기획서를 받고 검토하는 순간, 그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 것이다.

엑시트가 원래는 밴드였을 수도 있다.

효명이를 비롯해서 멤버들이 악기를 다룰 줄 안다.

단지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이어졌다. 그 결과, 나는 기획안을 짜 보기로 했다.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젝트는 어쩌면 엑시트에게 정말 가뭄에 만난 소나기 같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엑시트가 우리 팀에 단비 역할을 해 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엑시트 컴백 리얼리티 <버스킹(가제)>』

스크린에 뜬 기획안.

테마는 엑시트의 컴백 버스킹. 컴백 싱글을 준비하는 동안 엑시트가 버스킹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

그 과정에서 멤버들의 라이브 연주, 합주, 가창력 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새로운 매력을 이끌어 낸다.

지금껏 아이돌의 리얼리티 중에서 미션으로 버스킹이나 공연을 한 건 많았다. 하지만 버스킹 자체를 메인 테마로 삼은 적은 아직 없었다.

“우리 NBS-M은 음악 채널 중에서도 후발 주자입니다. 그만큼 신선한 기획을 보여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댄스 그룹이라는 인식이 강한 아이돌에게 버스킹을 시켜서 새로운 매력을 보여 주면, 프로그램의 화제성 면에서도 좋은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직소가 좋아요.”

그때, 임윤주 작가가 내 기획안을 덮으면서 나를 보았다.

“개인적 팬심도 있긴 하지만, 안정적인 시청률도 중요하거든요. 부장님, 이 리얼리티 프로젝트를 한 번으로 끝낼 건 아니죠?”

“물론. 파일럿이지만, 이걸로 자리를 잡아서 <뮤직스케치>랑 연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야.”

그러기 위한 시간대 편성이다. 그래서 서인하 부장이 직접 메인이 된 것이고.

<뮤직스케치>는 스타들의 라이브 무대를 콘셉트로 하고 있기에, 무대 위의 모든 것, 다시 말해 가창, 연주 등이 전부 라이브로 이루어진다.

아이돌은 사실 일반 가수보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태생적 한계다.

하지만 이 리얼리티 프로젝트가 <뮤직스케치>와 연결이 된다면?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드러낸 아이돌이 <뮤직스케치>를 통해 라이브 무대로 컴백한다?

우리 NBS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고, 황금 시간대를 연달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돌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는 거다.

그러니 임윤주 작가는 안정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엑시트가 최근 주가를 올리고는 있지만, 직소만큼 팬덤이 넓고 안정적이진 않아요. 아이돌 리얼리티는 무엇보다 팬덤에 먼저 먹히는 구성이어야 하는데, 그 팬덤의 풀이 넓은 건 저 후보군 중에선 직소뿐이죠.”

직소는 벌써 7년차를 바라보는 베테랑 아이돌 그룹.

그녀의 말대로 직소의 팬덤만 잡아도 시청률은 떼 놓은 당상일 수 있다.

나도 버스킹 기획을 작성한답시고 아이돌 생태를 집중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반대로 신선한 기획이 나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직소가 그동안 찍은 리얼리티를 전부 체크했는데 여행, 먹방, 관찰 등 안 해 본 콘셉트가 없더라고요. 그런 마당에 또 직소의 리얼리티를 내면, 시청자들이 피곤해할 겁니다.”

“그게 잘못 생각한 거죠. 시청자들은 피곤해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먼저 생각할 건 시청자들이 아니라 팬덤이에요. 그게 아이돌 예능의 포인트라고요.”

“…….”

“왜 굳이 신선해야 하죠?”

임윤주 작가가 매우 냉철한 눈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 리얼리티 프로젝트의 기본은 안정성이에요. 첫 주자로 잘 자리를 잡아서 시즌이 지속되게끔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거죠. 신선함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위험함이에요. 그 위험함을 끌어안고서 시작하는 건 너무 부담스럽지 않나요?”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팬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안정성.

<뮤직스케치>와의 연계도 그렇거니와, 시즌을 이어 가고자 한다면 그만큼 좀 더 안정적인 기획이 훨씬 어울린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안정적인 대중성으로 대중에게 먹혀야 하거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인하 부장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임윤주 작가와 비슷한 눈매를 하며 나를 보았다.

“강 PD. 이 엑시트 버스킹 기획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게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먼저 내뱉더니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리얼리티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만한 기획일까? 직소를 캐스팅하는 것보다?”

뭐랄까.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나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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