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비밀 작전
편성 확정 시점을 알려 준 뒤, 현준영은 강대한에게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나가 보세요. 바쁠 텐데.”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회의실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권민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PD님. 좀 과한 처사인 것 같은데…….”
“네? 과해요? 시간이 없는 건 맞잖아요. 지금부터 한 편 분량 편집하려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텐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주는 게 뭐가 과하죠?”
말속에 비난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말에 권민헌은 말문이 막혔다.
현준영은 한 번 더 강대한을 보았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인지 아닌지 한번 보자고요, 강대한 씨. 능력이 잘난 건 알겠는데, 왜 매번 당신은 선을 넘을까요? 여긴 뭐 다 멍청한 사람들만 앉아 있어서 당신처럼 못하는 것 같나요?”
“…….”
“어디 잘나 빠진 능력 좀 봅시다. 좋은 퀄리티로 가져오길 기대할게요. 시간은 지키고.”
그렇게 잘라 말하니 다른 PD들도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 강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보겠습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간 것인지 당장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 그럼. 우리는 다시 회의를 해 볼까요.”
강대한이 자리를 비운 뒤, 현준영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5화 완성본을 위한 편집 회의였지만, 그 외에도 안건을 처리할 건 많았다.
남은 5회분의 방영본 스크립트나 최종 촬영에 대한 회의 같은 게 그런 안건들이었다.
대략의 스크립트를 정하고, 그에 필요한 편집점들을 논하고, 최종 촬영 장소 후보지를 선정한 후에야 비로소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그때는 벌써 2시간이나 지난 때였다.
오전에 회의를 시작한 것 같은데, 어느새 점심 시간이었다.
“그럼 난 보고하고 올 테니까 다들 점심 식사 잘하세요.”
현준영이 먼저 나간 뒤, 팀원들이 정리하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잠깐.”
권민헌이 짧은 말로 모두의 행동을 막았다. 그러더니 밖을 살펴 현준영이 완전 복도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유 작가님. 대한이 놈,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그래야지.”
유수현도 이미 같은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방수정에게 부탁받은 바도 있었다.
더욱이 위계질서 면에서야 현준영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대응이 결코 옳지 못한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모든 팀원이 같았다. 권민헌은 일부러 소리 내어 물어 그것을 확인했다.
“다들, 현준영 PD님 행동이 옳다고 봐?”
“아뇨.”
“그럴 리가요.”
어떤 의미에선 모두가 하지 못했던 말을 강대한이 대신해 준 것이었다.
권민헌이 팀원을 둘러보았다.
“대한이 혼자서는 못할 거야. 누가 도와줘야 할 텐데.”
“저요.”
“저요.”
앞다투어 손을 드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박주영. 이민희.
시즌2 티저 영상 때부터 강대한과 짝을 이뤘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 두 사람이면 안심이지. 안 나서면 억지로라도 시키려고 했어.”
권민헌의 농담에 박주영이 피식 웃었다.
“제가 안 나서면 누가 그 녀석을 도와주겠어요. 좀 쫄리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민희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도와줄 테니까.”
“네, 유 작가님.”
박주영과 이민희는 서로 상의하고 손을 든 게 아니었다. 그저 같은 타이밍이었을 뿐.
그 행동만으로도 어떤 마음인지가 느껴져서, 권민헌과 유수현은 한시름 놓은 것 같았다.
“나머지는 하던 일 하면서 두 사람의 공백을 메웁시다. 두 사람은 필요한 거 있으면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물론 현 PD님 모르게 말이야.”
그렇게 현준영만 모르는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네?”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뒤로 편집실 앞에서 자리가 비길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박주영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밥을 먹자는 말에 나왔더니 선배 말고 이민희도 있었다.
이윽고 둘이 한 말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멍청한 얼굴은 오랜만이네. 다시 이야기해 줘? 우리 모두 현 PD님한테 반기를 들기로 했다고.”
“아니, 반기라는 게 대체 무슨…….”
“현 PD님 몰래 대한 씨를 돕겠다고 다들 손을 걷어붙였거든요. 그게 반기가 아니면 뭐겠어요? 어차피 몰래 해야 하는 처지지만.”
“그러니까. 분명 알게 되면 쪼잔한 방법으로 복수할 거야. 내 참, 자기 의견에 반대했다고 막내 PD한테 정규 방송 편집을 해 오라고 하는 게 말이 돼?”
박주영 선배랑 이민희가 국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투덜댔다.
“근데 사실 주제넘게 나댄 건 사실이잖아요.”
사실 박주영 선배도 이제껏 나서지 말라며 몇 번 만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충고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거다.
현준영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고작 확률을 보게 되었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우쭐대고 있던 게 아닐까.
편집실이 비길 기다리면서 나는 그렇게 반성하고 있었다.
“뭐, 너 재수 없는 건 내가 인정하는데, 그래도 방법이 잘못된 거라니까?”
“맞아요. 그러니까 권 PD님이나 우리 왕 언니가 우리더러 대한 씨를 도우라고 한 거고요.”
“아니, 아니, 잠깐만요. 권 PD님이나 유 작가님이 허락하셨다는 거예요?”
“사실 누구든 마음은 대한 씨랑 같았을 거예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아무리 메인 PD의 역할이라지만, 사실 방수정 PD님 밑에서 시즌1, 2를 만들 땐 누구나 다 애착을 갖고 만든 거잖아요. 그걸 현 PD님이 맨날 부정하고 우릴 들러리 취급이나 하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현준영의 행동에도 나름 명분은 있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다.
메인 PD가 기준을 잡지 못하면 프로그램의 근간이 뒤집히거나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방식이 너무 과했다.
제작진의 공을 세워 주기는커녕,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마저 깎아내리기 급급했으니까.
“그러니까 네 책임이 막중한 거야, 대한아.”
“제 책임이요?”
“엉, 네 책임. 네가 사고를 쳤으니까 네 책임 맞잖아. 어쨌든 일단 벌인 이상, 확실하게 뒤통수를 한번 쳐 주자고.”
‘그래야 우리 행동이 의미 있게 되잖아?’ 하며 내 어깨를 툭툭 쳐 준다.
현준영은 어차피 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 그런 의미에서 뒤통수를 치자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어깨가 엄청 무거워진다.
실패하더라도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될 일이었는데, 이제는 팀 전체의 문제가 된 것이다.
“왜, 부담돼? 넌 원래 판 키우는 데 선수잖아?”
위로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선배의 말이 어쩐지 고마웠다.
왠지 모를 고양감과 함께, 나는 두 사람과 함께 편집 작업에 착수했다.
당연히도 편집실을 빌릴 수는 없었다. 현준영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래서 선배가 개인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보너스 받은 걸 모아서 산 건데, 이렇게 요긴하게 쓸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좋은 걸로 사시지 그랬어요?”
“작가님, 같은 박봉끼리 이럴 겁니까?”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한 귀로 들으면서 노트북을 좀 살펴봤더니, 놀랍게도 박주영 선배의 노트북에는 편집에 필요한 모든 프로그램이 전부 깔려 있었다.
그 이후로 난 내 자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편집 작업을 했다.
선배나 이민희가 항상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현준영이 있을 땐 사무실에 있어야 하고, 그에게 보고되지 않은 움직임을 하기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수현 작가나 권민헌 PD가 도움을 주었다.
“주영아, 저기 제작부에 가서 소도구 들어온 거 체크 좀 해라.”
“민희야, 거기 스튜디오 연락이 안 되는데 직접 좀 다녀와.”
완벽한 핑계로 그 둘을 눈치껏 자리를 비우게 해 줬던 것이다.
우리는 방송사에서 좀 떨어진 카페에 모여서 노트북을 펼쳐 숱하게 토론을 했다.
“이 장면 좀 더 살리지? 소리가 죽은 것 같은데, 소리 조정은 할 줄 아냐?”
“여기에 자막은 여기 말고 머리 위로 올리는 게 좋아 보이는데요.”
“그래. 자막 색깔 좀 바꾸는 게 좋겠다.”
그런 조언들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실력이 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확률도 달라졌다.
사흘 동안의 작업을 거친 결과, 확률은…….
[83%]
무려 ‘83%’였다. 30% 이상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눈이 퀭한데 어제 자긴 했어요?”
약속한 카페에 선배보다 먼저 도착한 이민희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던 나는 시야에 갑자기 들어온 그녀의 얼굴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린다.
“놀라기는. 어제 영상 보내준 다음에 안 잔 거예요?”
“……자려고 했는데, 또 고칠 부분이 보여서요.”
안 그래도 어젯밤에 ‘80%’를 달성한 후, 삘 받아서 달렸던 게 화근이었다. 밤샘 결과가 고작 3% 상승이라니. 성과가 영 좋지 못했다.
“그러다 몸 다쳐요. 쉬엄쉬엄해야죠.”
“쉬엄쉬엄할 때가 아닌데요.”
“쉬엄쉬엄 열심히 해야죠.”
이게 무슨 말이야. 이분 작가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갸웃대고 있자니, 이민희가 피식 웃었다.
“농담도 안 통하네. 일단은 우리가 맡아서 할 테니까 잠깐이라도 눈 좀 붙여요.”
하지만……이라고 뭐라고 붙이려고 하다가, 이민희의 시선이 더할 수 없이 엄하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 대한 씨 쓰러지면 그게 제일 황당한 결론이 될 테니까. 알았어요?”
“……네.”
얌전히 대답하는 사이, 박주영 선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한 소리 들었어? 작가님, 또 대한이 혼낸 거야?”
“혼내다니요. 잔소리하는 울 엄마도 아니고. 좀 쉬라고 한 거였어요.”
“그래? 작가님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나 봐. 암튼, 대한아. 좀 쉬어라. 그러다 말라비틀어지겠다.”
사실 5화를 수정하면서 느낀 건데, 우린 꽤 합이 잘 맞았다.
내가 편집점을 잡아 수정하면, 이민희가 자막을 붙일 방향으로 한 번 더 고쳐 주고 최종적으로 선배가 영상을 가다듬는 식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힘이 필요할 때였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두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서, 나는 카페 구석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랬다가 눈을 떴다.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더니 1시간쯤 지나 있었다.
내가 인기척이라도 냈는지 박주영 선배가 모니터를 보던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때마침 깼네. 좀 정신이 드냐?”
“음…… 커흠, 네.”
아, 목 잠겼네.
선배가 건네준 찬물을 들이켜니 칼칼한 목도 좀 가라앉았다.
“영상은 괜찮아요?”
“글쎄, 몇 군데 정리했는데 확실히 어제보단 더 좋아진 것 같아.”
“잠은 자야 한다는 것도 알았죠. 50분쯤에 추가한 영상, 35분 영상하고 중복이라서 뺐어요. 결과적으로 깔끔하긴 한데, 분량이 좀 부족해졌달까.”
아무리 AGD 앱을 이용해 확률을 볼 수 있다고는 해도, 확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온전히 내가 노가다를 해야 했다.
하지만 박주영 선배와 이민희 덕분에 그 노가다 시간을 확 단축시킬 수 있었다.
오오, 이것이 경력. 오오, 이것이 능력치.
나는 이번 일로 몇 가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내가 확률을 본다 해서 언제고 나서도 되는 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내가 의욕에 비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
결론적으로, 확률 보기는 만능이 아니고 내 객기로 해결 못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
[86%]
어쨌든 두 사람의 능력이 보태진 영상은, 확률이 또 올라 있었다.
이야, 내가 밤을 새워서 3%를 올렸는데, 이 두 분은 1시간 만에 3%를 찍었네.
갑자기 서럽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단함을 칭찬해 주려고 하는데, 두 사람의 스마트폰이 진동을 했다.
현준영은 내게 5화 편집을 맡긴 이후로, 단톡방에서도 날 배제시켰다.
“야, 호출 왔어. 일단 다시 들어간다.”
“갑자기 웬 회의를 한다는 걸까요?”
“네. 들어가세요.”
사무실에서 호출을 받은 두 사람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 뒤,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3,893P/1,393P]
그간 티저를 만들면서 AGD 앱의 포인트를 좀 더 적립했었다.
그래서 사용 가능한 포인트가 ‘1,393P’.
아이템을 쓰려면 충분히 사용할 만한 포인트였다.
원인을 알면 단숨에 90% 이상을 기록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고민이 됐다.
이 정도면 아이템 없이도 100%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배랑 이민희도 도와주고 있고.
지금 아이템을 쓰기보단 안 쓰고 100%를 달성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전처럼 큰 포인트가 주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강대한? 지금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런 목소리와 함께 내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
고개를 들어 보니, 서인하 부장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