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26화 (26/200)

26화 대면

퍼뜩 고개를 쳐들자 서인하 부장이 보였다.

참 동선이 안 겹칠 것 같은 사이인데, 은근히 자주 마주치게 된다.

방송국과 이렇게 멀리 떨어진 카페에는 무슨 일일까.

미팅이라도 한 걸까?

“넌 여기 왜 있어. 너희 팀 전부 회의 들어간다던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일어나려던 참입니다.”

노트북을 닫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가 고개를 빼며 내 노트북 화면을 확인했다.

“편집 중…… 이냐? 편집실 못 잡았어?”

내가 티저 편집을 맡아서 진행한 건 서인하 부장도 알고 있다.

다만, 요번 시즌에서 클립 영상은 다른 선배가 책임지고 있다. 본방이 시작된 이상 내가 편집할 만한 게 없는 상태지만, 나는 구태여 말하지 않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지, 네가 왜 여기서 편집을 하고 있지?”

아, 걸렸다.

서인하 부장도 모르진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는 아예 내 테이블 맞은편에 의자까지 빼고 앉았다.

“노트북 다시 열어 봐.”

“그게…….”

“열어.”

서인하 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짧은 두 음절에 서린 위엄이 시베리아 벌판 같았다.

이게 산전수전 다 겪은 부장 파워인가.

난 다시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다. 이윽고 조금 전까지 켜 뒀던 편집 프로그램을 서인하 부장에게 보여 주었다.

모르는 이라면 몰라도, 서인하 부장이 그 프로그램 속 영상이 본방임을 모를 리가 없다.

터치패드로 영상을 앞뒤로 돌려보던 서인하 부장이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보았다.

“5화 같은데, 이걸 왜 네가 편집하고 있지? 그것도 이딴 곳에서?”

“…….”

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슬이 퍼렇다.

방수정 PD님은 도대체 이런 분한테 어떻게 소리치고 대든 걸까.

차라리 AGD로 확률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

“대답하기 힘들면 하지 마.”

순간 그 말만 들었을 땐 안도의 한숨이 나올 뻔했다.

“지금 내가 회의실에 가서 직접 확인할 테니까.”

아, 망했다. 한국 말은 역시 끝까지 들어야 한다니까.

서인하 부장이 빤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결정권이 없는 나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한숨을 참고 이야기했다.

“사실 지난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서인하 부장에게 편집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최대한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내가 위계질서를 깼다는 점을 설명했다.

덧붙여 현준영 PD가 기회를 준 거라고 이야기했다.

말하다 보니, 그나마 이 자리에 박주영 선배와 이민희가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둘까지 이 노트북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봤다면, 서인하 부장이 뭔 말을 했을까.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듣던 서인하 부장이 한 번 더 영상을 앞뒤로 돌려보았다.

이번에는 간단히 훑어보는 게 아닌, 진지하게 흐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난 그 옆에서 괜히 궁색해졌다. 그래서 미지근해진 커피만 쭉쭉 삼켰다.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시커멓고 쓴 게, 꼭 사약 같았다.

다소 시간이 흐른 뒤, 서인하 부장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뗐다.

“여기 이 장면, 다음 신으로 넘어가는 게 조금 어색한데? 중간에 무슨 장면이 있었냐?”

“그게…… 현준영 PD님이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PD님이 얼굴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걸 사양하셔서 좀 빼다 보니까, 신끼리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4화까지 방영분 내에서도 그랬다.

현준영은 화면상에서 본인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꺼려했다.

물론 PD가 출연진도 아니다 보니 화면에 굳이 노출될 필요가 없긴 한데, 요즘 리얼 버라이어티에서는 외려 드러내면서 자연스러움이나 ‘연출되지 않은 상황임’을 제시하는 일이 많긴 했다.

“현 PD가 그런 면에서는 옛날 스타일이라 고집을 좀 세울 만하지…….”

서인하 부장은 한 번 더 영상을 휙휙 넘기면서 보더니,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현 PD. 회의 중이지? 금방 끝나나? 아니야?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은 그가 나를 보았다.

“너더러 편성 확정 전까지 이 영상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네.”

“편성 확정, 내일 아냐?”

“그건…….”

그 말에 외려 내가 당황했다.

오늘은 목요일. 일요일 방송이니까 토요일까지 이틀은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일이라고?

주말 근무를 밥먹듯이 하는 방송사인데, 편성은 워라벨을 고수하나.

내 얼굴이 굳는 것을 보더니 서인하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하나는 알겠다. 서인하 부장은 열받을수록 말이 짧아지는 타입이라는 걸.

그가 먼저 카페를 빠져나갔고 난 허겁지겁 짐을 챙겨 들고 그를 따랐다.

그렇게 쭐레쭐레 따라가 보니, 방송사 건물이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엘리베이터로 갔고, 타자마자 우리 사무실이 있는 층수를 눌렀다.

‘서, 서, 설마……?’

아니나 다를까.

<당잠사> 팀이 회의하고 있는 회의실 안을 살핀 그는 노크와 함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 PPL을 한 번 더…… 부장님?”

노크 소리에 느슨하게 고개를 돌리던 현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 중이던 다른 팀원들도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하는 것을 서인하 부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들어와.”

서인하 부장이 다시 한번 재촉하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강대한……?”

현준영이 나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다 좋으니까 내가 일러바쳐서 모셔온 거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인하 부장은 회의실을 둘러보더니 뒤쪽에 남은 자리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서 앉아.”

답도 필요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그곳에 가 앉았다.

“분명 회의 시간일 텐데 저놈이 카페에서 따로 일하고 있길래 데려왔어. 혹시 문제 있나?”

“아, 그러셨군요. 후배 좀 챙기지, 왜 연락 안 했죠?”

현준영이 짐짓 엄한 시선으로 권민헌 PD를 보며 힐책한다.

대체 저 인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권민헌 PD도 나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참 똥씹은 표정이다가 애써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연락 돌리던 중에 누락된 것 같습니다.”

“뭐, 일단 됐고. 계속 회의 진행해.”

서인하 부장은 던지듯 말을 뱉고는, 빈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현준영은 다소 당황해 날 쳐다보다가 서인하 부장을 다시 일별했다. 그러고는 회의를 속행했다.

“어…… 광고사 측에서 일단 협찬품을 좀 더 늘려 달라고 해서, 방금도 본 장면에 한 번 더 노출이…….”

자리에 앉아서 일단은 노트북을 열어 내용을 받아 썼다.

무슨 회의인가 했더니 PPL에 관련된 회의였나 보다.

편집회의란 게 안건이 참 복잡하다. 개중에는 PPL에 대한 것도 있는데, 우리처럼 예산이 많이 필요한 예능은 PPL 규정으로 골머리를 앓는 일이 잦다.

협찬사와의 계약 사항 이수 문제로 늘 시끄러울 수밖에 없어서인데, 보통은 협찬사의 노골적인 제품 홍보 요구와 방통위의 심의 규정 간의 충돌 때문이다.

이번이 그런 문제.

심의 규정이 허용하는 선에서 제품을 홍보해야 하는데, 막상 시청자들 눈에 너무 광고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 논의 과정이 한 10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음…… 그래요. 이렇게 협상할게요.”

현준영이 재판이 끝나듯 볼펜을 테이블에 톡톡 두들기면서 회의가 일단락되었다.

“끝난 건가?”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서인하 부장이 물었다.

현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서인하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쪽으로 움직였다.

“이게 이번 주 방송본인가?”

“네. 진즉에 넘겼어야 하는데 아직 확정 못한 편집점이 있어서…….”

“늦었다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이게 방송본이고 이 편집본을 대상으로 이런 회의를 하고 있는 거라면, 대한이는 왜 카페에 박혀서 다른 편집본을 작업하고 있었냐는 말이지.”

서인하 부장의 말에 현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중에는 현준영의 굳은 시선도 있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 해명을 요구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으나, 답은 서인하 부장에게서 나왔다.

“이야기는 들었어. 방금 전처럼 핑계를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마.”

그 말에 권민헌 선배도 움찔하는 게 보였다.

괜히 죄송했다.

“대한이의 의견이 있어서, 그 안에 따라서 편집을 해와서 두 개를 비교하자고 했다지?”

“……예.”

“강대한, 아까 내가 본 게 몇 퍼센트 정도 완성된 거냐?”

난 아직 끄지 않은 편집 프로그램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86%]

생생히 보이는 확률 수치.

“8, 90퍼센트 정도입니다.”

“그래. 그 정도 되었으면 뭐, 지금 바로 비교해 봐도 상관없겠지? 바쁘다며?”

현준영의 눈이 커졌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임은 명백했다.

“방금 건 이미 충분히 봤을 거고…… 강대한, 네 편집본 틀어.”

저 말을 저대로 따라도 될까.

현준영이 나를 쏘아보는 게 무척 매섭긴 하지만, 서인하 부장의 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권민헌 PD를 쳐다봤는데,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이미 엎어진 물인데.

나는 노트북을 들고 프로젝터로 가서 선을 연결했다.

스크린에 출력된 화면이 바뀌고, ‘86%’의 내가 만든 가편집본이 재생되었다.

“…….”

“…….”

다들 숨을 잊은 것처럼 회의실은 고요했다. 그 와중에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가득했다.

현준영의 지휘 하에 만들어진 가편집본과 내 가편집본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고요한 아침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로비에 출연진들이 모이고, 그 과정을 여러 각도에서 비춰 주는 중에, 현준영 버전과 달리 음향을 건드리지 않았다.

너무 날카로운 소리가 날 경우만 의도적으로 조절했고, 나머지는 그날 녹음된 소리를 날것 그대로 실었다.

“어, 비 오는데?”

“조금 오고 말 비가 아닌데요?”

카메라 밖에서 들리는 스태프들의 목소리.

“……괜찮을까요?”

“오늘 뭐 배 타고 들어간다지 않았던가?”

“운동화 신었는데 샌들로 바꿀까 봐요.”

“준혁아, 너도 뭐 들은 거 없어?”

로비 한쪽 소파에 모여 앉은 출연진들의 대화 소리.

그러면서 점점 빗소리가 진해지고, 현준영이 스태프를 불러 모으는 소리가 들린다.

출연진들이 일제히 그쪽을 쳐다보는 중에.

[대체 무슨 일이……?]

자막과 함께 처음으로 배경음이 깔린다.

그 후로 영상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 간다.

로비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던 카메라 중에는, 제작진들이 회의를 벌였던 장면이 걸린 것도 있었다.

끝부분에 간신히 걸린 정도긴 했지만, 나는 그것도 살렸다.

제작진의 목소리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고, 애매하다 싶으면 자막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빨리 감기를 통해, 중간에 준혁이 형과 효명이가 내 의견을 동의해 주는 장면은 후딱 넘겼다.

잠시 후, 회의를 마친 현준영과 유수현 작가가 출연진들 사이로 합류해서 오늘의 상황을 알린다.

“보시다시피 비가 너무 와서, 원래 예정했던 미션은 촬영이 힘들 것 같아요.”

“아, 역시. 원래 하려던 건 무리인가 보네요.”

“배도 못 들어간다면…….”

“아예 취소는 아니고, 나중에 배편이 잡히는 대로…….”

나는 출연진과 제작진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 가는 동료 사이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모두가 같이 머리를 맞댄 결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타났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리얼함이니까.

“그럼 그렇게 해 볼까요.”

현준영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출연진들이 일어나면서 화면이 바뀌었다.

여기까지가 대략 15분 정도.

이 부분만 해도 몇 번이나 새로 편집했고, 자막도 수십 번 고쳤다.

그 이후 분량은 현준영의 편집본보다는 확실히 좀 더 호흡이 빨라야 했다.

앞에서 15분이나 잡아먹었으니, 편성 시간에 맞추려면 같은 내용을 좀 더 타이트하게 편집해야 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그런 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중점이 다른 것도 이유였다.

미션의 진행 호흡보다는 각 출연진들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들의 대사나 그들 간의 케미를 살리는 것에 좀 더 주력했다.

뭐…… 사실 밤샘의 주요 원인이 된 부분이었다.

생각한 대로 잘되지가 않아서, 박주영 선배나 이민희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부분이었다.

심지어 선배는 그렇게 편집하겠다고 의사를 밝히자마자 내 멱살을 들어 올려 주는 수고를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내 가편집본의 재생이 끝났다.

제대로 편집을 끝나지 못한 어설픈 부분은 괜히 얼굴이 화끈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서, 재생이 끝났다.

“자, 어때.”

서인하 부장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둘러보았다.

“난 원래 가편집본은 제대로 보지 못했어. 그러니 둘 다 본 여러분에게 묻지. 어느 쪽이 더 낫지?”

“…….”

“…….”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기야 현준영 PD도 같은 장소에 있는데, 쉽게 발언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그때였다.

“대한이가 한 버전이 좀 더 리얼하고 감각적인 것 같습니다.”

입을 연 것은 권민헌 PD였다.

“원래 버전도 분명 재미는 있습니다만…… 저는 이쪽이 좀 더 본래 <당잠사>에 맞는 것 같아요.”

“예, 저도……. 후반으로 갈수록 좀 정신이 없어서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지만, 앞에서부터 깔고 가는 흐름이 좋아 보여요.”

유수현 작가도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현준영에 대한 반감에 의한 평가겠지.

어쩐지 가편집본 자체에 대한 평가를 듣긴 요원할 것 같아서 씁쓸했다.

어쨌든 그렇게 입이 트이자, 다른 팀원들도 저마다 평을 했다.

“앞에 음악이 좀 튀던데…….”

“20분쯤인가, 앞뒤가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난 그 말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래서.”

잠시 소강이 되었을 때, 서인하 부장이 현준영을 보았다.

“현 PD가 볼 때는 어떤데.”

현준영은 슬그머니 나를 보고, 스크린을 다시 돌아보더니.

“……뭐, 쓸 만한 것 같네요. 당연히 정리는 필요하겠지만.”

“그래. 그럼 됐네.”

서인하 부장이 선 채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이번 주 방송은, 이 버전으로 가.”

스크린 앞 허공에는 나만 볼 수 있는 숫자가 떠 있었다.

그 숫자가, 서인하 부장의 발언과 함께 변화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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