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너 자신을 알라
이곳 리조트에서 출연진은 A, B팀으로 나뉘어 미션을 받는다.
미션은 바로 각각 지역으로 가서 수수께끼를 풀고 키워드를 모아 최종 목적지를 찾아내는 것.
관광섬으로 가는 배편이 제한적이어서, 미션 기간은 넉넉하게 2박 3일로 잡았다.
사이사이는 디테일한 퀘스트로 채워 넣기로 했다.
2개 팀으로 나눈 만큼 방송분에서 두세 개 섬을 동시에 보여 줄 수도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게 원래 계획하고 있던 기획이었다.
하지만…….
그 회의를 마치고 며칠 후, 촬영 예정일의 기상예보를 받은 시점에서, 관광섬 미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들이 모였다.
나도 현준영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걱정 말라며, 기획 변경은 없단 투로 고수하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기획을 바꾸죠.”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PD들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충분히 예측 가능했는데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았던 작자가.
“아이디어 내봐요.”
이런 소리를 덧붙이고 있다.
누가 봐도 현준영에게도 대비책은 없어 보였다.
PD들은 불만 가득한 눈빛을 하다가, 뭐 어쩔 거냐는 현준영의 모습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일단 닥치고 하자.
그 눈빛을 말로 치환하면 그 정도 의미가 될 것 같았다.
“예비용으로 챙겨 둔 미션이 몇 개 있지 않았던가?”
“정리해 둔 파일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제가 갖고 있습니다.”
나는 구석에 대충 던져 둔 가방을 뒤졌다.
하지만 가방에 없어서 방으로 뛰어 올라가 가져왔다.
내가 방에 갔다 왔을 때까지도 PD들은 계속 숨 죽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 설치된 모니터가 스쳐 지나가는 길에 보였다.
출연진들이 모인 소파를 둘러싼 카메라들이었다.
슬쩍 그쪽을 보니 부탁한 대로 효명이가 출연진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풀어 주고 있었다.
“어라…….”
그러다가 모니터에 녹화 중 버튼이 깜빡대는 걸 발견했다.
지금 찍고 있나?
아까 메이킹 카메라도 끄라고 했는데, 그때 카메라는 다 꺼진 게…….
“안 돼요. 그딴 걸 어떻게 방송에 내요? 약하잖아요.”
하지만 들려온 현준영의 목소리에 서둘러 회의로 돌아갔다.
내가 넘긴 자료를 다시 보면서 현준영이 말했다.
“밖에 비가 저렇게 오고 있는데, 방금 그건 너무 외부 위주예요. 이동은 그렇다 치고 건물 내부에서 가능한 미션이어야 하지 않겠냐, 이 말입니다.”
그가 버릇처럼 자료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여기 자료들도 외부 위주가 많네요. 우리 내부에서 가능한 미션 준비해 둔 거 없어요?”
“있긴 합니다만, 그게 다 후반에 있어서…….”
“지금 후반이고 나발이고가 중요합니까? 스크립트 다시 가져와 봐요.”
묘하게 말투가 신경질적이다.
권민헌 PD가 다시 촬영 총 스크립트를 가지고 오는 동안, 미묘한 탁상공론만 오갔다.
그동안의 기획 회의에서 마찬가지로 현준영은 거진 권민헌 PD, 유수현 작가하고만 대화해 왔다.
그렇다 보니, 그 밑 라인의 PD나 작가들은 지금도 그저 눈알만 굴리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땜빵 기획 회의가 잘될 수가 있나?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는데, 문득 스마트폰이 울렸다.
몰래 꺼내 확인해 봤다.
[박주영선배: 지도 전혀 대책이 없어 보이지 않냐.]
[이민희작가: 맞아요.]
고개를 슬쩍 올리자, 선배와 이민희도 마찬가지로 눈짓을 해 왔다.
[박주영선배: 우리가 비 올 거라고 한두 번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이민희작가: 그러니까요.]
글자에서 노골적인 불만이 전해졌다.
그럴 수밖에. 현준영은 정말로 비가 안 올 거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 상황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답답함.
방수정 PD와는 다른 의미의 답답함이었다.
뚜렷한 자기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믿고 따라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방수정 PD와 같은데, 그 책임감 부분에서도 영 미덥지가 않았다.
이번만이 아니라 몇 번의 기획 회의에서도 느꼈던 생각이었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가 그렇게 불만을 드러내는 중에도 회의는 이어졌다.
“이 미션은 어때요?”
“그건…… 그 리조트에밖에 없는 시설이라서요.”
“이건?”
“공항을 기준으로 이동 거리를 상정한 거라서……. 근데, 이것도 외부 미션인데요?”
권민헌 PD가 지도까지 펼쳐서 설명하는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 순간에도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도 들려왔다.
[엑시트최효명: 형, 아직 결론 안 났어요? 어떻게 됐어요? 선생님들이 걱정하시는데.]
로비 반대편에 앉아 있던 효명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일단 대기. 즉석 미션 짜고 있어.]
몰래, 그것도 급하게 보내다 보니 대답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잘 알아듣는 게 고맙다.
[엑시트최효명: 리얼하네요. 즉석에서라니.]
[다른 분들은 비밀.]
[엑시트최효명: 네. 그래도 빨리 답은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엑시트최효명: (끄덕)(화이팅)]
작은 패널에서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보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게 힘내라고 해 봤자, 뾰족한 수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는데, 현준영이 버려 둔 미션 자료와 스크립트가 보였다.
슬쩍 눈치를 보고 그것을 가지고 왔다.
미션 자료. 스크립트.
“관광섬 미션은 나중으로 좀 미룬다 치고, 당장 그 정도 그림을 그릴 만한 아이디어를 뽑아내야 한다고요. 다들 프로 아닙니까?”
현준영의 거듭된 강조. 애초에 본인도 프로이실 텐데…….
방수정 PD이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네 의견이 있으면 꼭 제대로 말하고. 현 PD가 들어주냐 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 말이 떠올라 문득 자료와 스크립트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예비용이든 후반부에 쓰려고 준비해 둔 미션이든, 오늘 촬영분에 그런 걸 욱여넣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당신이 잠든 사이> 시즌3가 시즌2만큼의 시청률을 기록할 확률’ 수치가 몇이었더라?
스마트폰을 뒤져 확률을 찾아냈다.
[89%]
이것저것 보충했지만, 결국 90%는 넘지 못했다.
뭐가 부족하기에 넘지 못하는 것일까.
“아…….”
문득 떠올랐다.
[박주영선배: 너, 너, 또 나대려고..]
[이민희작가: ;;;]
내가 갑자기 소리를 내자, 박주영 선배와 이민희가 뭘 감지했는지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난 고개를 흔들어 부정한 뒤 다시 스마트폰을 뒤졌다.
내가 소리를 낸 건 ‘상점’에 있던 아이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 : 부족 확률에 대한 원인 변수를 알려준다.]
마치 지금 사용하라고 만든 듯한 것이.
사용하는 데 필요한 포인트가 무려 ‘1,500P’였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2,643P/1,643P]
아슬아슬하지만, 포인트는 충분했다.
[아이템 ‘너 자신을 알라’를 사용하였습니다.]
[사용 포인트: 1,500P]
[현재 사용 중인 [‘<당신이 잠든 사이> 시즌3가 시즌2만큼의 시청률을 기록할 확률’의 부족 확률의 원인 변수를 표시합니다.]
[확률 구성 중 가장 비중이 큰 중요 변수만을 표시합니다.]
[중요 변수: 리얼 버라이어티로서의 가치 부족]
머릿속에서 벼락이 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시즌2와 시즌3의 결정적 차이.
그 위화감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현준영 PD가 온 이후로 종종, 그가 담당했던 예능들을 훑어보았다.
막상 볼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장면 구성에 있어서 편집이 매우 많이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 소위 말하는 ‘리얼함’이 없다는 것.
방송마다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을 괜히 들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앞선 사흘간의 촬영에서도 그랬다.
그는 촬영을 맺고 끊는 것이 매우 정확했다.
머릿속에 그리는 흐름이 있는지, 필요한 부분과 아닌 부분을 정확하게 나눠서 때때마다 슬레이트를 쳤다.
그만큼…… <당잠사>에서 호평이었던 날것 그대로의 리얼함이 부족할 수밖에.
어떤 미션을 배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템 ‘너 자신을 알라’의 사용이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2,643P/143P]
기획서 위에서 글자가 사라지고, 확률 숫자만이 남았다.
머리를 굴렸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에게 가서 슬쩍 물었다.
“지금 출연진들 카메라, 계속 찍히고 있는 거죠?”
“응? 아, 맞아. 안 껐네. 지금이라도 꺼야 욕을 덜 먹겠지?”
“아, 아뇨. 또 묻지도 않고 건드렸다고 뭐라 할지 모르니 제가 따로 물어볼게요.”
일단 그렇게 이해를 시킨 뒤, 음향 감독님에게도 확인했다.
“출연진들 마이크? 일단 다 녹음되고 있지.”
그래, 상황은 괜찮았다.
그때였다.
“휴우. 좋은 안이 안 나오네요. 다른 사람 의견도 좀 들어보죠. 강 PD?”
현준영이 닦달을 하다 지친 모양인지, 나를 불렀다.
“필리핀 관광섬 기획을 낸 건 강 PD니까 강 PD 이야기도 좀 들어보죠. 좋은 아이디어 있어요?”
“……예. 있습니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되든 안 되든, 일단 말은 꺼내 봐야겠다.
“호오? 그래요? 기대되네요. 어떤 거죠?”
“그게…… 아무 미션도 안 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현준영을 비롯해 전원의 얼굴이 내게 쏠렸다.
분위기에 절로 압도돼 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뭐랄까,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내가 모르던 나를 깨달아 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니. 촬영을 이대로 접자고요? 오늘 그냥 놀아요?”
“아니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냥, 굳이 억지로 미션을 쥐어짜 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이대로 카메라를 한번 돌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차피 이미, 촬영되고 있고요.”
내가 모니터 쪽을 가리켰다.
현준영은 그제야 출연진을 향한 카메라들이 녹화되고 있단 사실을 알고, 벌떡 일어났다.
“뭐야, 누가 찍고 있었어요? 아직 촬영 시작하라고 안 했는데요?”
“일단 계획대로 다 준비는 해 두라고 하셔서…….”
카메라 감독이 나서서 그렇게 변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메이킹 카메라를 끄라고 한 거지, 배치된 메인 카메라를 끄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
“출연진과 제작진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헤쳐나가는 모습만으로도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런 리얼함을 시청자들이 불쾌해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잠사> 시즌3에 필요한 것은 리얼함.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도 리얼함이지만, 이러한 돌발상황 또한 리얼함이다.
촬영 현장이 늘 예상한 대로 통제될 수는 없다.
시즌2도 그랬다. 클립 영상 때문에 몇 번이고 촬영분을 돌려 보는 동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따금 준비해 둔 2안도 모자라 3안으로 가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외려 출발 전까지 수차례 기획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때도 있었고,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던 포인트가 영 못 쓸 지경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부분을 날것처럼 담아냈던 게 시즌2였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인정하며, 겉으로 드러낸다.
잘 나온 부분만 골라 쓰지 않고 비율 좋게 섞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간다.
시즌2의 장점은 바로 그런 데 있었다.
방수정 PD였다면, 지금도 마냥 닦달만 하면서 고민으로 시간을 날려먹고 있진 않았을 거다.
내 말에 현준영이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통통한 얼굴에 주름이 질 만큼.
먹혔을까. 아닐까.
[89%]
확률은 아직도 변화가 없었다.
한마디를 덧붙여야 할까. 그것이 도움이 될까 고민하는데,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때, 내 등 뒤에서 다짜고짜 끼어드는 목소리.
뒤를 돌아봤더니, 효명이랑 류준혁 배우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