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출연진 교섭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출연진 교섭은 각 기획사 매니저들에게 일정 확인하는 일과는 또 다르다.
사실상 내 짬에는 힘든 일이고, 효명이 일이 아닌 이상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필리핀 관광섬 아이디어, 아주 인상 깊었어요.”
권민헌 PD를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나만 세워 둔 상태에서 현준영이 이야기했다.
“서 부장님한테 들어보니 지난 시즌 클립도 직접 편집을 담당했다고도 하던데, 맞나요?”
“아……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박주영 PD, 이민희 작가도 함께 만든 거였습니다.”
난 애매하게 말했다. 나보다 선배인 두 사람의 몫까지 내 역할로 돌리기는 싫었다.
“그래요. 그것도 들었어요. 그래도 가장 비중이 컸다던데.”
그렇게 입을 뗀 현준영이 말을 이었다.
“뭐 꼭 대답하라는 건 아니고. 아무튼 그 일로 서 부장님도 강 PD를 칭찬하더군요. 나도 그래서 그 덕 좀 보려고요. 나랑 같이 출연진 만나요. 나도 전 시즌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좀 더 편하니까.”
“그럼…… 저보다 권 PD님이나 다른 분들이 낫지 않을까요?”
왠지 모를 거부감에 나는 한 번 더 빙 돌려 거절 의사를 전했다.
“권 PD는 권 PD대로 할 일이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철벽을 상대하는 느낌이란 게 이런 건가.
현준영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웃는 얼굴이지만 결코 미소로 보이진 않았다.
반론하지 말라는 압박도 느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권민헌 PD와 아침을 먹는 계획은 취소되었다.
오전 동안 출연진들과 출연진들의 회사와 연락해 약속을 잡고, 또 가일정에 맞추어서 외주 회사들과 전화 협의를 하고.
그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현준영이 먼저 일어섰다.
“난 서 부장님이랑 식사하고 올게요.”
그가 위층으로 간 사이, 팀원들이 점심을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야, 뭔가 냄새가 나.”
박주영 선배가 옆으로 붙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새벽에 분명 씻었는데요.”
“그거 말고. 현 PD가 영 수상하다는 거야.”
박주영 선배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굳이 너를 데리고 다니려느냐 이 말이지. 데리고 다니려면 누가 봐도 권 선배인데.”
멀지 않은 곳에 권민헌 PD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은 매우 신경 쓰이지만, 본인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가 먼저 꺼낼 말도 아닌 것 같고.
“기회라면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인데…… 내가 전에도 말했지? 눈에 띄어서 딱히 좋을 게 없다고. 근데 넌 벌써 눈에 띄었잖아.”
회의시간에 괜히 나선 거다, 일이 잘 풀렸다 해도 그건 아닌 거다.
박주영 선배의 의견은 줄곧 그랬다.
물론 내 의견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고, 지금 말처럼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괜한 말 하지 마.”
조심한다고는 했는데 권민헌 PD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
“현 PD님이 막내 챙기는 건데 박주영 네가 왜 나서.”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선배가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웅얼대자, 권민헌 PD가 슬쩍 흘겨보고는 나를 보았다.
“오히려 나 대신에 고생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어쨌든 메인 PD가 좋게 봐주는 거니까 기회라고 생각하고 잘해 봐. 경력 긴 분이니 따라다니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권 PD가 그렇게 웃어 주니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 무슨.”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와서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팀원들끼리 도란도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또 외주 회사랑 씨름을 할 때였다.
[엑시트최효명: 형 오늘 시간 될 것 같아요.]
효명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효명이와의 연락은 내가 맡기로 했고, 시간 괜찮은지 확인해 달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바쁘다지 않았어? 미팅 연속이라며.]
[엑시트최효명: 미팅 하나가 취소돼서 두어 시간 남아요. 여기 상암인데 갈까요?]
나는 폰을 든 채로 현준영에게 가서 보고했다.
“상암에 있다고? 지금 바로?”
“네. 오라고 할까요?”
“그래, 뭐. 그러라고 하세요.”
효명이에게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엑시트최효명: 1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갈게요! (쌩)(윙크)]
이모티콘을 달고 곧장 답장이 도착했다.
“바쁜 아이돌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요.”
미리 회의실로 가서 준비하고 있자, 현준영이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원래 다른 스케줄이 있었는데 그쪽이 취소되어서 두어 시간 빈다고 합니다.”
“두어 시간이라. 별로 긴 이야기는 아닐 테니 우린 빨리 끝내고 움직이죠.”
사실 오늘 저녁에 선약이 잡혀 있었다.
바로 류준혁.
소속사가 없는 상태인 류준혁에겐 유수현 작가가 직접 연락을 했는데, 오늘 보기로 약속이 잡혔다.
현준영의 말에서, 효명이보다 류준혁이 더 중요하게 친다는 느낌이 읽혔다.
뭐, 인정한다. 시즌2를 하드캐리한 건 최효명이지만, 인지도 면에서는 역시 류준혁이 앞서니까.
그래서 나도 잠자코 대답만 했다.
약속한 10분 뒤에, 효명이가 송일현 매니저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송일현 매니저가 덥석 현준영의 손을 맞잡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준영 PD님.”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요?”
“아…… 그, 오디션 프로그램 만드실 때, 한번 미팅했었습니다.”
송일현 매니저가 인사를 하면서 명함을 건넸다.
현준영은 슬쩍 명함을 보는 척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기억나네요.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기획하고 있다던 아이돌이 엑시트였나요?”
“예, 맞습니다. 여기 효명이도 그때부터 있던 아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효명입니다.”
효명이도 현준영을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했다.
늘 그렇듯 사교성 있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자, 현준영도 빙글 웃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네, 반가워요. 아이돌이라 그런가 얼굴이 훤해서 좋네요.”
“하하, 그렇게 봐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금세 회의 자리가 밝아졌다.
역시, 이게 효명이의 힘이겠지.
그렇게 잠시간 과거 이야기와 근황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현준영이 본론을 꺼냈다.
“대략 이야기는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시즌3의 가안이 나왔습니다. 일단 이걸 보시죠.”
내가 정리해 둔 2차 기획서를 두 사람에게 주었다.
송일현 매니저와 효명이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검토하는 것을 보면서 기획에 대해 설명했다.
촬영지, 일정, 미션 등등.
두 사람이 무엇보다 흥미 있게 보는 것은 필리핀 관광섬 미션이었다.
“여행에 관심이 많아서 필리핀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섬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요.”
“그렇죠, 여행사에서도 추천하는 곳입니다. 풍경도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촬영 일정은 여기 적혀 있는 대로인가요?”
송일현 매니저가 확인했다.
“대략 그렇게 될 전망입니다. 배편이나 비행기 문제도 있고, 여행사에서도 그 기간이 최적이라고 하더군요.”
“조정은 일절 안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출연진분들이랑 이야기해서 조정하긴 할 겁니다. 다만 그 기간이 가장 좋다는 거지요.”
필리핀에서 대략 열흘간의 기간.
아직 출연진 교섭이 끝난 것이 아니라서 일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힘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조정한다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저 기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못을 박는 것 같았다.
효명이와 송일현 매니저가 목소리를 낮추어서 잠깐 비밀 대화를 나누듯 귓속말을 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렸다.
그렇게 잠깐의 대화를 나누더니, 효명이가 밝게 이야기했다.
“저흰 이 일정 괜찮습니다! 시즌2도 그랬지만 3에서도 꼭 같이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현준영이 빙글 웃으면서, 노트에 뭐라고 끄적인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시즌3 출연 결정해 주신 걸로 알고 있을게요. 조만간 출연 계약서도 보내드리지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효명이와의 미팅은 그렇게 스무스하게 끝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면서, 현준영은 회의실 앞에서 인사만 하고 사무실로 도로 들어갔다.
나는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말 괜찮겠어? 아까 보니 스케줄 뭔가 겹치는 거 아니야?”
“아. 싱글 발매하고 나서 팬미팅 같은 게 있어서 그거랑 좀 겹칠 것도 같은데, 괜찮아요. 조정하면 되니까.”
효명이는 아주 밝게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송일현 매니저가 엘리베이터에 효명이만 태웠다.
“너 먼저 차에 가 있어. 나는 강 PD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갈게.”
“어? 나만 빼고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요! 내 욕 하려는 거지!”
“헛소리 말고, 어서.”
송일현이 짐짓 엄격하게 효명이를 엘리베이터에 태워 내려보냈다.
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야 송일현은 나를 보았다.
“괜히 마음에 걸려서요. 강 PD님, 현 PD님이 이야기한 그 여행사라는 곳, 어떤 곳인가요?”
“어…… 전 회사에서부터 현 PD님이 주로 거래했던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은 아주 빠르더군요.”
“촬영 일정도 그 회사가 정해 준 건가요?”
“그건 아닌데…… 현 PD님이 직접 이야기해서 잡은 일정이긴 합니다. 혹시 스케줄 맞추기가 어려우신가요?”
“아니요. 효명이 말대로 조정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좀…… 출연진 스케줄보다 여행사 일정을 더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
아…….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됐다.
안 그래도 회의 때부터 줄곧 느꼈던 위화감이었다.
왜 자기가 잡은 일정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맞추려 하는 걸까.
어쩐지 송일현 매니저도 그 부분을 맘에 걸려 하고 있었다.
“뭔가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음……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아아, 아닙니다. 아무튼 이번 촬영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만 남기고, 송일현은 금방 자리를 떴다.
이래서야 고구마 두어 개는 먹은 듯한 답답함밖에 남는 게 없었다.
* * *
답답함에 괜스레 사이다 캔 하나를 사 먹고서 사무실로 복귀했다.
금세 현준영이 외근을 보챘다.
류준혁과 약속한 시각은 5시.
아직 시간은 넉넉했지만, 약속 장소는 강남이었다.
결코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차 없어요?”
“예, 아직…….”
“PD는 차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무슨 일이 생기든 빨리 움직일 수 있지.”
현준영의 차 조수석에 타고 가는 내내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PD는 차가 있어야 하지만, 막내 PD는 차 살 돈이 없는데요.
그런 생각을 애써 삼켜야 했다.
현준영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영양가 없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시시콜콜한 방송계 이야기를 듣기에는 좋았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는 동안 차는 금방 강변북로, 올림픽대로를 지나 강남에 도착했다.
그렇게 5시라는 다소 이른 저녁.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장소는 일식집이었다. 류준혁이 은근히 일식집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일식집에 들어서자, 류준혁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류준혁입니다.”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뵐 수 있게 되었네요.”
류준혁과 현준영은 초면인 듯했다.
하긴 예능 PD와 예능에 연이 크게 없던 배우 사이이니 그럴 만했다.
나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강 PD님. 마지막 촬영 때는 제가 신세를 졌었죠.”
“신세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손을 젓고 있자 현준영이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왔다.
참 이 사람은 곤란한 걸 잘도 묻는다.
어떻게 대답해야 그날 류준혁에게 있었던 일을 건드리지 않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데
“제가 그날 사실 촬영이라는 걸 깜빡하고 다른 스케줄을 하고 있었거든요. 연락도 안 되는 상태였는데, 여기 강 PD님이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찾아내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덕분에 촬영에 합류할 수 있었죠.”
“아하. 아찔한 일이군요. 매니저분은 뭐 하고 있었다나요?”
“당시 매니저도 그땐 다른 일정 때문에…….”
류준혁은 말을 흐렸다.
역시…… 의도하지 않아도 잘 찌르는 사람인가 보다.
현준영은 아무렇지 않게 건드린 것이다.
이른 저녁 식사로 초밥 코스가 상에 오른 뒤, 현준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시즌3에 출연해 주십사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들으셨겠지만, 일정이 다소 당겨졌어요. 하지만 저희로서는 류준혁 씨가 꼭 필요합니다. 현재 회사가 없는 상태셔서 이렇게 직접 찾아뵈었는데, 어떠실까요. 시즌3도 같이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현준영이 내게 눈짓을 보냈다.
난 기획서를 꺼내 류준혁에게 넘겼다. 원래라면 매니저가 받아 상의했을 테지만, 지금 류준혁은 혼자였다.
그는 기획서를 직접 받아 몇 장을 훑어보았다.
“일단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장 보지 않고서, 류준혁이 입을 뗐다.
“전…… 방수정 PD님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