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마지막 티저
플래티넘. 효명이가 리더로 있는 보이 그룹 엑시트의 회사다.
원래 회사와 결별한 류준혁에게 여러 회사들이 매니지먼트 제안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회사 중 하나가 바로 플래티넘.
그 이야기를 최효명에게 들은 난, 류준혁을 만난 자리에서 플래티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살포시 해 줄까 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AGD 앱이 알려 준 확률이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류준혁이 선택할 일이고,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기로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관여하는 게 영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말을 물렸고, 앱 없이도 내가 알 수 있었던 상황만을 놓고 이야기해 주었다.
설마 그 일이 이 결정에 영향을 끼친 걸까?
“설마 송 매니저님이 회사 일로 따로 빠지신 게…….”
“하하하. 이해가 빠르시네요. 네, 회사랑 계약 조건 이야기하러 가셨습니다.”
아, 어쩐지. 셋이 있다가 송일현 매니저가 빠져나간 모양이다.
“한국 돌아가서 하면 된다는데도, 엄청 급한가 봐요.”
효명이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다. 플래티넘 입장에서는 생각지 못한 대어가 걸려든 게 아닌가.
아무리 효명이를 들들 볶았다 해도 정말 계약이 성사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거다.
“계약서는 돌아가서 쓰겠다고 전했는데도, 플래티넘에선 그전까지 조건 조율을 끝내고 싶은 모양이에요.”
류준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괜히 내가 더 신경이 쓰였다.
공교롭게도 이 방에 오기 직전, 류준혁과 효명이를 케어하라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더했다.
“촬영 며칠 더 남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제가 건 조건이 까다롭진 않아서. 괜찮습니다.”
류준혁이 선선히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옆에서 효명이가 툭 치고 나왔다.
“까다롭지 않다니요. 으엑. 형님, 어떤 의미에선 제일 까다로운 조건 아닌가요?”
얼레, 효명인 뭔가 아는 모양인데?
내가 빤히 보자 효명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아까 계약하자며 입을 떼시길래 사실은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리려 했거든요. 근데 준혁이 형님이 걍 있어도 된다고 하셔서…….”
계약 조건을 들어도 상관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민희 씨. 사귀는 건 이 둘이 아닐까요?
아무튼 참 대단한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형 부르자고 한 것도 형님 의견이었어요.”
“류 배우님이?”
“네.”
나를 왜?
말로 뱉진 않았지만, 표정을 보고 내 심정을 알아챘는지 류준혁이 말했다.
“사실 제 결정에, 그날 강 PD님이 해 주신 이야기가 한몫했거든요.”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류준혁은 강남에서 만난 그날 있었던 잠깐의 대화를 꺼냈던 것이다.
“많은 회사에서 제안을 받고 나니 두렵더라고요. 전 사실 제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에 대한 영향력이 클 줄도 몰랐고요. 일에 관해서는 거의 회사에 맡겨 놓는 편이었고, 그만큼 믿고 있었으니까요.”
비꽈서 들으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류준혁의 얼굴은 가벼웠다. 마치 이미 털어 냈다는 듯.
“회사에서 나온 다음에야 알게 된 거다 보니 더욱 고민이 되었습니다. 정말 다시 회사를 차릴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거기에 대한 무서움도 있었고요. 딱 그 시기에 강 PD님을 만났죠.”
“형이 제 얘기를 좋게 해 주셨다면서요?”
“아니, 뭐…… 좋게 해 준 건 딱히 없는데.”
무안해서 그렇게 답한 게 아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별말 안 한 게 사실이다.
“사실 전 하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선 비즈니스 관계보다는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했죠. 사실, 그걸 염두에 두고 친한 지인과 회사를 합작했던 건데 끝이 좋지 않았죠. 그렇다 보니 다시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지도 많이 고민이 되어서…… 많이 망설이던 차였습니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한데, 그때 강 PD님이 효명이 이야기를 해 주신 겁니다. 사실 이 친구랑은 만난 건 고작해야 몇 달이 전부고, 방송을 위한 관계일 뿐이었죠. 절 많이 배려해 주고 있다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로도 몇 번 둘이서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그때마다 일부러 그쪽으로는 말을 아끼더라고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아, 이런 동생이 있는 회사에 한번 의탁해 봐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회사랑 계약을 하게 되셨다, 이거죠.”
악수를 하듯 맥주캔을 건배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난 물었다.
“그 하고 싶은 일이시라는 게 뭡니까?”
“배우를 키워 보고 싶어요. 제가 모델로 시작해서 사기도 당하고 우여곡절도 겪은 만큼, 다른 후배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게끔 해 주고 싶었거든요. 원래 계획이었다면 내년이나 내후년쯤부터는 아카데미 같은 것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었죠.”
헐. 류준혁이 배우를 키운다고? 그리고 그 일을 플래티넘이랑 같이?
그런 의문을 담아 효명이를 보았다.
효명이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형도 아시겠지만, 저희 회사는 그간 배우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려고 노력했잖아요. 다만 큰 성과가 없었던 참인데, 준혁이 형님이 오셔서 배우 육성까지 해 주시겠다고 하니 사장님으로선 대박인 거죠.”
한쪽은 배우를 키우고 싶어 하고, 한쪽은 그 배우를 팔고 싶어 하고.
정말이지 플래티넘의 꿈과 류준혁의 의지가 잘 맞아떨어졌다 할 수 있었다.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하나.
괜히 남의 인생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라서 찝찝했는데, 결말이 이렇게 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앞으론 남의 인생 따위 확률로 점치진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찝찝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엑시트가 돈을 많이 벌어다 줘야겠네.”
“하하하하. 본의 아니게 어깨가 무거워졌죠. 아, 이래서 준혁이 형님이 안 오셨으면 했는데!”
“걱정 마. 나도 열심히 돈 벌어 올 테니까.”
“그게 왜 제 걱정이에요! 제 돈이 아닌데! 사장님만 좋겠네!”
곧 한 회사에 소속될 아이돌과 배우가 웃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두 분 다, 축하드립니다.”
“이게 강 PD님 덕분입니다.”
“그러게요. 형, 제가 사장님한테 보너스 좀 받아서 또 한우 사 드릴게요!”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맥주캔을 부딪쳤다.
그 뒤, 송일현 매니저가 헐레벌떡 돌아왔다가 내가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런 그에게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하자, 그는 나한테 감사하다며, 방을 나서는 나를 따라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제가 나중에 크게 한 턱 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이미 효명이한테도 한 턱 거하게 받기로 했는데.
하지만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송일현이 희희낙락 웃으며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괜스레 기분이 좋은 밤이었다.
* * *
다음 날, 배가 뜰 수 있다더니 다행히 날씨가 화창했다.
촬영이 다시 진행되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립니다, 형.”
효명이가 거들어 준 덕에, 어젯밤을 기점으로 류준혁과 말을 놓게 되었다.
“뭐야, 언제 말 놨어?”
기재를 옮기던 박주영 선배가 놀라서 물어왔고.
“이번에는 연상이에요? 난 찬성.”
이민희는 뭣도 모를 말을 남겨 놓고 떠나갔다.
암튼 괜찮은 시작이었다.
하늘은 어제가 거짓말이었던 듯 맑고 쾌청해서, 더웠다.
습한 기운을 뚫고, 출연진들에게 캠 하나씩을 넘겨준 다음 <당잠사> 시즌3 필리핀 편의 후반 촬영이 시작되었다.
배편으로 섬을 들어가고, 또 미션을 위해 나와서 리조트를 돌고, 관광지를 다니고.
그러면서 5일이 금방 지나갔다.
“마지막까지 그래도 날씨가 많이 도와줘서 다행이네요. 다들 고생하셨고, 서울에서 봅시다!”
현준영의 마지막 인사말과 함께 모든 공식 촬영 일정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확률은 ‘95%’.
촬영 종료 시점에 시즌2 시청률을 넘길 확률이 ‘95%’라니. 나머지는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뭐, 물론 그 외 마케팅 등의 변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확률을 확인하고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동안,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귀국 후 첫 출근 때 박주영 선배, 이민희와 따로 모여 작당 아닌 작당을 했다.
모의 결과, 둘에게 동의를 받았다.
나는 그 길로 권민헌 PD를 찾아갔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내가 현준영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권민헌 PD를 따로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외람되지만, 지난 시즌2처럼 박주영 선배, 이민희 작가와 같이 티저를 담당하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들은 권민헌 PD가 등받이를 돌려 박주영 선배 쪽을 보았다.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선배가 타이밍 좋게 눈을 들어 맞추었다.
권민헌 PD가 피식 웃었다.
“나 실업자 만들 생각이야?”
“아, 아뇨. 설마요…….”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했다.
“알아, 농담이야.”
권민헌 PD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편집회의에서 그 이야기하려고 했어. 네가 먼저 말해 주니 이야기가 빠르겠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현 PD님이 허락해 줘야 가능한 건데.”
“그래도요…… 선배님께 허락받고 싶었습니다.”
<당잠사> 시즌2 때도 티저 제작은 권민헌 PD의 몫이었다.
그때야 스케줄 변동으로 인해 상황이 여의치 않아 우리 셋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이번은 문제가 달랐다.
내가 욕심이 난 것이니 확실하게 허락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우리한테 맡길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유수현 작가님하고 이 이야기를 했어. 티저는 시즌2 때처럼 가자고. 마침 오시네.”
유수현 작가가 편집 회의 건으로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권민헌 PD가 일어섰다.
“네 의견도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회의 준비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사이, 권민헌 PD가 유수현 작가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후.
“좋은 아침이에요.”
현준영이 출근하고, 직후에 편집회의가 소집되었다.
촬영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화당 편성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를 정하기 위한 자리였다.
사실 촬영 중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상태라서, 그것을 서류라는 형태로 정리하기 위한 회의라고 하는 게 정확했다.
“그럼 일단 10화까지의 예정 분량은 그렇게 하도록 하고…….”
“11화까지 갈까요?”
“위에서는 편성 생각하고 있던데. 11화 분량은 좀 약하지 않겠어요?”
“감독판 촬영까지 마치고 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11화 편성으로 가겠다고 위에다 보고하죠.”
의제들이 빠르게 결정된 다음, 유수현 작가와 권민헌 PD가 눈을 맞추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현 PD님.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번 티저를 시즌2 때처럼 저 세 명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권민헌 PD의 지시로 나와 박주영 선배, 이민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현준영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티저 제작은 권 PD 담당 아니었던가요?”
“예, 맞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2에서도 저 셋이 만든 티저가 반응이 좋았습니다. 저 친구들이 맡아 주면, 저는 본편 편집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유수현 작가도 미리 입을 맞춰 둔 바가 있는지 의견을 더했다.
“저도 같은 의견이에요. 지난 성과도 있고 하니, 한번 맡겨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 팀의 양대 축이 그렇게 푸시를 하자, 현준영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쪽을 다시 보았다.
셋을 훑는 듯하던 시선이, 마지막에는 나에게서 멈췄다.
“하긴, 관광섬 미션 같은 건 강 PD가 낸 의견이니 잘할 수 있겠죠. 알았어요, 한번 셋한테 맡겨 보죠.”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본방도 아닌 티저를 맡았을 뿐이지만,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시즌2 때는 얼떨결에 맡게 된 것이고, 이번에는 내가 나서서 받아 낸 것이기에 감회가 또 달랐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우리 팀 전체가 본격적으로 편집에 집중하게 됐고, 우리 셋 역시 티저 제작에 열을 올렸다.
현준영은 확실히 편집에 있어서 방수정 PD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기막힌 똥고집이었다.
그래서 편집실 감금을 자청할 수밖에 없었고, 시즌2 때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1차 티저를 만들었다.
[96%]
1차 티저가 완성된 시점에 드디어 확률이 ‘1%’가 올라갔다.
편집회의 때도 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방송 3주가 남은 시점에 드디어 1차 티저가 풀렸다.
TV로 방영이 되고, 인터넷 공식 채널에도 업로드되었다.
『<당잠사> 시즌3 드디어 베일을 벗다!』
『<당잠사> 필리핀 편 류준혁×최효명 케미 다시 한 번?』
『<당잠사> 시즌3 첫 티저, 조회수 30만 돌파!』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당잠사> 시즌2에서 만든 2차 티저의 역대급 기록에는 못 미쳤지만, 예능 티저 중에서는 발군의 성적이었다.
보도자료를 포함하여, 각 언론사에서 기대감 어린 기사를 쏟아내면서 단숨에 화제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정된 5차 티저까지 쭉쭉 뽑아냈다.
[97%]
[97%]
[97%]
[98%]
그렇지만 티저를 낸다고 해서 확률이 올라가진 않았다.
이대로 100% 달성은 물 건너가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예정된 마지막 티저가 공개되는 순간,
[100%]
드디어 AGD 앱이 [100%]의 확률을 표시해 주었다.
그날은 1화 방영 당일, 그리고 제작발표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