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19화 (19/200)

19화 98%의 확률

그날 이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시즌3 필리핀 편은 정식 방영 오퍼가 났고, 편성까지 확정되었다.

일요일 오후 9시.

구멍이 난 주말 예능은 다른 프로그램이 땜빵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시간이 조정되었다.

듣자 하니 그 문제의 주말 예능도 결국 제작이 들어가서 내년 1분기 방영이 목표란다.

차라리 좀만 더 빨리 성사되지.

우리 팀은 누구나 그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자자, 금요일인데 오늘은 다들 일찍 퇴근하시죠?”

그런 사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준영만 회사 내에서 주가가 올라가는 중이었다.

방수정 PD가 빠진 빈자리를 잘 메워 편성까지 확정시켰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될 일요일을 앞둔 오늘, 또 간부들과 술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희희낙락하게 인사하고 떠나는 그의 뒤에 대고 인사를 해 주는 다른 선배들의 얼굴도 떨떠름했다.

“술자리 갈 때가 제일 기분이 좋아 보인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다가오는 것은 이민희였다.

“오랜만이네요, 어째.”

“그러게요.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얼굴 보기 힘드네요.”

작가실이 원래 사무실 안에 딸려 있었는데, 현준영이 작가들이랑 굳이 같이 쓸 거 있냐고 사무실을 나누었다.

본래 작가실이 있던 곳은 현재 기재들이 잔뜩 쌓인 창고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민희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게 일주일 만인 듯했다.

그새 눈 밑이 많이 퀭해졌다.

“오, 작가의 얼굴로 복귀했네요.”

옆에서 놀리는 선배를 이민희가 사정없이 쏘아보았다.

“답사 갔다가 콱 돌아오지 말지 그러셨어요.”

“안 돌아오면 우리 팀을 누가 지키라고?”

“적어도 박 모 선배가 지킬 것 같진 않은데요.”

두 사람이 으르렁대는 것을 보니, 몸을 뺄 각이 섰다.

나는 중간에서 어느 편도 서지 않고 허허허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런 내 어깨를 박주영 선배가 턱 잡았다.

“필리핀 날씨 예보, 왔어?”

“아…… 네. 방금요.”

현준영이 연계시킨 여행사 ‘토마토투어’의 소통 담당은 내 몫이었다.

그를 따라다니는 게 주요 업무가 된 덕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토마토투어 담당자의 일처리가 꽤 빠르다는 점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한 시간 전에 요청한 필리핀 현지 날씨에 대한 자료를 곧장 보내준 것이다.

일단 국내 예보로 날씨를 확인하긴 했지만, 혹시 몰라 자세한 현지 예보를 요청한 거였다.

“촬영 시작은 괜찮은데…… 역시 촬영 중간이 문제일 것 같아요. 특히 관광섬 미션 들어갈 때.”

그렇게 말하며 내 모니터에 자료를 띄웠다.

“강우 예상이 80%에 바람이…… 야, 이 정도면 태풍 아니냐?”

여름의 끝자락.

태풍이 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는 시기긴 했다.

아직 태풍 예보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마 싶어 AGD 앱으로 태풍이 올 확률을 보았다.

[22%]

극히 낮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될 수치.

하지만, 필리핀에 대한 내 지식이 짧으니, 제대로 된 확률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럼 이 현지 예보가 맞을 확률을 알아보면 어떨까.

[98%]

너무나 높은 숫자가 나타났다. 어떻게든 2%를 올려서 ‘100%’ 달성 포인트를 받고 싶을 정도다.

“쳇.”

“응? 왜 혀를 차고 난리야.”

숫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가, 박주영 선배에게 한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보고는 했어?”

“예, 오자마자.”

“뭐래?”

“걱정하지 말라던데요. 필리핀도 구라청 못지않다고. 현지 코디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대충대충 하기는.”

박주영 선배가 어휴 하고 한숨을 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셋이 모였는데, 퇴근길에 한잔? 콜?”

“아, 저는 콜이요. 술이 너무 땡겨요. 삼겹살에 소주 가죠.”

“역시 작가 얼굴로 복귀하더니, 술 마실 줄도 알게 되고. 야, 강대한. 너도 갈 거지?”

뭐지. 분명 물어보고 있는데, 강제로 종용하는 느낌인데?

결국, 밤까지 두 사람의 주정을 받아주다가 집에 들어가야 했다.

* * *

다음부턴 내가 다음 날 숙취를 경험하지 않을 확률이라도 보고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토요일이지만, 사무실로 가 보니 전원이 출근해 있었다. 현준영만 빼고.

이게 방송계의 현실이지. 워라벨은 무슨.

당장 내일 아침부터 촬영 시작이니, 기재 따위를 최종 점검하고 각자 맡은 부분을 마무리하기로 한 거였다.

“방송계에서 주말에 일 안 하는 날이 올까요?”

“외국에서는 그렇다던데. 그게 우리나라에서 될까?”

박주영 선배와 이민희가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당잠사> 시즌3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출연진은 다행히도 시즌2에서 그대로 전원 유지되었다.

류준혁은 아직 프리인 상태로 합류했다.

촬영 도중에 다른 스케줄로 먼저 귀국해야 하는 멤버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작만은 모두 함께 진행할 수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송일현 매니저와 함께 도착한 최효명이 인사를 건넸다.

이후 속속 도착하는 출연진들에게 각각 마이크와 개인 캠을 들려 주었다.

그렇게 <당잠사> 시즌3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천공항에서 필리핀까지 4시간.

도착한 뒤 숙소까지 버스로 30분.

출연진이 짐을 풀기 무섭게, 미리 출발해 있던 스태프들이 준비해 둔 미션이 시작됐다.

그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출연진들의 모습이 속속들이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거기서 자르고, 네, 좋아요. 뒤쪽에서 다시 들어오세요.”

“마이크 체크 좀. 소리가 작네요.”

“이 장면에서 즐거운 음악 깔면 좋겠네. 체크해 놓으세요.”

사실 그동안은 현준영에게 일체 부정적인 감정만 생겼는데, 현장에서의 모습을 보니 프로페셔널했다.

방수정 PD가 현장을 지휘하는 모습은 몇 번 못 봤고, 현지 로케 때의 모습은 보지도 못했으니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각을 보고 즉석에서 카메라 위치나 배경 구성을 바꾸는 모습은 대단해 보였다.

확실히 보고 배울 것들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바로 옆에 붙어서 조수 역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하루, 이틀. 그렇게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다만, 예상했던 문제가 기어코 우리를 찾아왔다.

필리핀 촬영 나흘째. 예보대로라면 오늘 무조건 사고가 터질 거였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은 하늘이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뙤약볕만 내리쬐는 상황.

철저하게 선크림을 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날씨였다.

“거봐요. 현지 사람 말을 들어야 한다니까?”

촬영 시작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현준영은 왠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작진을 따라다니는 토마토투어 현지 코디도 그 뒤에서 덩달아 으쓱으쓱하고 있었다.

“니예니예, 잘하셨습니다.”

옆에서 박주영 선배가 소곤대며 한참을 투덜거렸다.

그러게. 저렇게까지 비꼬듯 이야기를 해야 하나?

다른 제작진들도 딱히 할 말을 못 찾고 그저 입만 다물고 있었다.

“자, 그럼 촬영을 시작해 볼까요? 대본대로 두 팀으로 나누어서…….”

하지만 결국 사달이 났다.

현준영이 대본을 가지고 제작진에게 설명하던 중에.

우르릉―

리조트 건물 밖, 하늘 너머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확률 ‘98%’.

그 수치대로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출연진이 모이는 것을 대기하던 중에, 로비 창 쪽에 카메라를 세우고 있던 카메라 감독 하나가 소리를 냈다.

“비 오는데요?”

그 소리에 가장 반응한 것은, 리조트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현지 코디.

“뭐라고요? 비?”

그다음은 유수현 작가를 붙들고 대본 수정에 관해 이야기하던 현준영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창으로 다가갔다.

“진짜네. 날은…… 그리 어둡지 않은데 비가 오네.”

좀 전까지 분명 쾌청했는데, 어느새 먹구름 같은 것이 짙게 하늘에 깔려 있었다.

필리핀은 동남아고, 동남아에는 스콜이 언제나 말썽인 동네.

“소나기일 거라네요. 금방 지나갈 거랍니다.”

현지 코디가 곧 그렇게 통역을 통해 의견을 전달했다.

“하긴, 비 올 확률이야 있긴 했으니.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촬영 진행하죠.”

현지 코디와 연출 책임이 그렇다고 하니 다들 고개만 끄덕이고 본인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도 차라리 ‘2%’의 확률로 내가 본 확률이 무효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거……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데요.”

박주영 선배와 나는 카메라 감독을 도와 리조트 건물 외부에 카메라를 세우려 했다.

출연진의 동선을 따라갈 카메라를 설치하려는 거였는데, 비가 너무 거셌다.

현관조차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소나기가 아닌데?”

“바람도 세잖아?”

박주영 선배도, 카메라 감독도 하늘만을 올려다봤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아예 어두워졌고, 아침 시간이 거꾸로 새벽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일단 카메라는 철수해야겠어.”

“대한아, 감독님은 내가 도울 테니까 너는 현 PD님한테 가서 이야기 전해.”

왠지 자긴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떠미는 것 같았지만, 며칠간 현준영과의 소통을 담당하고 있던 건 나였으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렇게 현준영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미 현지 코디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비 그치는 거 맞아요? 폭풍우가 될 것 같은데요?”

“필리핀 날씨는 워낙 변덕이 심해서 잘 예측이…….”

“아니, 이러시면 어떡해요. 지금 그쪽 믿고 촬영 진행하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끼어들 상황도 아닌 데다가 옆에서 ‘거 꼴 좋습니다.’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였다.

“형, 오늘 촬영 괜찮아요?”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효명이가 로비에 도착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류준혁이나 다른 출연진도 모두 시간 맞춰 로비로 내려와 있었다.

눈이 마주친 류준혁이 소리 없이 고개로 인사를 해 왔다.

“비가 좀 온다 싶은 정도가 아니네요. 쉽게 그칠 것 같진 않은데요?”

“안 그래도 지금 그 이야기 중이야.”

나도 같이 목례를 한 뒤, 일단 효명이를 비롯한 출연진을 로비의 소파로 안내했다.

오늘 첫 촬영이 시작될 곳이라 가장 먼저 준비를 끝마친 구역이었다.

“자세한 상황을 확인하고 올 테니, 일단 편히들 계세요.”

효명이한테 눈으로 잘 부탁한다고 신호를 보내자, 효명이도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눈빛만으로 통하는 출연진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하구나.

안심하고 다시 현준영을 찾았다.

현지 코디랑 격하게 대화하던 그는,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은 것 같았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아까보다 진정되어 있었다.

“PD님, 비바람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내부 촬영은 둘째치고, 배편 예약되어 있는 건 어떻게 할까요?”

“아, 배.”

현준영이 헉 하는 얼굴로 현지 코디를 돌아보았다.

“화, 확인 좀 더 해 볼게요.”

코디도 새파랗게 얼굴이 질리더니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둘러 본사에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 웬일로 촬영이 별일 없이 진행된다고 했다…….”

현준영이 옆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런 모습을, 메이킹을 담는 카메라가 담았다.

이마를 주무르던 현준영이 그것을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꺼요, 꺼. 지금 이 상황에 메이킹 찍어서 뭐 하려고.”

“아, 그래도…….”

방수정 PD였으면 끄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라서, 우리 팀에 익숙한 메이킹 감독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PD들의 동의를 구하는 얼굴이었는데, 그것이 현준영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얼른 끄라고요.”

둥그런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이 더해지자, 원래 그런 사람도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그런 사람에게 후속 조치를 부탁하자니 참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어떻게 할까요, PD님.”

현준영은 메이킹 감독이 카메라를 내리는 걸 확인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하던 일 하세요. 코디를 기다리기로 하고. 가져오는 대답에 따라서 생각하죠.”

“외부에 카메라 설치는…….”

“일단 그건 취소. 비싼 카메라를 버릴 수는 없죠.”

그래도 지시는 빨랐다.

현준영의 지시를 다른 제작진에게도 알렸다.

촬영을 그냥 속행할 셈이냐, 원래 기획대로 가는 거냐, 하는 이야기들이 로비를 정신없이 오갔다.

잠시 후.

코디가 파리한 낯빛으로 나타났다.

“그…… 오늘 배편이 못 뜬다고 합니다.”

“내일은?”

현준영의 반응은 정말 간단했다.

“그건…….”

코디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새로 가져온 예보를 갖고 우물쭈물할 뿐.

빼앗듯 자료를 확인한 현준영의 볼이 꿈틀거렸다.

“내일도 80%…… 모레도 85%……?”

관광섬으로 넘어갈 시점인데, 모든 게 다 수포가 되었다.

배가 뜨지도 않는데 그런 기획이 가능할 리가 없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

현준영이 예보 자료를 나에게 던져 주더니, 벌떡 일어났다.

“PD들! 작가들! 다 모이세요!”

PD와 작가들이 모두 로비 한쪽에 모였다.

내가 예보 자료를 들여다보는 사이 현준영이 말했다.

“기획을 바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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