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27화 (27/200)

27화 반발

멍해진 기분으로 회의를 마쳤다.

회의는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수정점들을 잡고, 거기에 대해 몇 가지 더 이야기가 더해지고…… 그걸 다 받아 적고 났더니, 내가 뭘 적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현 PD는 나 좀 보지.”

“……예.”

회의 내내 기운이 없어 보였던 현준영은 서인하 부장과 함께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제야 회의실에 퍼져 있던 묘한 긴장감이 방 밖으로 함께 빠져나가는 듯했다.

“대한아.”

권민헌 PD가 앉은 자리에서 턱을 빼 나를 불렀다.

“잘했다.”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 행동에 머쓱해져서 코밑만 긁고 있자니, 옆자리에 있던 박주영 선배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뭐하냐, 인사 안 하고.”

“아. 네.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주제를 넘은 것도 사과드립니다.”

어쨌든 그간 나는 선배들의 기분 같은 건 관심도 없이 안하무인으로 굴긴 했다.

확률을 본다는 이유 하나로 나 자신을 과신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더욱이 그런 이유로 인한 괜한 호승심으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생겼고, 그래서 다들 고생했다.

나를 직접 도와준 박주영 선배와 이민희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의 공백을 현준영에게 들키지 않고 메워 준 다른 선배들도 고생을 겪었다.

앞으로는 제발 좀, 더욱 생각하며 움직여야겠다고, 지금 또 반성했다.

“폐 끼치긴. 저렇게 멀쩡하게 잘 만들어 왔잖아. 오히려 도움 준 일이지. <당잠사>는 원래 저렇게 만들어야 하는 방송이야. 주제넘은 건…… 뭐, 천하의 수정이 앞에서도 그랬는데.”

유수현 작가가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수정 PD의 이름이 언급되니 왠지 코가 간지러웠다.

의식하면서 편집한 게 사실이었다.

방수정 PD가 쌓아 온 <당잠사>의 포인트를 살리고 싶었는데, 그걸 인정받은 거니까.

왠지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수정하자. 빨리 넘겨야지.”

권민헌 PD가 적당한 상황에서 내 정신을 붙들게 도와줬다.

하긴, 현준영이 돌아왔다가 어떻게 또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나는 허겁지겁 아까 적어 두었던 수정점을 정리했다. 그걸 권민헌 PD에게 전달하자, 그가 나를 얼빠진 놈 보듯 보았다.

“나더러 네가 싼 똥 치우라 이거냐?”

“와, 최고 선배한테 막 일 시키고 그러네, 이제.”

권민헌 PD에 덩달아 박주영 선배도 옆에서 농담을 던져 대고, 다른 팀원들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반성한 지 1시간도 안 지나서 또 저질러 버렸다!

“아, 그게 아니고…….”

“하여간, 주제넘는 놈. 빨리 따라오기나 해. 편집실 비워 놨어.”

이러다 강주제라는 별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더욱 조심해야지.

결국 나는 권민헌 PD와 함께 편집실로 들어갔다.

편집에 관해서만은 방수정 PD도 한 수 접어주는 게 권민헌 선배였다.

우리 팀에서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기술을 가진 그와 하루를 꼬박 새우는 동안, 나는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이런 재능을 가진 괴물이 서브 PD라니.

방송국에서 입봉하는 게 왜 하늘의 별따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충격과 반성과 배움으로 점철된 하루를 꼬박 보낸 끝에.

[100%]

기어코 ‘100%’라는 수치를 보게 되었다.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수많은 변수와 확률 변동 수치가 평가됩니다.]

[1,000P가 적립됩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4,643P/2,143P]

다 지친 몸으로 원룸으로 돌아와 잠들기 직전 확인한 AGD 앱은, 두 번째로 획득한 ‘1,000P’를 확인시켜 주었다.

“50% 가까이 올려도 이 정도 포인트인가……. 아, ‘상점’ 확인 못했네.”

그러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나는 무의식에 잠기듯이 48시간 만의 숙면에 빠져들었다.

* * *

최종 확정된 5화가 편성부로 넘어갔고, 일요일 9시에 무사히 방송되었다.

다음 날.

『<당잠사> 시즌3 5화 방영, 시청률 14.7%!』

『<당잠사> 시즌3 시청률 소폭 상승!』

『시청자 호평 속에 방영된 5화, 예전 재미를 되찾다!』

―필리핀 맨날 스콜 오는 동네인데, 비 오는 것도 상정을 안 한 거임?

―했겠지. 방구석 먼지 같은 너도 아는 걸 제작진이 몰랐을 거 가틈?

―ㄴㅋㅋㅋㅋㅋㅋㅋ 사이닼ㅋㅋㅋㅋ

―류준혁 멋있더라. 역시 짬밥이 달라서 그런가 생각하는 것도 빠르고

―최효명 빠릿하게 돌아다니는 거 맘에 들었음ㅇㅇ

―그쵸 우리 명리더가 역시 하드캐리!!!!

―ㄴ빠순이그켬...

―ㄴㄴ지능형안티임

―뭐만하면지능형안티타령이야

―리얼하게 다 나오니까 확실히 보기 편했어

기사와 클립 영상에 달린 댓글들도 평이 괜찮았다.

그동안은 너무 꾸며진 편집이라는 의견들이 있었던 반면, 어제 방영된 5화에서는 그러한 평이 사라졌다.

대신 시즌1, 시즌2 같은 예전의 리얼한 재미가 살아났다는 평이 더 많아졌다.

“……그럼 6화도 이렇게 정리해서 가도록 하죠.”

그날 이후.

현준영이 서인하 부장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태도가 훨씬 원만해졌다.

팀원들의 의견을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았고, 자기 고집만 펼치지도 않았다.

여전히 회의 시간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더러 있긴 했지만, 예전보단 훨씬 유해진 태도로 편집회의를 마쳤다.

그러한 태도 변화는 방송에 대한 평가에서도 드러났다.

『<핫이슈> <당잠사> 시즌3 비로소 풍경을 보여 주다

―We’z 서진명 기자

NBS의 대표 예능 <당잠사> 시즌3 필리핀 편이 칠부 능선을 지났다. 영화로 치자면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들어가기 전 숨을 고르는 타이밍. 그 타이밍에 <당잠사> 시즌3 제작진의 선택은 매우 신선했다.

방송 첫 화부터 분명 시청률은 쾌조였다. 다만 각 화별로 호평과 혹평이 반반씩 나뉘었는데, 여행 예능이라기보다는 게임 예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

.

……제작진의 선택은 리얼함으로서 회귀. 본래 <당잠사>가 가지고 있던 매력으로의 귀환이었다. 어찌 보면 시즌2 직후의 방영이었기에 게임 예능으로서의 모습을 택했을지도 모르지만, 시즌3에서 시청자들이 원했던 것은 여행 예능 그 자체였다.

정확하게 시청자들의 기호와 맞아떨어진 지금, 멈춰 있던 시청률도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ㅅ다.

최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기, <당잠사> 시즌3가 폭우라는 돌발상황조차 이겨 내고 어떤 해피엔딩을 맞을지 기대된다.』

위즈의 칼럼이 우리 팀 단톡방에 올라왔다. 5화 사태 이후, 나는 도로 단톡방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당연한 걸 기뻐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쨌든 기뻤다.

칼럼을 올려준 유수현 작가가 한마디 덧붙였다.

[유수현작가: 이 기자 매번 애매한 말만 쓰더니 오랜만에 칭찬만 하네]

[이민희작가: 다음 화 또 틀어지면 바로 욕할걸요]

[박주영선배: 무서운 말이네. 편집 잘하라는 말이지?]

박주영 선배가 옆자리의 나를 툭툭 두들겨 스마트폰을 보게 했다.

“너한테 하는 말이야, 강범람.”

“……크흠.”

[열심히 하겠음다……]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킥킥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더 머쓱해져서 복도 자판기로 도망쳤다.

5화 항명 사태 이후로 주제넘음의 아이콘이 된 나는 권민헌 PD와 붙어서 편집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예상처럼 별명이 생기고 말았다. 강주제. 강침범. 강범람…….

강범람은 박주영 선배가 부르는 별명이었는데, 왜냐고 물었더니 주제 넘치는 강 씨라고, 강이 넘치니까 범람이라나 뭐라나.

별명을 이렇게까지 아재스럽고 고차원적으로 붙여야 하나 싶긴 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어야 할 처지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직 입사 1년도 안 된 막내가 방송본의 편집권을 다루고 있는 거다.

방송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도 의도치 않았던 지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진 않아서, 배우는 자세로 권민헌 선배를 따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러한 갈 곳 없는 의문을 안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서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다소 이상했다.

지금 현준영은 인터뷰 건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

그가 없으면 사무실 분위기는 다소 느슨해지곤 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한 모니터에 모두가 들러붙어 있는 경우는 또 없었다.

뭔 일인가 싶어 나도 그 뒤로 붙어서 모니터를 보았다.

『<인터뷰> <당잠사> 시즌3를 만든 현준영 PD의 선구안―1』

최근 들어 현준영은 여기저기 불려가 인터뷰를 했다.

5화를 지난 시점부터의 일이었는데, 그 인터뷰가 하나씩 게재되고 있었다.

인터뷰 내용은 각 언론사마다 대동소이했다.

현준영이 타사에서 NBS로 이적한 내용, 곧바로 <당잠사>를 맡게 된 내용, 그리고 제작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내용.

다소 시각 차이는 있다 한들,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들이었다.

내용도 뻔히 아는 인터뷰임에도 우리 팀원 전체가 왜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은 뻔했다.

인터뷰 기사마다 보이는 한 가지 공통점 때문이었다.

『Q: 이번 촬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5화에 나왔던 폭우였나요?

A: 맞아요. 필리핀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다 보니, 현지 코디도 비가 그렇게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더라고요. 결국 하려고 했던 촬영은 그날 하나도 진행할 수 없었죠.

Q: 출연진들과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마련하시던데, 방송분도 그 점을 최대한 드러내는 방향으로 편집되었고요.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요?

A: NBS로 오면서 한 가지 목표로 잡은 게 있어요. 그동안의 연출 스타일을 좀 바꿔 보겠단 거였죠. 예전이라면 제작진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을 테지만, 요즘 트렌드는 또 리얼함이잖아요? 분명 시청자들이 그런 점을 원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했어요. 뭐, 기존 제작진들하고 의견이 안 맞아서 5화 전까지는 그런 편집을 시도하지 못했지만요.

Q: 그 판단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네요. 5화부터 시청률이 상승 곡선을 그렸으니까요.

A: 다들 잘 봐주신 덕이죠.』

“이번에도 똑같네.”

유수현 작가가 간단하게 말했다.

“전부 제 자랑이야. 자기가 다 했다는 듯, 우릴 까 내리고.”

연출책임이라는 자리가 원래 그렇긴 하다더라.

잘하면 자기 덕, 못하면 자기 탓.

하지만 현준영은 잘하면 온전히 자기 덕. 안 풀리면 나머지 탓이었다.

이번만이 아니라, 이 앞에 올라온 다른 인터뷰들도 같았다.

“질리게 하는 인간이네, 정말.”

유수현 작가가 그녀답지 않게 날카로운 어투로 말하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일들 안 하고 뭐해요?”

현준영이었다. 어디선가 인터뷰를 하고 들어온 사람답게 깔끔한 정장과 정리된 헤어스타일이 돋보였다.

그가 우리가 모여 있던 모니터를 한번 스윽 보고는 흐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올라왔나 보네요. 네 편짜리라고 하니까 이번 주 계속 올라올 거예요. 올라오는 거 확인하면 나한테 이야기 좀 해줘요.”

“……네.”

권민헌 PD가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현준영이 수첩을 꺼내 밖을 가리켰다.

“이번 주 가편집 나왔죠? 모니터링 들어가죠.”

우리는 모두 부산스럽게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그 와중에 공통적인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오로지 현준영뿐이었다.

* * *

8화.

9화.

그리고 최종화까지.

방송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시청률도 계속 15%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주 마지막 촬영이 있었다.

그곳에서 중대 발표가 있었다.

“시즌4 제작이 확정되었어요.”

현준영이 뿌듯한 얼굴로, 출연진들 앞에서 그렇게 밝혔다.

“여러분 회사에도 조만간 연락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렇다고 이번 시즌처럼 급한 일정으로 진행되진 않을 겁니다. 대략 내년 초 정도이니까, 그때도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흐뭇하게 웃는 그 얼굴에 출연진들도 웃으면서 화답해 주었다.

최종화가 방영된 날에는 회식이 있었다.

방송사 근처 고깃집을 빌려서, 9시부터 시작하는 최종화를 모두가 함께 시청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현준영이 온 이후로 제대로 회식 자리를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팀원들이 따로 가거나, 현준영이 윗선을 만난다고 빠지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 자리에서 현준영은 꽤 붉어진 얼굴이었다.

듣자 하니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라 하던데, 그의 옆으로 빈 소주병이 꽤 여러 병이었다.

“다들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워요.”

그가 소주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당잠사>가 다행히도 시즌4 제작이 확정되었어요. 처음에 올 때는 분명히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고, 여러분을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다음 기획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가 잔을 높이 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다음 시즌도 잘 맞춰서 해 봅시다.”

현준영은 그렇게 말하며 모두가 잔을 들길 기다렸다.

그래야 했는데,

“…….”

묘한 분위기가 테이블에 흘렀다. 같이 자리해 있던 서인하 부장이 잔을 들고 있다가, 그 분위기를 읽고 고개를 돌렸다.

“건배 안 할 거야?”

“한 말씀 드릴게요.”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유수현 작가가 일어섰다. 입구 근처의, 작가진이 모여 있는 테이블이었다.

유수현 작가가 일어나자, 작가진 전원이 약속이나 한 듯 굳은 시선을 현준영에게 던졌다.

그녀는 시끄러운 고깃집 내에서도 모두가 듣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다음 시즌 안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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