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18화 (18/200)

18화 관행

“잘 아시겠지만, 전 사실 예능에 관심이 없었어요. 끼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아재 개그나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예능처럼 재밌게 만들어 준 분이 방수정 PD님이셨습니다.”

방수정 PD는 <당잠사> 초기 기획 때부터 류준혁을 캐스팅 제1순위에 놓고 진행했다고 했다.

그가 결정하지 않은 시점부터.

그렇게 류준혁을 어떻게든 설득해 데리고 왔고, 그를 중심으로 출연진을 꾸려 시즌1을 끝내 성공시켰다.

그녀는 기사를 통해 캐스팅 이유를 몇 번 밝히기도 했었다.

류준혁의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이 추구하는 여행 예능과 무척 잘 어울렸다고.

몇 번 사적인 자리에서 본 류준혁의 말솜씨가 상당했는데, 그게 선을 넘지도 않고 자로 잰 듯 반듯하기까지 한 게 정말 맘에 들었다고 했다.

그 판단은 정말 정확하게 먹혔다.

<당잠사> 시즌2의 일등공신이 최효명이라지만, 그렇다고 류준혁의 존재감이 죽은 건 아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현준영 PD는 내가 봐 온 중에서 가장 저자세로 류준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프로그램도 잘되었겠지요. 방 PD의 판단도 옳았고, 방수정 PD와 합도 잘 맞으셨고, 류준혁 씨의 능력도 훌륭하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준영은 선선히 웃으면서 류준혁을 보았다.

“반대로 이야기해 보죠. 방수정 PD가 아니었더라도, 류준혁 씨는 어떤 예능이든 분명 좋은 반응을 얻었을 거예요. 기억하시나요? 제가 메인은 아니었지만 관여했던 토크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오셨던 거.”

“어떤 프로였죠?”

“개그맨 유민석이 MC였던…….”

“아. 기억합니다. 첫 토크 방송이라 많이 긴장했었거든요.”

“그날도 류준혁 씨는 아주 잘하셨죠. 그리고 시청률도 그만큼 나왔고요.”

현준영이 하려는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방수정 PD가 없다고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 빈자리를 채울 테니까요. 저도 경력은 방 PD랑 비슷합니다. 한번 믿어봐 주시고, 시즌3도 같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효명이를 만났을 때와 사뭇 다른, 아주 간절한 태도였다.

“음…… 제가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류준혁은 한발 양보한 감으로 잠깐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당잠사>니까 저도 당연히 합류하고 싶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현재 회사 문제로 조금 골치가 아파서, 이 일이 해결되기까지 뭔가를 결정하는 것이 다소 버거운 입장입니다.”

“새 회사를 찾는 중이라는 소식은 저도 들었는데, 이야기가 잘 안 풀리는 중이신가요?”

“그렇다기보단…… 제가 아직 결정을 못 내린 거지요.”

류준혁의 새 회사에 관한 기사는 몇 개 봤었다.

효명이의 소속사인 ‘플래티넘’도 후보군에 있다던데, 그 외에도 물론 다양한 곳에서 러브콜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류준혁 본인은 자신이 창립한 회사에 덴 입장이다 보니 결정하는 데 있어 다소 소극적이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만약 회사가 있는 편이 일이 빠르실 것 같다면, 제가 회사를 소개시켜 드릴 수도 있는데요.”

현준영은 여상스럽게 말했다.

“경력이 좀 있다 보니 여기저기 회사는 많이 알고 있어서요. 어떻게,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전화 한번 해 볼까요?”

테이블에 스마트폰을 꺼내 올린 현준영이 톡톡 두들겼다.

류준혁과 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갔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류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해야 할 부분인걸요.”

“뭐, 그러시다면야. 대신 좀 전에 해 주신 말씀은, 일단 출연에 긍정적인 입장이라고 해석해도 될까요?”

“예, 그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기획서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드리도록 하죠.”

현준영이 조금 신이 난 말투로 기획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내가 보탠 내용도 많았지만, 당연히 나설 기회는 없었다.

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저 필요할 때 물을 따라 주고, 직원을 부르고, 차를 들이는 역할을 했다.

여담도 포함해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일정이 이 정도니까 아마 빠른 결정만 내려 주시면 무리 없이 진행될 것 같네요.”

“그래도 다음 달 바로 촬영이라니 빡빡하긴 한 것 같습니다.”

“에이, 아직 영화도 시나리오 고르는 단계시라면서요. 회사만 잡으면 조정은…… 아,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현준영이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팅도 거의 막바지여서, 테이블에는 이제 남은 음식도 없었다.

류준혁과 둘이 남으니 어색했다. 딱히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테이블 위로 약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아, 후식 들일까요?”

“네, 그러시죠.”

일단 그렇게 직원을 불러 후식을 시켰다.

그렇게 말의 물꼬가 트였다.

“효명이가 류 배우님 이야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효명이가요? 아, 그러고 보니. 친하다고 하던 강 PD님이 바로 그쪽이셨군요. 몰라 뵈었네요.”

“아, 제 이야기도 했나 보네요.”

다행히 효명이의 이름을 꺼내자 분위기는 금방 부드럽게 풀렸다.

우린 잠시 효명이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착한 친구더라고요. 아이돌을 잘 아는 건 아닌데, 깐깐하지 않을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이미지를 다 부숴 줬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참 생각하던 아이돌 이미지와는 다르더군요.”

공동화제 덕분에 이야기가 쉽게 이어졌다.

“사실 효명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하셨지만, 회사 정하시는 데 많이 고민 중이시라고…….”

“뭐, 그렇죠. 사실 누구하고 머리를 맞대기보단 올곧이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보니까요. 효명이한테 좀 털어놓기는 했었습니다.”

“플래티넘…… 에서도 제안을 받으셨고요.”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류준혁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 위를.

좀 전부터 AGD 앱으로 확인했던 확률이 거기 있었다.

[83%]

‘플래티넘이 계약했을 경우, 류준혁에게 도움이 될 확률’이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다른 회사의 경우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혹시 플래티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플래티넘 대해서 좀 아시나요?”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당신이 플래티넘으로 가면 80%가 넘는 확률로 합이 잘 맞을 걸 안다고?

하지만, 이내 나는 포기했다.

사실 나는 류준혁의 일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은 효명이가 주목받은 것 때문에 생긴 일인데, 효명이가 시즌2에 출연하게 된 건 나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결정에 관여해 확률이나 보고 있다니.

생각해 보니 참 주제 넘는 짓이다.

따지고 보면 류준혁 본인이 선택할 일이고, 그의 삶인 건데.

당장 확률을 써서 내 인생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선택에 참견하려 하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지랖이고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아뇨, 뭐 제가 아는 건 효명이가 다죠. 굳이 따지면 그 매니저인 일현 씨라든가요.”

그냥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을 해 주자.

“하지만, 전에 효명이를 따로 만났었는데, 배우님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같이 해 보고 싶다고.”

“…….”

“회사에선 그냥 배우님께 밀어붙여 보라고 난리를 부리는 모양인데, 효명이가 배우님껜 그렇게 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해서 양쪽 눈치를 보는 모양이에요.”

참 착한 친구인 것 같아요. 하고 뒷말을 붙이면서 보니, 류준혁의 표정이 딱딱했다.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어 얌전히 있으려니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배려해 준 걸까…….”

주어도 없으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현준영이 돌아와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이고, 죄송해요. 통화가 길어졌네요.”

류준혁은 대번에 표정을 바꾸면서 그를 맞이했다. 어쩐지 프로다워 보였다.

“그럼, 최종 결정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서 회사 정하시구요.”

여상스럽게 인사하면서, 현준영이 류준혁을 배웅했다.

직접 차를 몰고 온 류준혁은 이 이후에 다른 미팅이 있다고 했다.

그는 운전석 앞에 서서는 잠시 이쪽을 보더니,

“많이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곤 먼저 떠났다.

마지막 눈길이 어째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거참, 끝까지 맘을 못 놓게 하네. 대배우셔서 그런가.”

현준영이 옆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다소 짜증이 났다. 이 사람은 좀 전까지 대화를 직접 나눴으면서 그 정도 감상밖에 안 드는 건가.

“난 여기서 퇴근할 테니 강 PD도 퇴근하세요.”

그가 그런 말을 남기고 먼저 떠나지 않았다면 더 불쾌했을 거다.

현준영이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뒤에야,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에서 상암이라.

버스를 타면 한참 걸릴 길을 머리에서 상상하면서 대로 쪽으로 걷는데,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이 진동을 했다.

“……응?”

[방수정 PD님]

의외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 * *

일주일 만에 보는 건데, 어쩐지 몇 달은 된 것처럼 보였다.

첫 감상은 얼굴이 전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는 것.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제대로 못 드려서 계속 맘에 걸렸었습니다.”

“인사? 무슨?”

방수정이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자 괜히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녀가 사겠다는 맥주를 괜히 한 모금 꿀꺽 삼킨 뒤 다시 말했다.

“잘 봐주시고…… 많이 가르쳐 주셔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고, 그런 말을…….”

“아하.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런 캐릭터 아니지 않았나?”

방수정 PD는 산뜻해진 얼굴로 맥주를 마시더니 키득 하고 웃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해야지. 최효명 캐스팅을 반대했던 것도 그렇고, 내가 그동안 너무 남의 의견을 안 듣고 살았나 하고 반성하게 해 줬으니까. 고맙기도 하고.”

방수정 PD는 잔을 들어서 내게 가져왔다. 건배하자는 모습. 어색하게 그 잔에 잔을 맞추었다.

오늘 현준영을 만난다고 류준혁이 방수정 PD에게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미팅이 끝나고 나도 봤다면서 연락을 줬고.

방수정 PD는 때마침 강남의 병원에 있었는데, 그래서 내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가 잘 안다는 맥주집에 들어왔다.

“이런 자리, 한번 갖고 싶었어. 다른 애들이랑은 한 번씩 했지만, 대한이 네가 온 뒤로는 회식도 잘 안 했으니까.”

모시던 대장과 이렇게 일대일로 앉아 있으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인사를 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방수정 PD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내가 알던 모습보다 말투가 부드러웠다.

난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마음먹고, 말을 늘어놓았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입을 열고 나니 말하기가 수월했다.

“현 PD를 따라다니게 되었다고?”

“네. 출연진 교섭할 때도 그렇고, 전부 따라다닐 것 같습니다.”

“짐꾼이야?”

“그런 이유도 있겠죠?”

방수정 PD는 콧방귀를 끼고는 다시 말했다.

“나한테 했던 것처럼, 네 의견이 있으면 꼭 제대로 말하고. 현 PD가 들어주냐 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들어주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네요. 더 따라다녀 보겠습니다.”

“하긴, 너 정도 짬에 그런 경력자 따라다니는 것도 도움이 될 거야.”

“권 선배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 나쁜 것만 배우지 말고.”

“그 말도 들었습니다.”

현준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우려하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난 맥주 한 모금으로 다시 목을 축인 뒤 조심스레 물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PD님.”

“뭔데?”

“프로그램 도와준 여행사…… 는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방수정 PD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난 현준영과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왜 필리핀이 되었고, 왜 그 일정이 되었는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던 방수정 PD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이 너, 이제 곧 1년 되던가?”

“예. 두어 달 정도 남았습니다.”

“그래……. 그럼 슬슬 알게 될 때는 됐구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절로 침이 삼켜졌다.

“<당잠사> 같은 여행 프로그램은, 관여된 거래처들이 다른 예능보다 훨씬 많아. 그걸 쉽게 하려고 여행사랑 손을 잡는 거고.”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여행사랑 계속할 수 없지. 여행사마다 전문 분야가 있고, 또 사정이란 것도 있고.”

하긴, <당잠사>도 시즌1과 시즌2를 도와준 여행사가 달랐다.

“그런데 이게 결국엔 영업이거든. 여행사가 PD나 회사를 상대로 얼마나 잘 영업을 하느냐의 문제인 거지. 그리고 그 영업이라는 게 사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영업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까.

“……관행이지, 관행.”

방수정 PD는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마찬가지로 쓴 맥주를 비웠다. 나도 함께 맥주를 비우고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그걸…… 관행이라고 합니까?”

“관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방송사 직원이 매일 밤샘하는 것도 관행이고, 외주 회사에 시급하게 일 넘기는 것도 관행이고. 많은 경우를 퉁 쳐 주는 마법의 단어가 관행이야.”

때마침 맥주가 도착해서, 거의 절반을 꿀꺽 삼켰다.

“현 PD랑 여행사 간에 아마 관행이 있었겠지? 그래서 거길 선호하는 걸 테고.”

방수정 PD가 피식 웃었다.

“이 방송계는 원래 많은 일이 그렇게 진행돼.”

그녀의 말투는 전에 없이 냉정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런 관행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요?”

“그럴 리가.”

뭐랄까, 달관한 듯한 어투였다.

“너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이야기해 주는 거야. 방송계에서 일하다 보면 앞으로 그런 일은 더 많아질 거야. 고민하는 건 좋아. 그렇다고 질려서 때려치우거나 하진 마. 넌 충분히 센스가 있어. 그만두기엔 아까워.”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났다. 내 센스일까? AGD의 센스일까?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만두진…… 않을 겁니다.”

“그래, 그럼 돼.”

방수정 PD는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아직 차 있는 그녀의 잔과, 반쯤 비워진 내 잔.

나는 잔을 부딪치며 물었다.

“방 PD님도 그런 관행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물음에, 방수정 PD는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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