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21화 (21/200)

21화 또 한 명의 협력자

그렇게 말한 것은 류준혁이었다.

“첫 시즌부터 그런 장면들은 많아서, 아마 다른 출연진분들도 괜찮다고 할 겁니다.”

효명이가 온 건 그러려니 하는데, 류준혁까지 나서줄 줄은.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을 쳐다보던 현준영이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하지만…… 스크립트를 짜고 기획을 만드는 건 저희 제작진이 할 일이에요. 그걸 출연진에게 떠넘기는 건…….”

“떠넘기다니요. 저희는 같이 방송을 만들어가는 위치 아닙니까.”

류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저희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올 줄은 아무도 몰랐던 돌발상황이니까요. 하라는 대로 하고 있으니 편하긴 한데, 어쩐지 저번 시즌들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요. 도울 만한 게 있다면 한 손 거들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가 그렇지 않냐는 듯 효명이를 본다. 효명이도 냉큼 맞장구쳤다.

이 돌발상황에 촬영이 어떻게 진행될지 PD 라인에서 결정이 나지 않다 보니, 지금까지 출연진은 소파에 앉아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던 거겠지.

제작진, 출연진이라는 입장 차가 있겠지만, 같이 방송을 만들어 가는 사이라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방수정 PD는 출연진의 의견이나 촬영 흐름에 따라 기존에 계획했던 기획도 얼마든지 변경해 가면서 촬영을 했고, 그런 장면들이 소위 대박을 쳤다.

현준영은 달랐다. 그는 기존 안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이였다. 거기다 본인의 힘이 닿지 않는 상황을 꺼리는 것 같달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만은 그도 거부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여러분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곧 결론 내릴 테니, 기다려 주세요.”

현준영의 말에 두 사람이 동의하고 다시 로비 소파로 걸어갔다.

효명이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내자, 그만이 아니라 류준혁도 눈을 맞춰 왔다.

뭐랄까, 저 두 사람. 묘하게 전보다 더 친해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두 사람이 돌아간 뒤, 현준영이 다시 자리에 앉더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에요? 한번 그냥 촬영 밀어붙여 보자고? 너무 변수가 클 것 같은데.”

변수.

리얼함.

그대로 찍는다고 해서 어떻게 나아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버라이어티 예능의 기본이다.

그러한 내용을 한 번 더 어필해 보려 했는데, 나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촬영에 사고가 없던 적도 드물고, 준비해 둔 미션 못한 적도 많고.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출연자 이야기도 맞아요. 한번 믿고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유수현 작가였다.

권 PD도 입을 열었다.

“PD님 스타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수가 없다면, 이 방법이 제일 적절할 것 같습니다.”

출연자들을 믿어 보자. 날것 그대로의 그림을 그려 보자.

나머지 선배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현준영은 전에 없이 얼굴을 구긴 채 침묵했다.

눈을 굴리던 그가 여전히 서 있는 나를 한번 힐끔 보고는, 출연진 쪽을 슬쩍 돌아보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내 경력 중에 이런 적은 없는데.”

그런 식으로 웅얼대는 것 같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여러분들 의견대로 한번 해 보죠. 일단 찍고, 그게 낭비인지 아닌지 판단해 보죠.”

연출책임의 결정이 내려졌다.

결정을 내리는 시간은 꽤 길었다. 하지만 제작진의 행동은 빨랐다.

아직 소낙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는 상황에, 로비 한쪽에서 출연진들과의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유수현 작가가 현준영을 데리고 출연자들에게 가서 지금까지의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논하기 시작했다.

“아, 역시. 원래 하려던 건 무리인가 보네요.”

“배도 못 들어간다면…….”

“배편은 현재 날이 풀리는 대로 다시 잡으려고…….”

그 와중에, 모니터 앞에 자리 잡은 권민헌 PD는 다른 PD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 두 개 더 저쪽에다 설치해.”

“마이크 감도 좀 더 올리라고 해.”

“아니다. 현 PD님한테 마이크를 그냥 들려 드려.”

그러면서 서브 작가들을 체크하여 즉석에서 대본을 받아치게 했다. 편집 과정에서 자막을 구성하는 데 쓸 요량인 듯 보였다.

나는 작업을 도우면서 촬영을 지켜보았다.

출연진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시즌1, 2를 겪은 출연진들에겐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오히려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과몰입하는 양상이 있었다.

“원래는 미션으로 저희한테 뭔가를 지급하려고 하셨겠죠?”

“예. 그렇긴 하죠.”

“그럼 어느 미션을 하든 그것만 받아내면 된다는 건데…….”

“리조트 안이라고 치자면 방? 식당?”

“여기 실내 수영장 있지 않던가요?”

그러한 이야기들을 주르륵 지나갔다.

모니터를 지켜보는 PD와 작가들은 절로 숨을 죽였다.

하지만 차츰차츰 그 분위기가 밝아졌다.

“차 한 대 빌려 주시면 제가 거기 직접 갔다 올게요.”

효명이가 나서서, 폐기된 미션 장소까지 가서 고생하겠다고 자처하고.

“수영복은 충분히 준비해 왔는데 좀 벗을까요?”

몸 좋은 류준혁이 스스로 그림을 만들겠다고 자청해서 출연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좋았다.

“괜찮을 것 같은데…….”

권민헌 PD가 조용히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방수정 PD의 수제자 같은 존재.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었다.

조만간 예능 입봉도 할 거라는 소리도 있었다.

“그럼 저도 같이 벗을까요?”

효명이가 우스갯소리를 했다가,

“안 그러려고 했어? 현직 아이돌 복근도 좀 보자.”

류준혁이 장난스럽게 말을 붙이자 당황했다.

“어…… 매니저 형 허락을 받아야…… 형! 어딨어요, 형!”

효명이의 부름을 들은 송일현 매니저가 후다닥 달려왔다. 그가 모니터 화면 속으로 훅 들어왔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의도해서는 나올 수 없는 그림들이.

한참 그렇게 진행됐다. 대본은커녕 스크립트도 없고, PD나 작가의 지시도 없는, 그야말로 ‘라이브’ 촬영.

“해 보시죠, 그럼!”

오늘 촬영의 방향이 정해지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준영과 유수현 작가가 돌아와서 지시가 내려졌다.

각자가 할 일을 위해 찢어지는 사이, 나는 기획안 위의 확률을 확인했다.

[92%]

비바람과 함께한 촬영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 * *

촬영이 끝난 시각은 11시였다.

현준영이 이끈 이후로 가장 늦은 시각에 마무리된 것이었다.

출연진들을 방으로 돌려보낸 후, 우리는 현준영의 방에 모였다.

촬영은 끝났지만 오늘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체크해 보지요.”

이미 이 방에 휴대용 모니터들을 설치해 두고, 노트북도 죄다 가져다 꺼내 둔 상황.

이윽고 오늘 촬영한 모든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윽고 주요 장면들을 넘겨보면서 모두 체크하기 시작했는데, 워낙 많다 보니 순수하게 체크만 하는데도 2시간이 지나갔다.

“괜찮은데요?”

유수현 작가가 먼저 말했다.

“자막 포인트도 많고. 너무 비속어가 많아서 순화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재밌게 찍힌 것 같아요.”

“편집하는 게 고생이긴 하겠는데…… 생생하게 잘 나온 것 같습니다.”

권민헌 PD도 그렇게 평가했다.

피곤함이 깔려 있는 얼굴이었지만, 다들 눈빛은 밝았다.

문제는 현준영.

책임인 그가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다.

모두 숨죽이고, 소파에 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

그는 소파에 팔걸이를 손가락을 똑똑 두들기다가, 어느 순간 픽 하고 미소를 진하게 그려 올렸다.

“편집할 때 좀 고생하는 걸로 하죠. 좋네요. 오늘 수고했어요.”

바깥의 비가 그쳤을 때처럼, 제작진을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이 쑤욱 빠져나갔다.

다들 만면의 미소를 띠고 진심으로 인사했다.

“고생했어요!”

“다들 진짜 수고했습니다!”

이 인사는 진짜였다.

지난 몇 달 동안의 인사 중 손에 꼽을 만큼의 진심이 담긴 인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을 꺼내 보자, 추가 푸시가 도착해 있었다.

기획안을 들고 있지 않아서였다.

[현재 사용 중인 [‘<당신이 잠든 사이> 시즌3가 시즌2만큼의 시청률을 기록할 확률’이 변동되었습니다.]

[94%]

2%나 상승했다.

100%에 근접할수록 확률 올리기가 쉽진 않았던 걸 생각하면, 꽤 가능성이 있는 수치였다.

티저만 잘 뽑아낸다면 100%를 달성하는 것도 결코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다들 가벼워진 마음만큼, 현준영의 방에서 기재들을 치우는 것도 엄청 빨랐다.

하긴, 벌써 새벽 2시였다.

내일 촬영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쉬어야 했다.

“아까 다 전달됐죠? 내일은 배가 뜬다고 하니까, 관광섬 기획은 일단 속행하는 걸로 다들 준비시키세요.”

“예.”

“그리고 강 PD는…… 류준혁 씨랑 최효명 씨, 내일부터 전담 마크하고.”

“예?”

갑자기 내가 지목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마크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감시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 두 사람이랑 강 PD가 친한 것 같으니, 남은 촬영 동안 잘 관리하라는 거예요. 오늘도 그 두 사람이 제일 잘해 줬으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잘 관리하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싶어서 긴장했는데 다행히 괜찮은 일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머지 자잘한 지시를 받은 뒤 현준영의 방을 뒤로했다.

“오늘 정말 수고했어.”

“푹 쉽시다.”

한고비를 넘긴 제작진 사이에는 뭔가 끈끈함 같은 것이 생겼다.

모두가 서로를 응원해 주고 갈라지는 와중에 나도 같은 방인 박주영 선배랑 함께 움직이려 했다.

그때, 스마트폰이 주머니 속에서 진동했다.

[엑시트최효명: 제작진 여러분 돌아가시는 것 같은데 형도 끝났어요?]

[엑시트최효명: 끝났으면 제 방에서 캔맥 하나 콜?(찡긋)]

효명이었다.

오늘 큰 활약을 해 준 만큼, 효명이의 호출이 나도 기뻤다.

“선배, 전 효명이 방 좀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그래. 너무 늦진 마라. 내일도 새벽부터 준비해야 하니까.”

“맞아요. 늦은 연애에 해 뜨는 줄 모른다니까 조심해요.”

언제 왔는지 이민희가 쑥 끼어들었다.

이 사람은 귀신인가.

얼마 전부터 나와 효명이를 어떻게든 커플로 엮으려고 하는데, 난 웃음만 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두고 보죠.”

“두고 봐도 똑같습니다.”

우린 낄낄대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졌다.

이곳 리조트는 5층 높이였고, 출연진 방들은 5층에 모여 있었다.

그중 효명이가 매니저와 함께 쓰는 방을 두드리자,

“어서 오세요!”

문을 열어 준 효명이.

그런데 그 뒤에서 의외의 사람이 나를 반겨 주었다.

“류 배우님?”

효명이 방에 같이 있는 것은 류준혁이었다.

이미 샤워라도 했는지, 둘 다 머리칼에 물기가 있고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와, 이걸 초고화질로 촬영했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확률이 천장을 뚫었을 텐데.

직업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효명이가 말을 붙이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준혁이 형님이랑 오늘 마무리 한잔 하다가 형 생각나서 메시지 보내 본 거예요. 엄청 걸리셨네요.”

“오늘 찍어 둔 걸 확인하다 보니 좀 그랬어. 아, 두 분도 오늘 너무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제작진이 하셨죠. 안 그래요, 형님?”

“그러게.”

“함께 고생한 거죠.”

방에 들어선 내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자, 효명이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주었다.

필리핀 현지 맥주라나 뭐라나.

“라이트라는데 밍밍한 맛이 한국 맥주랑 비슷하더라고요.”

“그럼 소맥각인데.”

농담을 나누면서 우린 셋이서 건배를 했다.

원래 효명이는 송일현 매니저랑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송일현 매니저는 회사 일로 빈 공간이 필요해서 류준혁의 방으로 갔고, 둘은 오늘 그냥 같이 자기로 했단다.

이럴 거면 그냥 류준혁 배우 방에서 모였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방 PD님 때와는 다르게, 이번 촬영에서는 방에 카메라가 안 달려 있더라고요. 있던 게 없으니까 뭔가 묘한 기분이에요.”

“여긴 방 촬영 허가가 안 나서 그래.”

“아, 그럼 다음 숙소에는 달려 있는 겁니까?”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아, 방에서 푹 쉬는 것도 오늘이 끝이겠네요. 카메라 좀 피해 보려 했더니…….”

“왜요? 전 카메라 없으면 이제 잠이 안 오던데.”

말도 안 되는 농담이 오가는 사이, 나는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단순히 오늘 촬영을 서로 치하해 주자는 모임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또 다른 용건이 있는 것 같은.

맥주캔 하나를 비우고, 하나 더 달라고 하면서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뭔가 할 말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부른 것 같은데.”

두 사람을 각각 보면서 묻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확률 보는 앱이 내 눈치를 강화시켜 줬나?

“그럼 그냥 이야기하세요. 중요한 이야긴가요?”

눈 마주치고 히죽히죽 웃는 걸 보니 무거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효명이의 시선을 받은 류준혁이 입을 열었다.

“저, 플래티넘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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